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하버드대학교 졸업 연설에서 “모든 사람이 목적을 가지게 만드는 것이 우리 사회의 과제”라고 했다. 그가 말하는 목적이란 “우리가 위대한 가치의 한 부분이며, 필요한 존재이며,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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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의 미국 퓨리서치센터 설문조사. 미국⋅영국⋅독일⋅일본⋅프랑스⋅스페인 등 전 세계 17국 1만7000명을 대상으로 ‘무엇이 삶을 의미 있게 하는가’를 물었는데, 건강이나 가족을 꼽은 다른 나라와 달리 대한민국은 유일하게 ‘물질적 풍요’를 1위로 선택했다는 뉴스 말이다. 돈을 최고로 여기는 국가라는 꼬리표가 민망했던지 자존심을 지키려는 반박들이 있었지만, 곧 흐지부지됐다. 유감스럽게도 이 유쾌하지 않은 가치관을 뒷받침하는 다른 조사와 통계가 잇따랐으니까.

전 세계 사회과학자들이 40년 넘게 계속하고 있는 ‘세계 가치관 조사’(World Values Survey)가 있다. 이 조사에 따르면, 인간은 경제력이 커질수록 생존 그 자체보다 자기표현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쪽으로 가치관이 변화하는데, 한국만은 예외였다. 1인당 국민소득 1800달러 시절이던 1981년이나 3만달러를 훌쩍 넘은 지금이나, 여전히 ‘생존’을 가장 중요하다고 응답하는 유일한 나라라는 것이다.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가 이 자료를 활용하여 전 세계 52국의 관용성 수준을 평가해 봤다. 나와 다르거나 나보다 못한 사람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의식을 자녀에게 가르치겠다는 응답이 한국은 꼴찌였다. 한국의 관용성(45.3%)이 경제력 꼴찌 국가였던 르완다(56.4%)보다 낮았던 것이다.


최근에는 이런 통계도 있다. 2021 교보문고 종합 베스트셀러 결산에서 경제·경영 분야가 처음으로 점유율 1위를 기록했다. 문학, 어린이·청소년책, 인문서도 모두 제쳤다. 1980년 교보문고 창업 이래 최초였다.

대한민국은 지금 욕망의 총량이 급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FOMO(Fear Of Missing Out)의 공포. 부동산, 주식, 코인으로 다들 돈을 버는데, 자산 상승에서 나만 소외된 게 아닐까. 행복을 위해서 돈이 중요하다는 현실을 부인하는 게 아니다. 문제는 균형이다.

스스로를 위해 종종 침대맡에서 들춰보는 시가 있다. ‘소비는 많아졌지만 더 가난해지고/ 더 많은 물건을 사지만 기쁨은 줄어들었다/ 전문가들은 늘어났지만 문제는 더 많아졌고/ 약은 많아졌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다/ 너무 분별없이 소비하고/ 너무 적게 웃고/ 너무 빨리 운전하고/ 너무 성급히 화를 낸다/ 가진 것은 몇 배가 되었지만 가치는 더 줄어들었다’(제프 딕슨 등 ‘우리 시대의 역설’ 중에서)

영끌로 갭투자하는 법은 자랑하지만 어떻게 가치 있게 살 것인지는 잊었고, 100세 시대라지만 삶의 의미를 찾는 법은 당황하기 일쑤다. 일론 머스크 덕분에 민간인들도 우주를 다녀오는 세상이지만, 정작 아파트 아래층에 누가 사는지는 모른다. 이익은 더 많이 추구하지만,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대답할 때 머뭇거리지 않는가.

아무리 급해도 내일로 갈 수 없고
아무리 미련이 남아도 어제로 돌아갈 수 없네
시간이 가고 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네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네

안상학 시 한구절 생각해본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몽테뉴은 살면서 늘 죽음에 관해 생각하라고 했다

그래서 몽테뉴는 평소 살아온 대로 은둔과 고립 속에서 침착하고 고요하고 외로운 죽음을 맞고자 작정한 후 20년간 머물던 탑 꼭대기에 서 미사곡을 들으며 최후를 맞이했다

586이라는 안티테제도 마찬가지다. 역사적 의의가 없지 않다. 우리 사회가 민주화의 형식을 갖추는 데 그들이 기여한 바를 부정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안티테제는 테제와 서로 모순을 드러내며 대립하다가 진테제에 자리를 내주는, 정반합 운동의 한 단계에 지나지 않는다. 얼마 전 세상을 뜬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처럼, 그 안티테제인 586 세대 역시,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할 때 아닐까.

