제프 다이어의 사진비평서 <지속의 순간들>
1800년대부터 현재까지 활동한 42명 사진작가들 다뤄
맹인 누드 모자 등 테마별로 어떻게 왜 찍었는지 분석
잘 모르는 어떤 사람을 소개하는 방법으로 유명한 사람의 이름에 기대는 경우가 있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방식이다. 거의 무명에 가까웠던 헬렌 레빗을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주류사진계에 들이밀어 알린 사례를 들 수 있다. 브레송의 명성 때문에 (어떻게든) 헬렌 레빗의 사진을 찾아보게 하였는데 결과적으로는 좋았다. 이는 좋은 사례다. 그렇지 않은 사례도 적지 않지만 그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오늘 소개할 책은 난생처음 듣는 저자의 책인데도 알랭 드 보통의 한 문장짜리 추천사에 끌려 읽게 되었지만 읽다보니 좋았기 때문이다. 좋으면 좋은 것이다.
제프 다이어의 책 ‘지속의 순간들’을 소개한다. 제프 다이어의 책은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나는 사진가가 아니다. 나는 카메라가 한 대도 없는 사람이다”라는 고백과 경고로 책을 시작한다. 솔직해서 좋다. 그렇지만 책을 보고 나면 제프 다이어가 사진에 대해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비교된다. 저마다 ’인문학과 사진’의 결합이라고 이름붙이는 것이 대유행인 한국 사진계의 상황을 잘 들여다보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다.
이 책은 1800년대 초기부터 현재까지 활동한 42명의 사진작가들을 다루고 있다. 그럼 먼저 내가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만든 평들을 소개한다.
<뉴요커> “일부러 절충적이고 불완전하게 만든 기묘한 백과사전”
<선데이 텔레그래프> “사진에 관한 책들 중 가장 우아한 통찰을 보여주는 수작”
<보스턴 글로브>는 “위대한 이야기꾼이 선사하는 깊은 감동”
존 버거 “이 책을 읽고 나면 삶이 더 크게 보인다”
알랭 드 보통 “사진 그리고 삶에 대한 경이로운 명상”
<뉴요커>같은 신문의 인문서 담당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런가 보다 생각했는데 존 버거와 알랭 드 보통이 저렇게 말을 했다고 하니 솔깃했다. 최소한 저 두 사람은 아무 책이나 좋다고 하진 않을 사람들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읽기 시작했다. 아래는 내가 쓴 소감문이다.
단락을 구분해주거나 소제목으로 나눠주는 이유는 독자들의 편의성을 위함이다. 그런데 이 책은 전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불편했다. 처음엔. 서문에 해당하는 10쪽 정도의 글을 넘어가면 바로 이 책의 제목이자 본문인 ‘지속의 순간들(The on Going Moment)’이 시작된다. 그리고 옮긴이의 글이 나오기 전까지 계속 본문이다. 본문 사이에 아무 구분도 없다. 주절주절 나가다가 사이사이에 글에 해당하는 사진이 나오지 않았다면 읽다가 지치기 딱 좋게 만들었다. 그런데 사실상 사진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다가 지칠 일이 없을 것이다. 이 책의 장점은 쉽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며 언제 어느 쪽을 넘겨서 시작해도 전체를 이해하는데 큰 지장이 없다는 것이다. 가령 57쪽에 케르테츠와 그의 사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252쪽에도 여전히 케르테츠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물론 그 사이에도 숱하게 케르테츠가 언급된다. 워커 에반스, 폴 스트랜드,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등도 두서없이(이것은 처음 생각이었을 뿐이다. 저자는 나름대로 맥락을 갖고 있다) 여러차례 튀어나온다. 아마도 가장 많이 언급된 것은 워커 에반스 같은데 굳이 누구에게 가장 방점을 두고 있는지 세어볼 일은 없다. 이 책은 특정 사진작가에 대한 글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작가들의 사진에 대한 깊이 있고 통찰력 있는 비평서다. 이 비평서의 결정적인 장점은 사진이야기를 사진을 통해서 풀어간다는 점이다. 책 24쪽 아래에 저자가 쓴 주석이 있다.
