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감(五感)이라는 표현이 워낙 익숙하게 쓰여 사람의 감각도 다섯 가지가 전부인 줄 아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 사람이 느끼는 감각은 그보다 훨씬 범위가 넓다. 그중 평시에는 인지하고 있는 줄도 잘 모르지만 무척 중요한 감각 중 하나가 신체의 위치, 자세, 움직임, 힘 등을 느끼는 ‘고유감각’이다. 용어는 낯설어도 개념은 쉽다. 내 몸의 부속들이 제각기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인식하는 정상성(正常性)에 대한 감각이기 때문이다. 눈으로 좇지 않아도 젓가락으로 집은 음식이 내 입에 무사히 안착하는 건, 무의식 중에도 내 손과 입의 현재 위치를 알고 있어서다. 계단을 오를 때 애써 발밑을 살피지 않아도 우리는 무릎을 알맞은 정도로 굽혀, 발을 적당한 높이로 들어 올릴 수 있다. 발이 대략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고유감각이 알려주기 때문이다. 인체를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 자체가 고유감각 덕분이라고 볼 수이다 우리의 존재에는 모든 것이 표현으로 의미를 부각할 수는 없다는 것을 재 인식하는 시간이었다
(조선일보 윤희영의 글) 역발상(inverse thinking)을 하면 안 보이던 것이 보인다. 새해 결심(New Year’s resolution)에 그런 역발상을 적용해보면 어떨까. ‘해야 할 것’이 아니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정하고, ‘덧셈(addition)’이 아니라 ‘뺄셈(subtraction)’을 하면 삶의 무게는 줄어들고 질은 높아진다.
‘잠자리에서 게임하지 말 것’부터 ‘뒷담화하지(talk behind others’ backs) 않기’ ‘다른 사람 원망하지(blame others) 말 것’ ‘시기하지(be jealous of others) 않기’ ’쓸데없는 불평(useless complaint) 하지 말 것’ 등 도움 되지 않거나 짐 되는 행위(unhelpful or burdensome behavior)를 “새해부터는 하지 않겠다”고 작정해보라는 얘기다.
행복 연구 전문가인 미 하버드 대학교 아서 브룩스 교수는 이 같은 정반대 접근 방식을 주장한다(argue for the opposite approach). 덧셈이 아니라 뺄셈에 집중해야 행복해진다고 설득한다. 현명해지는 가장 쉬운 방법이 멍청한 짓거리를 피하는(avoid doing dumb things) 일인 것처럼, 즐거움을 좇는(chase after joy) 것보다 괴로움·불쾌감 주는(cause pain and discomfort) 요소를 제거하는 편이 더 이롭다고(be more beneficial) 말한다.
그러려면 ‘to-do list(해야 할 일 목록)’와 별도로 ‘to-don’t list(하지 말아야 할 일 목록)’도 만들어봐야 한다. 우선 나쁜 습관, 의무감, 남들의 기대감 탓에 어쩔 수 없이 해온(do out of bad habits, obligation, or others’ expectations) 것들을 적어본다. 실연한 젊은이들(lovelorn young people)이 한창 좋았던 연애 시절에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하며 어렵사리 깨닫는(learn the hard way) 것과 닮은 과정이다.
예를 들어 “‘감정 흡혈귀(emotional vampire)’와 시간 보내지 말 것”도 있을 수 있다. 기운 빠지거나 우울하게(feel drained or depressed) 하는 사람과는 접촉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부정적인 얘기 듣지(listen to negative talk) 않기”는 비관적이거나 좌절감 주는 대화에는 아예 끼지(engage in pessimistic or frustrating conversation) 않겠다는 것이고, “완벽한 시간 기다리지 말기”는 사람·사물·환경이 시시각각 변화하는데 이제나저제나 하며 허송세월하지(waste time) 않겠다는 의지를 다지는(strengthen the will) 것이다.
“모든 것을 단번에 정복하려(conquer everything in a single leap) 하지 말 것” “과거 문제에 집착하지(dwell on past problems) 말 것” “모든 것에 매달리지(hold on to everything) 않기” “항상 나만 옳다고(be right) 우기지 말 것”.
