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물장어의 꿈’

<‘민물장어의 꿈’ 가사 전문>

좁고 좁은 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나를 깎고 잘라서 스스로 작아지는 것뿐

이젠 버릴 것조차 거의 남은 게 없는데

문득 거울을 보니 자존심 하나가 남았네

두고온 고향

보고픈 얼굴

따뜻한 저녁과 웃음소리

고갤 흔들어 지워버리며 소리를 듣네

나를 부르는 쉬지 말고 가라하는

저 강물이 모여드는 곳

성난 파도 아래 깊이

한 번만이라도 이를수 있다면

나 언젠가

심장이 터질 때까지

흐느껴울고 웃다가 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 없이

익숙해 가는 거친 잠자리도

또 다른 안식을 빚어 그 마저 두려울 뿐인데

부끄러운 게으름

자잘한 욕심들아

얼마나 나일 먹어야 마음의 안식을 얻을까

하루 또 하루

무거워지는

고독의 무게를 참는 것은

그보다 힘든

그보다 슬픈

의미도 없이 잊혀지긴 싫은

두려움 때문이지만

저 강들이 모여드는곳

성난 파도 아래 깊이

한 번만이라도 이를수 있다면

나 언젠가

심장이 터질 때까지

흐느껴울고 웃으며 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 없이

아무도 내게 말해 주지 않는

정말로 내가 누군지 알기 위해

내일 있을 조선일보 주최 춘천 마라톤에 가긴위한 준비로 점심겸 저녁을 하면서 덕담까지......

나의 의도와 다르게 건강을 위해 최선의 노력에 임하는 자세라는 과찬까지  듣기민망한 말을 삼키면서

26일 새벽 3시에 눈을 떴다.

대부분은 새벽 3시20분에 기상하는 일상때문에 힘들지는 않았다.

완주를 목표에 두지만 작년보다 10분이라도 완주시간을 당기고 싶지만 과욕이다. 고 생각을 고치자는 마음을 먹지만 좀 그렇다.

 

작년 서울 동아마라톤때 시간 좀 줄여볼 욕심으로 20키로까지 평균 페이스 망각하고 달리다가 중도에 포기할뻔 한 일을 잊지말아야 한다.

 

새벽4시에 된장국에 밥을 말아 가볍게 먹으면서 참 별짓 다한다는 생각에 혼 자 ㅎ ㅎ ㅎ

책자에 의하면 400칼로리에서 600칼로리정도면 충분하다고 기재 된걸 기억하면서 액체(파워  칼로리)식품을 두개 준비도 했다.

 

2번 풀코스 마라톤을 뛰어보니 소소한것들이 필요했다.

파스,음료,간식,테이핑,,,,,,

용산역에서 입석으로 출발

참 많은 사람들이 입석으로 6시 출발 춘천행 열차로 1시간 15분 정도

7시15분 춘천역하차 몸도 풀겸 1.5km 도보로  집합소에 도착

 

 

 

 

 

 

 

 

 

25km부터는 포기하는 사람들이,또한 다리에 허리에 온 몸 자체가 반란 그 자체이면서 구급차소리에 자신도 유혹을 받는다.

30km부터는 시간을 단출시키자는 유혹은 이미 망각 정해진 시간대에 온전히 완주라도 하면서

자신을 위한 합리화로 머리를 돌린다.

"원래, 아마츄어 마라톤은 완주에 있다." 라는 사회자 발언부터 천천히라도 낙오없이 가자고 또한 격려해 준 가족들의 얼굴과 완주의 기쁨을 상상하면서 겨우 겨우 한걸음씩 마지막 힘을 동원해 2014 가을의 전설 춘천마라톤을 끝났다.

 

작년에는 주최측에서 준비한 단체버스을 이용했다.

서울 도착시간이 5시간 이상

춘천에 전국차는 집합된것 같았다

 

이번에는 차편을 전철선택했다.

춘천역에서 상봉역까지 1시간 30분 종착역이라 맨먼저 줄을 서 착석에 성공

시내 지하철도 종점에 가까워 빈자리가 많았다.

계산된 교통편이었다.