다스 베이더는 어둠의 끝에서 선한 마음을 되찾는다. 아들인 루크를 지켜내고, 황제를 스스로 처리한 후, 존엄한 죽음을 맞이한다. 영화 역사상 가장 사랑받는 안티히어로의 슬프고 아름다운 결말이다. 대한민국의 안티테제 세대, 586의 변증법적 퇴장을 기대한다.







I like it now, too.

“당신을 위로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위로하는 좋은 말들처럼 평탄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의 인생 역시 어려움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당신의 인생보다 훨씬 더 뒤처져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좋은 말들을 찾아낼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중

캐스퍼 프리드리히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1818). /함부르크미술관

나는 누구에게도 삶은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삶이 누구에게나 같은 정도로 힘들 리는 없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삶은 쉽지 않다. 내가 듣고 보고 경험한 모든 인생이 그랬다. 아침에 울면서 깨어났다. 세수하다 거울 속에서 늙어버린 자신을 보았다. 죽을 때까지 방안의 먼지를 치워야만 했다. 돈을 벌러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아이는 조산원에서 태어났다. 누군가를 미워하는데 미워하지 않으려고 애써야 했다. 자기가 될 수 없는 것이 되어야만 했다. 놀이터에서는 아이와 어른이 함께 울고 있었다. 소음에 시달리면서도 정적을 견디지 못했다.

사상가 폴 비릴리오는 비행기의 발명은 추락의 발명이며 선박의 발명은 난파의 발명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인생의 발명은 고단함의 발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비행기나 선박의 운행에서 사고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불가능하듯, 삶의 운행에서 고단함의 제거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삶이 고단하다는 것은 상당 부분 동어반복이다. 산다는 것은 고단함을 집요하게 견디는 일이다.

삶이 그토록 고단한 것이니, 사람에 대한 예의는 타인의 삶이 쉬울 거라고 함부로 예단하지 않는 데 있다. 오스트리아의 문학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을 위로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위로하는 좋은 말들처럼 평탄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그의 인생 역시 어려움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당신의 인생보다 훨씬 더 뒤처져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좋은 말들을 찾아낼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 누군가 고단한 당신을 위로하고자 나직하게 노래한다고 해서 그의 인생이 노랫말처럼 곱게 흘러갔다는 뜻은 아니다. 그 역시 쉽지 않은 삶을 살았기에 그 노랫말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삶이 쉽지 않은 것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게 인생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작가 기리노 나쓰오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보다 좋은 내일, 내일보다 좋은 모레, 매일매일 행복한 나. 제멋대로 미래를 꿈꾸는 것도 미망에 홀리는 것이다. 이것이 정도를 넘으면 죄를 짓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꿈이 결락되어 있는 인간은 무력한 사람이 된다. 인생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삶을 사랑한 나머지 지나치게 행복을 꿈꾸어도 죄를 짓게 되고, 아예 꿈을 꾸지 않아도 무력해진다. 자기 아닌 것을 너무 갈망하다 보면 자기가 소진되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면 자신이 왜소해진다. 그래서 인간은 가끔은 탁월한 무언가가 되고 싶기도 하다가 또 어떨 땐 정녕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기도 하다.