‘to-don’t list’는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는(hold you back) 행위·습관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스스로의 약속이다. 그래야 비생산적·소모적 상황에 휘둘리지(be swayed by unproductive and wasteful situation) 않고 더 중요한 일에 집중해 가장 효율적으로 재능을 ‘올인’할 수 있게 된다.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간다”는 말에서 ‘쏜살’은 ‘활로 쏜 화살(an arrow fired from a bow)’을 뜻한다. 영어에도 똑같은 표현이 있다. ‘Time flies like an arrow.’ 새 밀레니엄(millennium·1000년)을 앞둔 1999년, 전 세계는 Y2K(Year 2000) 공포에 떨었다(tremble with fear). 2000년으로 넘어서는 순간 컴퓨터에 인식 오류(recognition error)가 생겨 대혼란을 야기할(cause a pandemonium) 것이라는 우려였다. 그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24년이 지났다. 며칠 후면 2025년이다. 시간에 대한 인식·지각(time perception)은 상대적이다(be relative). 나이가 들수록(get older) 빨라지는 것처럼 보인다(seem to accelerate). 일곱 살 아이와 70세 노인에게 365일 기준 3153만6000초, 52만5600분, 8760시간, 1년 길이는 똑같아도 속도는 다르게 느껴진다. 즐겁고 재미있을(have fun) 때 시간은 금방 지나가지만, 힘들고 단조로운 일(drudgery work)을 할 때는 질질 늘어진다(drag on). 너무나 힘겨운 순간엔 마치 정지해 있는(stand still) 듯하다. 중년 문턱을 넘어서면(cross the threshold of middle age) 어릴 때와 달리 시간 속도가 급속히 빨라지기 시작한다(begin to speed up rapidly). 노년에 들어설(reach old age) 즈음이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pass in the blink of an eye)”고 되뇌게 된다. 그 이유는 나이가 들면서 신경망(網·neuron network)이 늘어나고 복잡해져(become more complex) 신경 처리(neural processing) 속도가 느려지기 때문이다. 그 결과(as a result), 시각 정보 처리가 늦어지면서 머릿속으로 기억되는 심상(心象·mental image)이 줄어들어 시간 감각이 달라진다고 한다. 시간 대비(對比) 삶의 기간 비율(time-to-life ratio)에 따른 현상이라는 설도 있다. 다섯 살 아이에게 1년은 살아온 전 생애(entire life)의 20%인데 비해, 50세 어른에겐 2%이기 때문에 훨씬 빨리 지나가는(go by much more quickly)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다섯 살짜리에겐 급속한 성장(rapid growth)·변화·배움·발달 등으로 꽉 차서 기나길지만, 50세에겐 48·49세 때와 달라진 게 별반 없으니 휙 지나가는(fly by) 것 같다는 얘기다. 시간 길이에 대한 지각은 경험을 하는 순간에 존재하느냐, 아니면 시간을 되돌아보고 있느냐(look backward on time)에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시간을 천천히 가게 하려면(in order to make time slow down) 지금 이 순간을 잘 챙겨야(be mindful of the present moment)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나 때는 말이야” 하면서 라떼 커피만 마시고 있으면 시간이 후루룩 더 빨리 흘러버린다고 한다. 세상을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살라고 한다. 삶의 경이로움에 주목하며(take note of life’s wonders) ‘지금’ ‘여기’에 몰두하다 보면 시간도 구경하느라 함께 머물러준다는 얘기다. ‘인생은 짧다’라는 말의 참뜻은 ‘그러니까 빨리 무언가를 하라’는 것이라고 한다. (조선일보 윤희영 글)
고대 그리스의 쾌락주의자인 에피쿠로스의 삶은 윤택하지 않았다. 그는 아테네 바깥의 정원을 하나 사서 진정한 즐거움을 좇는 자들을 불러들였다. 이곳에는 노예에서 거리의 여인들까지 온갖 사람이 섞여 있었다. 일종의 ‘히피 공동체’였던 셈이다. 진정한 즐거움을 찾기 위해 세상의 아웃사이더들이 ‘쾌락의 정원’에 모였다고 하니, 야릇한 상상을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에피쿠로스 공동체는 금욕주의자들 모임에 가까웠다. 그는 “하루에 음식을 장만하는 데 1므나(고대 귀금속 중량 단위)의 돈도 쓰지 않고 포도주 4분의 1리터만으로 만족하면서, 그나마 대부분은 물만 마시며” 지냈다. 지금으로 치자면 만원 정도로 하루를 꾸린 셈이다. 쾌락주의자인 에피쿠로스는 왜 그토록 검박하게 일상을 살았을까?
