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기자의 사진이야기
'빵수녀' 수비아꼬 수도원 기행 온라인 사진전
사람이 땅을 만드는가,
땅이 사람을 만드는가?
이 질문을 나는 수비아꼬(Subiaco)에서 다시 떠올렸다.
수비아꼬는 로마에서 북동쪽으로 한 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산들이 파도처럼 겹을 이루고, 그 한가운데로 작은 강 하나가 흐르는 아름다운 풍광은 일찍이 네로 황제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의 별장이 지어진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산언덕을 따라 자리 잡은 소박한 이 중세 마을이 사랑받는 더 큰 이유는 가톨릭 교회 수도자들의 대부이자 유럽의 수호성인으로 존경받는 베네딕도 성인 때문일 것이다. 베네딕도는 수비아꼬에 12개의 수도원을 지었고 지금도 수도원에서 퍼져 나오는 종소리가 시간을 알린다.
서기 480년, 이탈리아의 노르치아(Norcia)에서 태어난 베네딕도는 어린 나이에 학업을 위해 로마로 유학을 떠나지만 세속에서 누릴 수 있는 공부, 부모, 유산과 모든 안위를 뒤로 한 채 하느님을 찾는 여정에 들어선다.
수비아꼬의 산 사이에 자리 잡은 아니에네(Aniene) 계곡을 찾아가던 길에서 그는 로마노(Romanus)라는 수도승을 만난다. 베네딕도는 공동체나 은수자 속에 머물기보다 철저히 홀로 하느님을 만나기를 원했다. 로마노는 베네딕도가 머무를 수 있는 동굴로 그를 인도했고 베네딕도는 3년간 이 동굴에서 기도와 관상에 전념하는 철저한 은수자의 삶을 산다. 이 동굴은 오늘날까지 “Sacro Speco” 즉 ‘거룩한 동굴’로 알려져 있는데, 가파른 절벽 아래에 위치한 이 동굴을 따라 베네딕도 수도원이 지어져 있다.
로마노는 자기 수도원에서 자신의 몫으로 나온 빵을 남겨서 정기적으로 베네딕도에게 가져다 주곤 했는데, 언제나 산 위에서 줄 끝에 바구니를 달아 빵과 물을 절벽 아래로 내려 보냈다. 로마노가 빵을 내려보낸 그 산꼭대기에 지어진 작은 수도원(산 비아지오 San Biagio)에 살레시오 수녀회가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다양한 국적의 7명의 수녀들은 세상 안에서 얻지 못하는 평화를 찾아 수비아꼬를 찾아 오거나, 베네딕도 성인의 생애를 따라 순례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쉴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제공한다.(성인의 탄생지인 노르치아에서부터 수비아꼬를 거쳐 그가 대수도원을 지은 몬테카시노까지 17개 마을에 걸쳐 도보순례길이 마련되어 있다)
대영성가이자 작가인 마리아 피아(Maria Pia 이탈리아) 수녀는 94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맑은 영혼으로 대자연의 신비를 관상하며 여전히 글을 쓰고, 그녀를 만나 위안을 얻기 위해 산을 오르는 이들의 영혼을 치유한다. 안나(Anna 벨기에) 수녀는 고요한 공방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담은 이콘화를 제작한다. 페루와 콩고, 이탈리아 출신의 수녀들이 자연이 마련해 주는 과실들을 소중히 가꾸며 순례자들과 기도를 갈망하는 이들의 영혼을 동반한다. 침묵 속에서 거룩한 일상을 살아가는 건 사람만이 아니다. 산 비아지오의 ‘거룩한 개’ 지비(Gibi)는 기도 시간이면 어김없이 성당에 와 당당히 제자리를 잡는다. 뿐만 아니라 성가가 시작되면 어김없이 노래를 따라 부른다. 그 소리가 어찌나 우렁찬지!
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오솔길을 걸어 내려오면 아름다운 또 하나의 산타 스콜라스티카 수도원에 이른다. 스콜라스티카 성인은 베네딕도의 쌍둥이 여동생이다. 오빠와 같은 영적 여정에 들어서서 함께 수도자가 되고 성인이 되었다.
산타 스콜라스티카 수도원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베네딕도회 수도원답게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소중한 유물과 신앙의 흔적들로 가득하다.
특히 르네상스 회랑과 독특한 고딕양식의 회랑,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도서관 중 하나로 손꼽히는 도서관과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아름다운 종탑(9세기~11세기 건축) 등을 볼 수 있다. 러시아의 에르미타쥬 박물관을 지은 자코모(Giacomo Quarenghi)가 설계한 신고전주의 성당은 현대 성당 건축의 시초가 되었으며, 네로의 별장에서 옮겨온 거대한 대리석 기둥들이 성전을 받치고 있다.
수비아꼬의 수도원에서는 하느님을 관상했던 성인의 삶을 따르는 제자들이 지금도 고운 소리로 찬미와 감사와 탄원의 기도를 바쳐 올린다.
수도승들의 오래고도 간절한 기도가 배어서일까.
수도원을 가득 메운 프레스코 벽화들은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생생하고 신비로운 빛깔로 신앙과 진리를 증언하고, 수도원의 맑은 종소리를 따라 소탈한 사람들이 평화로운 일상을 이어가는 곳 수비아꼬.
과연 산과 강에서 부는 평온한 바람과 맑은 기운이 성인을 만든 것일까,
아니면, 성인의 숭고한 삶으로 인해 그 거룩함이 지금까지도 이 땅에 머무는 것일까?
글 사진 박현주(세실리아) 살레시오수녀회 로마 본부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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