삶이 쉽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타인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게 인생이라는 데 있다. 타인과 함께하지 않고는 의식주 어느 것도 제대로 해결할 수 없다. 이 사회에서 책임 있는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가능한 한 무임승차자가 되지 않으면서 자신의 생존을 도모해낸다는 뜻이다. 인간은 타인과 함께 하지 않고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는 존재, 혹은 타인과 더불어 살 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는 존재이다. 즉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그러나 타인과 함께 하는 일이 어디 쉬운가. 에세이스트 스가 아스코는 “우리는 혼자 있을 수 없었기에 벌을 받는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실로 정치의 세계는 권력의 희비극으로 얼룩진다. “재주 있는 사람은 부림을 당하고, 미련한 사람은 욕을 당하며, 강직한 사람은 월형을 당하고, 성인은 해침을 당한다(巧者役, 愚者辱, 直者刖, 聖者削·홍양호의 ‘형해(形骸)’ 중)”. 그래서 사람들은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아서, 혹은 무엇인가 되어 보려다 죄를 짓고 싶지 않아서, 어디론가 은거한다. 마치 “바다에 들어가는 진흙소(泥牛入海)”처럼 사라지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따금 기적이 일어난다. 삶의 고단함과 허망함을 자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정치의 잔혹함과 비루함을 통절히 깨닫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에 참여하려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마치 결별을 선언해야 마땅한 상대와 재결합을 시도하는 사람들처럼 무모해 보인다. 그러나 정치적 동물로서 인간의 영광은 바로 끝내 이 세계에서 살아가고자 결심한 그들의 마음에 있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예술비평가 스탠리 카벨은 별생각 없이 그냥 결혼해서 무난한 듯 사는 일보다 (적절한 이유가 있다면) 이혼의 위기를 극복하고 헤어졌던 상대와 다시 재혼하는 일이야말로 의미심장한 결합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 결합은 별 고민 없이 진행된 첫 번째 결혼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들은 이미 상대의 한계와 결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결합하기로 감히 결심한 것이다. 상대에 대한 오해나 불신을 극복하고 마침내 화해에 이른 것이다. 불행한 기억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함께 살아가기로 약속한 것이다.

나는 삶이나 정치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혼한 배우자와 다시 결합하기로 결심하는 것처럼, 어떤 사람은 인생이 고단하고 허망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살아내기로 결심한다. 어떤 사람은 정치의 세계가 협잡과 음모로 얼룩져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은거의 유혹을 떨치고 정치의 세계로 나아간다. 그들의 인생이나 정치는 그러한 자각이 없는 인생이나 정치와는 다를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냥 사는 인생이나 마냥 권력을 쥐려는 정치가 아니라 반성된 삶과 숙고된 정치이다.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의 문제이며, 정치는 그에 대한 응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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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미제라블’의 작가 빅토르 위고는 글을 쓰기 전 반드시 냉욕과 면도를 했다고 합니다. 봄의 제전’ ‘불새’ 등을 작곡한 발레곡의 거장 이고리 스트라빈스키는 곡이 잘 써지지 않으면 물구나무서기를 했다고 합니다. 거꾸로 서면 뇌가 맑아졌기 때문이라네요. 또 있습니다.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아침 9시부터 1시간 일간신문을 정독한 뒤에야 연구실로 들어갔다고 하고요.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새벽 4시에 일어나 내리 6시간 글을 쓴 뒤 오후에는 달리기를 꼭 했다고 합니다. 모두 똑같이 24시간을 사는데 왜 어떤 이들은 더 많은 걸 이룰까 궁금했던 무명 작가가 인류의 위대한 창조자로 꼽히는 사람들의 일상과 의식을 조사해 엮은 ‘리추얼(Daily Rituals)’이란 책에 소개된 내용들입니다.



코로나가 온 세상을 덮은 뒤로는 리추얼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 지난해 타계한 영화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을 들으며 하루를 시작하는 겁니다. 특히 영화 ‘미션’의 주제곡 ‘가브리엘의 오보에’는 신의 손길이 어루만지는 듯 불안한 마음을 가다듬기 딱 좋은 곡이지요.

영화 ‘시네마 천국’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주제곡 등 모리코네의 애수어린 선율이 우리의 영혼을 울리는 건 이탈리아인이었던 그가 10대 때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전쟁의 참상, 극심한 굶주림을 겪었기 때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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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신성한’ 가족
선우정 논설위원

조국 전 장관 모친이 “아드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모습에 괴로워하시던 성모님의 마음을 2년 넘게 체험하고 있다”는 편지를 어느 사제에게 보냈다. 자신의 처지를 성모 마리아에, 아들을 예수에 비유했다. 조 전 장관은 “목이 멘다”고 답했다. 잘못한 일이 많으면 억울한 점이 있더라도 보통 사람은 조용히 있다. 그런데 이 ‘성모와 예수’ 글은 소셜미디어에 올라왔다. 다른 사람들 보라는 것이다. 그러자 “신성(神聖) 가족”이라는 말이 나왔다.