3시간을 힘든속에 힘듬을 뿌듯하게 생각하면서 집에 도착했다.

극기를 즐기는 기쁨 또한 위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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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심양합 (三心兩合)

변방 관리의 딸 여희(麗姬)가 진(晉)나라로 시집가게 되자 슬피 울어 눈이 퉁퉁 부었다. 막상 궁궐로 들어가 왕과 한 침대를 쓰고 맛난 고기로 매 끼니를 먹게 되니 시집올 때 엉엉 울던 일을 근세 중국의 기재(奇才) 서석린(徐錫麟·1873~1907)은 독서에서 삼심양합(三心兩合)의 태도를 중시했다.

먼저 삼심은 독서할 때 지녀야 할 세 가지 마음가짐이다.

전심(專心)과 세심(細心), 항심(恒心)을 꼽았다. 전심은 모든 잡념을 배제하고 마음을 오롯이 모아 책에 몰두하는 것이다.

 

 세심은 말 그대로 꼼꼼히 놓치지 않고 세밀하게 훑는 자세다.

그는 책을 읽다가 중요한 대목이나 좋은 구절과 만나면 표시해두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부친에게 나아가 물어 완전히 안 뒤에야 그만두었다.

 항심은 기복 없는 꾸준한 마음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매일 밥을 먹어야 하고 날마다 책을 읽어야 한다. 하루만 굶으면 배가 고프고 하루만 안 읽으면 머리가 고프다.

" 안중근 의사가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고 한 뜻과 같다.

양합(兩合)은 두 가지 결합과 연계를 말한다.

첫째는 독서와 수신양덕(修身養德)의 결합을 강조했다.

 그는 책상 위에 직접 제갈공명의 '계자서(誡子書)' 중 다음 대목을 써놓았다.

 "군자의 배움은 고요함으로 몸을 닦고 검소함으로 덕을 길러야 한다.

담박함이 아니고는 뜻을 밝게 할 수가 없고, 고요함이 아니고는 먼 데까지 다다를 수가 없다(夫君子之學 靜以修身 儉以養德 非澹泊無以明志, 非寧靜無以致遠).

" 고요함과 검소함으로 자신의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향상시킬 때 독서의 진정한 보람이 있다.

 내면의 성찰 없는 독서는 교만과 독선을 낳기 쉽다.

 머리와 가슴이 따로 놀면 못쓴다.

 

둘째로 그는 독서와 신체 단련의 결합을 중시했다.

공부로 잔뜩 긴장한 머리는 산책과 체조 등의 활동으로 한번씩 풀어주어 독서에 리듬과 탄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 욱여넣기만 하면 효율도 떨어지고 무엇보다 오래 지속할 수가 없다.

그저 읽고 벌로 읽으면 안 읽느니만 못하다.

 성호(星湖) 선생 식으로 말하면, 흑백을 말하면서 희고 검은 것은 모르고 말을 하지만 귀로 들어갔다가 입으로 나오는 데 지나지 않아 실컷 먹고 토하는 것과 같게 된다. 건강을 해치고 뜻마저 사납게 된다.

 

나도 옳고 너도 옳다고 한 원효… 皆是皆非(개시개비· 모든 주장이 다 옳고 또 다 그르다)

 

사진(원효대사의 초상화)

 

[지식 콘서트] 나도 옳고 너도 옳다고 한 원효… 皆是皆非(개시개비· 모든 주장이 다 옳고 또 다 그르다)

 

조성택 고려대 교수의 '경계와 차이를 넘어' (上)

 

스코틀랜드 분리 찬반 투표후

"서로 다른 의견 있었지만 모두 스코틀랜드 사랑한 사람" 英 여왕의 발언 인상적

 

원효의 화쟁론

부처님 말 아닌게 없으니 모든 경전이 최고이고 부처님 얘기 다 못담기에 다 옳은 경전도 없어

 

 

이번 전체 강연 주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그럼 '어떻게'란 뭘까. 사실 굉장히 난감한 질문이다. 무엇을, 언제, 어디서라는 질문은 선택지가 주어진 것이다. 점심때 뭘 먹을까. 짜장면, 짬뽕, 볶음밥…. 이런 식으로 고를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는 다르다.