“이 책을 쓰면서 당면한 과제 중 하나는 버거, 손택, 바르트, 발터 벤야민 등을 빈번하게 인용하는 일을 피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책에는 굳이 그들의 것이 아니더라도 인용문들이 많이 실려있다.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한 독자들이라면 주석을 참고하라. (그러나 이 텍스트 자체가 사진에 관한 방대한 주석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24쪽을 넘기면서, 즉 서문의 마지막을 읽으면서 본문을 끝까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므로 서점에서 이 책의 간을 볼 때 반드시 몇쪽 안되는 서문을 읽어보고 판단하시길 바란다. 물론 본문의 아무쪽이나 무작위로 펼쳐들고 두 쪽만 넘어가면 이 책이 마음에 들 수 밖에 없다.
폴 스트랜드: 눈먼 여인, 1916
게리 위노그란드: 뉴욕, 1968
워커 에반스: 뉴욕 2월 25일, 1938
사회적 테마 혹은 작가별 테마
이 책의 저자 제프 다이어와는 다르게 나는 중간제목을 달아서 이 책을 소개하려고 한다. 도저히 나의 실력으로는 끊지 않으면서 문장을 이어갈 재간이 없다. 이 책이 좋은 이유 중의 또 한가지는 테마 혹은 대상에 대한 설득력있는 전개와 분석과 이해가 있다는 점이다. 스포일러가 될까봐 본문을 직접 소개하지 못하는 소심함을 버리겠다. 예를 들어 루이스 하인과 폴 스트랜드와 스티글리츠와 에반스가 각각 다른 시공간에서 찍은 별개의 ‘맹인’ 혹은 ‘눈먼 사람’ 사진에 대한 긴 설명은 바로 사회적 테마에 관한 서술이다. 작가들이 어떻게 각자의 방식으로 ‘맹인’을 찍었는지 연구했고 설명한다. 작가들이 어떤 이유로 ‘맹인’을 찍었는지 분석한다.
“대부분의 사진가들은 도로테아 랭이 ‘투명 망토(cloak of invisibility)‘라 부른 옷을 입기를 바랐던 반면, 위노그랜드는 자신의 존재를 거슬릴 정도로 고압적으로 드러냈다” 책 37쪽에서
이런 테마에 대한 고찰이 이어진다. 손, 누드, 벤치, 모자…. 그러므로 현재 자신의 사진작업이 고착상태에 빠진 사람이라면 바로 이 책, ‘지속의 순간들’이 딱 필요한 것이다. 공부를 위한 책인데도 골치 아프지 않게 술술 넘어간다. 게다가 그 누구도 이 책의 내용을 허술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자신이 그동안 찍어놓은 사진들 중에서 어떤 맥락을 잡아서 전시를 하거나 혹은 전시같은 것은 꿈꾸기 어렵더라도 최소한 정리라도 하고 싶은 사람을 위한 가이드북의 역할을 아주 잘하고 있다. 한 사진이 다른 사진과 어떻게 이어질 수 있는지, 이어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사진을 찍는 것보다는 다른 작가들의 사진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 책은 큰 도움이 된다. 이를 위해 저자는 작가의 생애와 에피소드와 대상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조사를 많이 했고 그 보따리를 술술 잘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마디로 ‘스카이콩콩’을 타고 뛰어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스카이콩콩을 타본 사람이라면 이게 무슨 느낌인지 알 것이다. 이 놀이기구는 정확한 방향의 운동을 보장하지 않으므로 어디로 튈지 예측하기가 힘들다. 그렇지만 그렇게 위험한 기구는 아니다. 왜냐하면 넘어지려는 순간에 언제든지 발을 딛고 일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발을 딛는 아무곳이든 그곳에서 다시 놀이를 시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