▶'신성’은 세상의 비속한 존재와 구별되는 고결함을 뜻한다. 신성을 비판하면 비판하는 쪽이 벌을 받는다. 21세기에 북한 말고 이런 존재가 있을 리 없다. 그런데 한국 사회엔 조씨 일가를 신성으로 받드는 사람들이 있다. 25만명이 조씨 딸 의전원 입학 취소 반대 청원에 동의했다.

▶여권이 강행하는 언론징벌법을 “이상직법”이라고 한다. 감옥 가기 직전 이상직 의원이 자신에 대한 비리 보도를 막으려고 이 법을 밀어붙였다. 그런데 거슬러 올라가면 조국과 연결된다. 온갖 비리가 드러나 조씨가 장관 사퇴를 선언한 날, 문재인 대통령은 “언론은 스스로 깊이 성찰해야 한다”고 했다. 이 말을 받아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왜곡 기사를 쓰면 징벌적 배상으로 완전히 패가망신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조씨 일가에 대해 함부로 보도하면 벌하겠다는 것이다. 언론징벌법은 이렇게 태동했다.









강성국 법무차관이 27일 충북 진천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에서 아프가니스탄 특별 입국자 390명에 대한 국내 정착 지원 방안을 브리핑했다. 브리핑은 야외에서 진행했는데 비가 시간당 10mm 안팎 내리고 있었다. 강 차관 뒤에서 법무차관실 보좌진 한 명이 아스팔트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우산을 든 손을 머리 위로 뻗었다. 차관이 비를 맞지 않도록 우산으로 막아준 것이다. 이 직원은 브리핑이 진행되는 동안 그 자세로 우산을 받쳤다고 한다.

이 장면이 전해지자 “생중계하는 행사장에서 이렇다면 평소엔 얼마나 심하겠느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조선 시대도 아니고 뭐 하는 짓이냐” “무릎을 꿇게 할 필요가 있느냐” “차관이 상전이냐” “옆에 서서 우산을 들어주면 권위가 떨어지나” “저 사람 가족이 보면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등의 반응도 나왔다. “저래 놓고 무슨 인권 타령이냐”고도 했다. 부장판사 출신인 강 차관은 ‘택시 기사 폭행 사건’으로 임명 5개월 만에 사퇴한 이용구 전 법무차관 후임이다. 그렇다면 몸가짐을 각별히 조심해야 하지 않나. 부하 직원이 뒤에서 무릎 꿇고 우산을 드는 그 상황에서 정말 아무런 문제도 느끼지 못했나.

법무부는 “방송 카메라에 안 보이게 우산을 든 것”이라며 “지시나 지침에 따른 게 전혀 아니다”라고 했다.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직원이 차관 옆에 서서 우산을 받쳐주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나. 그것이 불경인가. 이 행사는 한국 정부가 세계 인권에 큰 관심을 갖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묵는 충북 진천까지 가서 행사를 열었다. 박범계 법무장관은 “이로써 우리는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보편적 가치 옹호를 위해 팔을 걷어붙이는 국제 대열의 한 축이 되었다”고 했다. 그런 사람들 뒤에서 한 직원은 무릎을 꿇고 우산을 들었다. 21세기 한국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느냐는 개탄이 나온다.




‘우리 살아가는 길 중간에 나는 어두운 숲 속에 서 있었네. 곧은길이 사라져 버렸기에.’




“혼자만 행복하다는 건 부끄러운 일”

“저의 일생은 행복했습니다. 그렇게 위대한 친구를 가질 수 있었으니까요. 건축이나 예술은 몰라요. 다만 그렇게 자신에게 엄격하고 생활에 성실하고 매사에 품위를 지키면서 산 사람을 알았다는 것은 제 생애의 자랑입니다.” 겉으로 위대하다고 추앙받는 사람은 세상에 많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존경받는 사람이 진짜 위대한 인간이 아닐까?