 

지난 세월 식민지 해방에서 근대 산업화에 민주화,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에게 '어떻게'라는 질문은 잊혀 왔다.

 

그런데 IMF 경제 위기를 겪고 뭔가 다른 게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문제의식이 생겼다. 그러다 지난 4월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어떤 합의가 우리 사회에서 이뤄졌다.

 

황지우 시인의 '마음의 지도 속 별자리'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지금 나에게는 칼도 經도 없다/ 經이 길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길은/ 가면 뒤에 있다'. 길이라면 앞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인생에서는 다르다. 그동안 걸어온 길은 보이나, 앞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마치 사막에서처럼.

 

소크라테스는 훌륭하게 살라고 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훌륭하게 사는 것인가. 고전적 가치로 절제, 겸양, 배려, 관용이 거론된다.

지금 이 시대에 가장 절실한 건 함께 사는 지혜다.

함께 산다는 건 나와 다른 사람과 산다는 걸 전제로 하고 있다.

얼굴색, 키, 성격, 입맛, 이념이 다른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는 차이와 경계를 나와 남을 가르는 기준으로 삼아왔다.

 

자연도 그렇고, 인간 세계도 진선미란 서로 다른 것들이 어울리면서 이뤄지는 것이다.

모두 똑같은 풍경을 두고 아름답다고 하지 않는다. 산과 물은 다르지만 함께 있어 아름답다.

단풍도 빨간색과 노란색이 다투지 않고 함께 어울려 장관을 이룬다.

 

이제 우리는 다양한 사람, 심지어 다양한 인종이 함께 사회를 이뤄가는 길목에 서 있다.

이 다른 것들이 어떻게 함께 어울릴 수 있는가 하는 난제를 극복하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못 나간다.

 

대립으로 얼룩진 광화문광장, 해군 기지 분쟁이 이어지는 제주 강정마을, 송전탑 갈등이 일상인 밀양, 용산 참사, 진도 세월호 사태까지 전국 지명(地名)이 다 갈등을 상징한다.

 

명절 때 가족이 모이면 가급적 정치 얘기 안 하려 한다. 자꾸 싸우기 때문이다.

아시안게임에서 손연재가 금메달을 따자 김연아 팬들이 안티로 나섰다.

김연아를 좋아한다고 손연재를 미워할 이유가 있나.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고려대 대강당을 리노베이션한다니까 문과대 학생회가 "대강당 뺏어가는 놈은 귀싸대기 올려버린다"는 구호를 달더라. 전국 분쟁 현장마다 섬뜩한 구호가 일상화되고 있다.

 

세계 가치관 조사라는 자료를 보면 "자녀의 교육에 있어서 타인에 대한 관용과 존중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그렇다'는 답변이 56개국 중 우리가 최하위다.

나도 옳고 너도 옳다

 

그렇다면 하나의 옳음만 존재하는가.

하나만 옳으냐. 내가 옳으면 네가 그르고, 네가 옳으면 내가 그른가?

 

다른 종교나 가치관, 다른 판단은 인정하고 포용할 수 없는가?

세월호 특검법을 주장하면 법질서를 세울 수가 없고. 법질서를 강조하면 유족의 아픔은 달랠 수 없는가?

 

얼마 전 스코틀랜드 분리 국민투표가 끝나고 엘리자베스 여왕이 "스코틀랜드에 대해서 서로 다른 의견이 있었지만, 모두가 스코틀랜드를 사랑하는 사람이다"고 말했다.

 

정치적 수사이긴 했지만, 정치가 그 정도는 돼야 한다. 오바마가 대통령 선거 출마했을 때 "이라크 전쟁을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고 묻자 그는 "이라크전을 반대하는 사람도 찬성하는 사람도 다 미국을 사랑하는 사람이다"고 답했다. 더 짓궂게 "이라크와 전쟁했을 때 하나님이 미국 편이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까지 들어오자 그는 "질문이 잘못됐다.

하나님이 우리 편에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편에 있는지 물어야 한다"고 받아쳤다.

 

우리는 사회적 합의라고 하면 늘 투표, 혹은 다수결을 많이 생각한다.