“욕구는 채울 수 있어도 탐욕은 만족시킬 방법이 없다.” 이 말은 에피쿠로스 공동체의 캐치프레이즈와도 같다. 우리는 배고플 때 먹고 졸릴 때 잔다. 이렇게 ‘욕구’를 채우며 고통을 잠재울 때 우리는 진짜 쾌락을 누린다. 그렇다면 더 맛있는 것을 먹고 싶고, 화려하고 좋은 곳에서 자고픈 바람은 어떨까? 이때부터의 즐거움은 되레 고통이 된다. 아무리 좋은 것을 먹고 누려도 그 이상을 바라게 되는 탓이다. 고삐 풀린 욕망은 금세 ‘탐욕’이 되어 버린다. 더 좋은 것을 가진 이들에 대한 질투와 시기, 비교에서 오는 열등감으로 마음은 편안할 날이 없다. 그래서 에피쿠로스는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함께 일상을 검소하게 꾸려나갔던 거다.
어느 시대에나 절제와 검약은 중요한 생활 덕목이었다. 아낄 줄 모르고 내키는 대로 사는 어린아이를 떠올려 보자. 아이가 과연 나중에 견실하게 인생을 살 수 있을까. ‘욕망 다스리기’가 전통적인 교육에서 빠지지 않았던 이유다. 하지만 지금은 절약보다 소비가 미덕이 된 듯하다. 시장은 탐욕을 채우는 삶이 멋지다며 우리를 부추긴다. 하지만 더 많이 누릴수록 가슴이 되레 헛헛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에피쿠로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볼 일이다.
우주의 한 끝에서 다른 끝까지는 빛의 속도로 달려도 930억 년이 걸린다고 한다. 이 공간을 채우는 별의 숫자는 6000해(垓) 개에 이른다. 해는 0이 20개가 있는 엄청난 숫자다. 우주 전체로 볼 때 지구는 모래 한 알보다도 작다. 그 위에 사는 우리는 티끌 위에 놓인 미미한 존재일 터다. 우주의 나이는 약 138억 년. 여기에 견주면 우리네 삶은 찰나보다도 짧다. 우주의 눈으로 볼 때 우리 눈앞의 고민은 아무 일도 아니다.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 말도 비슷한 위안을 준다.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아무리 견디기 힘든 일도 결국은 다 지나가게 되어 있으니 불안해할 필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주의 눈으로 우리의 삶을 바라보기가 쉽지 않다. 삶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경쟁 또한 날로 치열해지는 요즘이다. 일상은 언제나 근심과 한숨거리로 가득하다. 그렇다면 가슴이 먹먹하고 앞날이 막막할 때마다 하늘을 바라보며 ‘인생의 작전타임’을 가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옛 임금들의 바쁜 하루에는 ‘강제 작전타임’이 있었다. 성현의 말씀과 역사를 공부하는 경연(經筵)은 왕의 의무였다. 이는 군주가 역사의 관점에서, 현자의 눈으로 마음을 조율(tuning)하게끔 했다. “역사의 눈으로 보면 지금의 결정은 어떤 가치가 있을까?” “지혜로운 자들은 나의 고민에 뭐라고 충고할까?” 등을 곱씹을 때, 조급함은 스러지며 크고 넓은 생각이 열린다. 우리도 왕들처럼 때때로 우주의 관점에서, 역사의 눈으로 우리 삶을 찬찬히 짚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물론, 우주의 눈으로 바라본다고 해서 우리 삶이 귀중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생활의 긴장을 놓아버려야 한다는 말도 아니다. 삶은 짧을수록 더 소중하다. 하루살이에게 한나절은 인간의 하루보다 훨씬 절절하다. 작전타임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찾아드는 ‘지금, 이 순간’들을 소홀히 보내지 않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시야를 넓히면 어느덧 마음에는 의연하게 현실을 헤쳐갈 여유가 샘솟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