가정부 우르슈카 루자르는 아는 사람의 소개로 자신이 입주할 새로운 집을 찾고 있었다. 약속대로 국립건축학교 앞에 서 있는데, 잠시 뒤에 학교에서 머리를 뒤로 빗어 넘기고 나비넥타이를 맨 초로(初老)의 교수가 나왔다. 무서운 인상에서 어렵고 깐깐한 성격이 드러났다. 그는 어디 앉자는 말도 없이 길에 서서 우르슈카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그렇게 우르슈카가 일하게 된 플레치니크의 집은 그가 직접 설계한 단순한 2층집이었지만 넓은 정원과 커다란 온실이 있었다. 독신으로 혼자 사는 주인은 학교나 현장에 가기 위해 외출할 때 외에는 종일 2층 작업실에서 일을 했다. 시간을 아끼기 위해 대부분의 식사도 작업실에서 했으며, 심지어 잠도 작업실에서 잤다. 하지만 많은 예술가, 동료, 조수, 제자들이 수시로 집을 방문했고, 그는 그들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토론하고 도면을 그렸다.

시작보다 지속하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상황을 전환하는 정신적 습관이 있다.

‘지겨움’을 ‘편안함’으로, ‘반복’을 ‘익숙함’으로 바꿔 부르는 것이다.

가령 외국어를 잘하기 위한 핵심은 반복이다.

운동 역시 그렇다. 이런 반복은 고통과 지겨움을 유발한다. 하지만 임계점을 넘으며 그것은 익숙함으로 변환된다.

반복하는 것에는 리듬이 생긴다.

 

보상 없이도 작동한다면, 그것이 습관이다. 웬디 우드 박사는 저서 ‘해빗’에서 나이키의 ‘just do it(일단 시작해라)’이 정신력에 대한 과대평가이자 자본주의의 달콤한 거짓말이라고 말한다. 시작은 결코 반이 아니라는 말이다. 결심 자체를 큰 성공으로 여기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힘을 우리가 간과해선 안 되는 이유다.

러시아의 문호(文豪·literary lion)이자 사상가인 레프 톨스토이의 글에 나오는 내용이라는데, 어느 작품 어디에 어떻게 나온 것인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3평(坪)’이라는 지극히 한국적 개념의 땅 넓이를 톨스토이 작품에서 어떻게 정확히 계산해냈는지도(work it out) 모르겠다.

“어느 농부가 평생토록 주인집에서 머슴살이를 했다(work as a farmhand all his life). 어느 날 주인이 독립시켜 주기로 하고 그를 불러 말했다 “내일 해가 뜨는 순간부터(as soon as the sun rises) 해가 질 때까지(until the sun sets) 네가 밟고 돌아오는 땅은 모두 너에게 주겠다.’

평생을 머슴으로 살아온 그는 새벽을 기다리느라(wait for dawn) 한숨도 자지 못했다(do not sleep a wink). 날이 밝자마자 달리기 시작했다(start to run). 잠시도 쉬지 않고 뛰고 또 뛰었다 . 한 뙈기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in order to take possession of even one more strip of land) 끼니도 걸러가며 미친 듯이 뛰어다(run around like a chicken with its head cut off).

가슴에 맺힌 한을 풀기 위해(in a bid to resolve his deep sorrow) 그 보상을 받겠노라고 뛰고 또 뛰었다 . 뛰는 만큼 모두 자기 것이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다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be ready to sink) 무렵, 주인집 대문으로 뛰어들었다 기진맥진해(be utterly exhausted) 쓰러졌다 그리고 끝내 의식을 되찾지(regain his consciousness) 못한 채 심장마비로 죽고(die of a heart attack) 말았다
그가 마지막까지 얻어낸 땅은 고작 ‘3평’이었다 자신이 묻히게(be buried) 된 무덤의 땅 한 쪼가리가 평생 머슴살이를 하며 뛰고 또 뛰어 자기 것으로 만든 이 세상 땅의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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