민주주의 제도로서 투표나 다수결이 의미가 있는 것은 그 과정이 선하기 때문이다.

결과가 선하기 때문이 아니라 투표에 이르는 그 과정이 선하다.

민주주의는 시민의 지혜를 필요로 한다는 말이 있다. 지금 제도로서 민주주의는 투표에 의한 평화적 정권 교체, 그 이상은 아니다.

생활에서의 민주주의, 일상에서의 민주주의의 가치 실현에 대해서는 취약하다.

 

미국은 1955년 과학기술을 국가 경쟁력으로 확보하기 위해서 국가과학재단(NSF)을 만들었다.

뒤이어 1965년 국립인문진흥재단이란 단체를 만들기에 이른다. 다인종, 다문화가 섞여 있는 나라에서 어떻게 통합된 미국을 만들 것인지 고민 끝에 나온 산물이다.

 

그들은 국민을 통합하기 위해 인문학이 필요하다고 봤다. 민주주의는 시민의 지혜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만 갖고는 안 된다는 것이다. 1997년 창조적인 미국 건설을 위한 위원회가 결성되어 보고서를 냈는데 거기에는 "예술과 인문학이 명백한 공공재"라는 구절이 들어 있다.

 

1945년 해방될 때 우리는 1인당 국민소득이 860달러였다.

가나는 1190달러. 지금은 2만5000달러와 1800달러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 개발 독재, 국가 주도 발전 등등 많은 얘기가 나온다. 하지만 인문학적인 두께의 차이에 주목하고 싶다.

 

우리는 왕의 언행을 500년간 매일 기록한 왕조실록을 가지고 있는 나라다. 우리글도 있다.

 

화엄사상의 핵심은'개시개비(皆是皆非)'

 

지금부터 말하려는 화엄사상도 우리가 가진 찬란한 유산 중 하나다. 7~8세기 동아시아 사상 주류는 화엄사상이다.

이 사상을 한국적인 사유 속에서 녹여냈던 게 원효다.

 

원효의 화쟁론(和諍論)은 그런 맥락이다.

원효가 살았던 7세기 한국은 동아시아 전체로 보면 변방이다.

불교 사상 역시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파된 걸 수입한 것이다. 그래서 많은 스님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지금 한국 대학 실정과 흡사하다. 그런데 원효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학을 못 갔다. 유학 갔다 오면 배우는 게 뭔가. 전체를 배워오는 게 아니라 유학 간 학교 일부 학풍을 배워서 온다. 원효는 유학을 가지 않으면서 동아시아 변방에 앉아 중국에서 벌어지는 불교의 다양한 학설을 스스로 소화했다.

 

'화쟁'이란 말이 처음 등장한 건 '열반경종요'이다. '統衆典之部分/ 歸萬流之一味/ 開佛意之至公/ 和百家之異諍'. 부분적인 여러 경전을 통섭하여서 여러 갈래 흐름, 다양한 담론이나 이론을 한 맛으로 돌이키며 부처의 지극한 뜻, 올바른 뜻을 열어 여러 학파의 쟁론을 화통한다. 이게 화쟁의 핵심이다.

 

무슨 말이냐면 A란 경전, B란 경전, C란 경전 이 모든 게 부분적으로 옳다는 것이다.

어느 한 경전도 부처님 말이 아닌 게 없다. 그러나 어느 한 경전도 다 옳은 건 아니다. 왜? 부처님의 얘기를 다 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원효는 경전을 해석할 때마다 그 경전이 최고라고 칭송한다. 처음에 원효 경전을 보면 이상하다. 보는 것마다 최고라 한다. 그 이야기는 아무것도 최고가 아니라는 얘기다. 자기 생각이 없는 사람인가 여겼다가 다시 찬찬히 보면 '아, 그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모두가 최고라는 것이다. 어느 한 부분에 대한 해석으로선 최고라는 거다.

 

여러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고 있다. 코를 만진 어떤 이는 '길다'고 한다. 배를 만진 사람은 '벽과 같다'고 하고, 다리를 만진 이는 '기둥 같다'고 한다. 틀린 건가? 그렇지 않다. 맞다. 그래서 원효는 "모두 옳다(개시·皆是)"고 한다.

