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천운명의 참뜻을 체감한 것은 지난 한 주 사이였고, 그만큼 지식으로만 세상과 사람을 계산하는 바보였다.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았건만, 알고 보니 그랬다. 세상과 사람들은 모순된 인연 속에서 마구 뒤엉켜 굴러간다. 큰 운명들은 작은 운명들을 마구 짓밟는다. 어쩌면 ‘역사’는 인간이 책에 정리하고 도표를 만들어서 그렇지 원래 카오스(chaos)일 것이다. 거대한 원의 한 점 위에 서 있는 개인은 자신이 직선 위에 서 있다고 착각하기 마련이다.
인생과 세상을 너무 진지하게만 여겼다는 반성이 든다. 세상은 어처구니가 없고 인간은 더 뒤죽박죽이다. 아니라고 우긴다면, 그건 아직 덜 깨어 있거나 사는 게 재밌어서 착각하고 있는 오만일 뿐이다.
인간은 산천운명 같은 부조리의 홍수 위에 떠 있는 작은 배다. 그 작은 배들이 세상에 모여 아귀, 아수라 지옥이다. ‘어처구니없음과 뒤죽박죽’을 이해하려 하지 말자. 이런 때일수록 고요하게, 자신만의 원칙에서 강건하게 서 있자
번개로 부러진 거목은 숲지기에게 불운이지만 좋은 목재를 찾아 나선 목수에게는 행운이다. 결혼 생활 역시 지겨움으로 보면 고통이지만 익숙함으로 보면 안락함이다. 많은 일에는 관점과 해석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제논이 “배는 난파했지만 항해는 성공적이었다”고 말한 힘이었다. 모든 것에 끝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까. 승진에서 밀리고 주식이 폭락할 때마다, 가족이 불치병에 걸리는 것보다 나쁠 게 없다는 생각으로 평정심을 찾는다고 말한 사람이 있다. 그에게 스토아 철학은 불안 해독제인 셈이다. 말기 암 선고 후, 비로소 세상의 아름다움이 보였다는 환자처럼 보이지 않던 게 보이고, 들리지 않던 게 들릴 때, 우리는 세상 많은 것에 감사할 수 있다. 메멘토 모리. 삶을 알기 위해 아침마다 죽음을 묵상한 지혜로운 중세의 성직자들처럼.
무엇을 얼마나 오래 하느냐보다 중요한 건 ‘자주’ 하느냐이다. 반복이 곧 습관이기 때문이다. 천성은 바꿀 수 없다. 하지만 습관은 바꿀 수 있다. 스토아적 사고 역시 마음의 습관이다. 좋은 습관이 결국 좋은 삶이다. 폭우가 친다고, 먹구름이 꼈다고, 천둥과 번개를 지목하며 나쁜 것을 제거하려 드는 하늘은 없다. 하늘은 그저 하늘일 뿐, 날씨의 좋고 나쁨은 없다. 할 수 없는 것을 내려놓고,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할 때, 마음은 날씨를 탓하지 않는 하늘의 평정심을 닮는다. 세네카의 말처럼 중요한 건 목적지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