 

그런데 다들 맞는 얘길 하고 있긴 하지만 코끼리의 전모(全貌)는 모른다.

 

그래서 원효는 "모두 틀렸다(개비·皆非)"고도 한다.

원효는 우리 모두 이 장님들처럼 부분적 진리만을 알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개시개비(皆是皆非)'. 모든 주장이 다 옳다. 그러나 모든 주장은 다 틀리다. 내가 옳으면 네가 그르고, 네가 그르면 내가 옳다는 이분법적인 것이 아니라,

 

내가 옳으면 너도 옳고, 네가 그르면 나도 그르다는 생각을 가질 때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문제의식이다.

 

장님들이 와글와글 떠드는 과정이 논쟁이라면, 입을 닫고 귀를 여는 과정은 대화다.

 

 

조성택 고려대 교수의 '경계와 차이를 넘어'()

 

 

[지식 콘서트] 나를 비우고 경청하라論爭 대신 對話를 하면 갈등이 풀린다

 

 

경청은 곧 공감 - 나의 옳음과 너의 옳음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게 화쟁대화가 가능하다면 갈등은 문제가 아닌 기회

인문학의 역할 - 사회의 가장 아픈 곳이 인문학이 있을 자리지역·계층·좌우서로 다른 것을 이어줘야

 

 

대화란 얼마나 중요한가. 지난해 5월 영국 런던에서 휴가 나온 군인을 살해한 흑인 청년에게 다가가 자수를 설득한 주부 이야기를 다시 떠올려보자. 이 주부는 "무섭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범인이 흥분했지만 술이나 약물에 취해 있지 않아서 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섭지 않았다"고 답했다.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진다면 무서울 게 없다. 길에서 개나 호랑이를 만나면 무서울 수 있다. 술 취한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대화가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화가 된다면 우리는 상대방이 무섭지 않다. 원효의 화쟁(和諍)은 바로 대화의 철학이다.

 

 

 

논쟁은 내가 옳고 네가 그르다는 것을 입증하는 과정이다. 반면 대화는 저 사람의 옳음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저 사람 얘기에 공감하면서 저 사람 눈에 비친 나를 보는 것이다. 논쟁이 필요 없다는 게 아니라 문제 해결을 위해서라면 논쟁은 반드시 대화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의견이 다르더라도 주장만 하지 말고 대화하면서 상대 관점에서 자기를 성찰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을 놓고 환경이냐 안보냐 티격태격하는데 어느 한쪽을 무조건 희생해야 하는 건 아닐 것이다. 안보와 환경, 둘 다 중요한 가치다. 그런데 왜 양극단에서 양자택일 논쟁만 할까. 이 사회가 민주화 시대를 관통하면서 중요하게 여긴 가치 중 하나는 사회적 정의다. 그런데 정의란 정의 그 자체뿐 아니라 해결과 화해의 과정에서 의미가 커진다.

 

최근 국민대통합위원회 콘퍼런스에 갔는데 제주 4·3사건에 대한 발표 부분에서 보수 단체 인사들이 진행을 제지했다. 처음엔 언짢았는데 30분 정도 얘길 들었더니 경청할 내용이 있더라. 4·3사건 정의를 세우는 과정에서 또 다른 아픔을 유발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만델라가 진실화해위원회를 만든 것도 그런 취지다. 화해하기 전 진실 규명이 먼저라고 얘기하지만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누는 진실 규명이 아니라 화해가 전제된 진실이라면 좀 더 승화된 화해·진실이 가능하지 않을까.

 

 

 

 

앞서 얘기한 원효의 화쟁, 개시개비(皆是皆非)는 양비론이 아니다. 의견이 다르고 논쟁하더라도 상대를 미워하지는 말자. 내가 옳으면 네가 그르고, 네가 옳다고 인정하면 내가 틀린다고 생각하는 이분법을 지양하자. 각자 주장은 나름대로 옳음이 있다. '나의 옳음''너의 옳음'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게 화쟁이고, 민주 시민의 지혜다.

 

경청은 화쟁적 대화의 과정이다. 경청은 귀 기울여 듣는 것이다. 그냥 듣는 게 아니다.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좋은 음악을 들을 때 마음을 비우고 듣지 않으면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경청도 그렇다. 상대방 얘기의 약점을 찾기 위해 경청하는 건 의미가 없다. 경청은 자기를 비우고 상대방의 옳음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즉 공감하는 것이다.

 

요즘은 공감을 심리학에서 많이 쓰지만 원래는 시 창작 이론에서 나왔다. 꽃에 대한 시를 쓸 때 꽃을 바라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스스로 꽃이 되어볼 때 시가 나온다. 공감이란 '바라보기'에서 '되어보기'로 전환하는 과정이다.

 

이것만으로 물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출발점은 여기가 되어야 한다. 사회적 갈등과 분쟁을 중재하거나 해결하는 데 참여했던 사람들 얘길 들어보면 한결같이 경청하는 데서 합의의 실마리가 잡힌다고 한다.

 

미국 미주리주에서 낙태 문제를 놓고 대립이 벌어졌다. 낙태 시술 병원에 방화가 발생하는 등 격렬한 논란 끝에 낙태를 불법화했다. 그리고 낙태 반대론을 이끌었던 주민이 지역 신문에 기고해 "낙태를 하지 못해 태어난 한 부모 가정 아이들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자"고 제안했다. 다음엔 낙태 찬성론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함께 찾자고 요청했다. 낙태를 찬성하건 반대하건 둘 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는 열망은 비슷하다. 방법이 다를 뿐이었다.

 

경청과 공감이 사랑의 에너지

 

대화가 가능할 때 갈등과 분쟁은 문제 상황이 아니다. 사실 갈등과 분쟁이 없는 단일 의견만 존재하는 사회는 전체주의다. 간디는 "갈등과 분쟁은 진리를 드러내는 에너지이고 기회"라고 말했다. 우리 사회 갈등과 분쟁은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대화를 통해 발전의 기회와 에너지로 만들지 못하는 행태가 문제다.

 

대화는 영어로 'dialogue'. 둘 간(dia)의 논리(logue)라는 말이다. 둘 다 말이 되는 논리라는 의미다. 그리스 비극에서 안티고네는 국왕인 삼촌 명령을 거역하고 반역을 저지른 오빠 장례를 강행한다. 왕은 국법을 어긴 반역자는 적절한 장례를 허용할 수 없다는 통치 논리를, 안티고네는 가족의 윤리를 얘기하고 있었다. 화해할 수 없는 비극에서 안티고네는 "우리는 서로 미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말을 남긴다. 성경도, 불경도 결국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이게 인문 정신의 본질이다. 오규원 시인의 '무법'이란 시에는 '사랑에는 길만 있고 법은 없네'라는 구절이 나온다. 사랑하는 데 무슨 방법이 따로 있겠는가. 사랑하는 길만 있다.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한 경청과 공감은 결국 사랑의 에너지다. 예컨대 '세월호특별법'을 둘러싼 갈등에서 법률적 완결성과 합법성이 쟁점이 되긴 했지만, 사실 여기서 결여된 건 '사랑'이었다. 법 논리가 중요하지 않거나 틀린 게 아니라 아이 잃은 부모 심정을 그 논리와 법이 담지 못한다는 게 문제다.

 

체념은 포기가 아니라 희망

 

체념(諦念)도 중요하다. 체념은 포기하는 게 아니다. ()는 사실 진리 ''자다. 불교의 사성제(四聖諦), 네 가지 진리 할 때 그 글자다. 국어사전에도 희망을 버리고 단념함과 더불어, 두 번째는 도리를 깨닫는 마음이란 뜻이 나와 있다.

 

대화에 있어서나 민주사회를 살아가는 시민 입장에서 체념은 중요한 덕목이다. 주관을 단념하고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게 체념이다. 포기하는 마음이 아니라 '희망을 만들어 가는' 적극적 마음이다. 체념하지 못하는 마음은 '희망'이 아니라 미련일 뿐이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 교수는 "글이란 글 밖에 있는 걸 글 안에 담고자 하는 것"이라면서 사물을 온전하게 객관적으로 그린다는 게 가능한가라는 문제 제기를 한다. 저기 있는 나무는 자기 공간을 점하고 있고, 나는 내 공간이 있다. 내 인식의 공간을 뜻한다. 내 의식이란 캔버스는 이미 그 자체로 주관적 세계를 창조하고 있기 때문에 온전하게 저기 있는 그대로 그려낸다는 게 얼마나 가능한가. 결국 글쓰기라고 하는 건 주관의 체념이다. 주관을 체념할 때 전체를 온전하게 그려내는 글쓰기가 완성된다.

 

사회적 갈등과 분쟁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경청과 대화를 통해 해결을 위한 작은 합의, 공통의 분모가 만들어지려면 자기주장을 체념하는 게 중요하며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태도다. 합의의 결과가 선해야 하는 게 아니라 그 과정이 선해야 한다.

 

기원전 3세기 인도의 아소카왕은 불교에 귀의했지만, 통치자로서 다른 종교를 인정하고 포용하는 교시를 남겼다. "종교마다 기본 교리는 다를 수 있으며, 자기 종교는 사랑하고 남의 종교를 비판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 자기 종교를 선전하느라 남의 종교를 비난하는 것은 어떤 의도에서든 오히려 더 큰 해악을 가져다줄 뿐이다. 다른 사람의 가르침에도 귀 기울이고 존경해야 한다. 그리하면 자신의 종교도 발전하게 되고 진리도 더욱 빛나게 될 것이다."

 

인문학에서 세계의 중심은 아픔이 있는 곳

 

인문학에서 바라본 세계의 중심은 어딜까. 우리 몸의 중심은 어딘가. 가슴? 마음? 아니다. 발가락이 아프면 발가락이 중심이 된다. 귀가 아프면 귀가 중심이다. 인문학에서 바라보는 세계의 중심은 이 세상의 아픈 곳이다.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고, 또 지금 우리 사회가 앓는 분쟁과 갈등의 현장이다. 인문학은 사회 가장 아픈 곳의 중심에 서 있어야 한다.

 

또 인문학은 세상을 '이어준다'. 서로 다른 사람, 지역, 계층 그리고 왼쪽과 오른쪽, 위아래, 남과 북, 서로 다른 모든 것을 이어주는 게 인문학이다. 흔히 좌우, 진보 보수, 왼쪽 오른쪽을 다르다고 한다. 다르기도 하고 서로 구분된다. 그러나 이들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왼손과 오른손은 구분되지만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태극의 음양도 구분되지만 분리되어 있지 않다.

 

분쟁과 갈등을 문제 상황으로 바라볼 게 아니라 분쟁과 갈등을 바라보는 눈을 바꾸자. 그게 진리를 드러내는 더 큰 공동선을 만들어 가는 에너지가 되게 하자.

와우정사에 계시는 부처님

해탈의 경지라면 이런 표정을 닮지 않았나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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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써야 한다.

성공적인 작품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상의 습관을 버리지 않기 위해서이다." 톨스토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위대한 자산, 즉 시간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네.

시간을 성실하게 사용한다면 우리는 훨씬 놀라운 일을 이루어낼 걸세." 프리드리히 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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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는 마치 나병처럼 고독처럼 서서히 영혼을 잠식시키는 상처가 있다.

하지만 그 고통은 다른 누구와도 나눌 수가 없다.”

(사데크 헤다야트, <눈먼 부엉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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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홍근 원장.지구상에 사는 모든 생물은 태양의 주기에 따라 생체리듬을 조절해 왔습니다.

 

해가 뜨면 활동하고 해가 지면 자는 삶을 엄청난 시간 동안 되풀이하면서 우리 몸에는 빛을 인식하는 세포가 생겼지요. 더 나아가 빛과 어둠에 따라 작동하는 생체시계(master clock)가 발생했습니다. 이 생체시계와 우리 몸의 모든 세포는 서로 소통합니다.

 

뇌에 있는 생체시계(master clock)는 빛과 어둠에 따라 작동하고 간, 지방, 근육, 췌장 등에 있는 말초기관의 생체시계는 온도와 영양분에 따라 작동합니다. 예를 들어 간은 밥이 들어오거나 체온이 높으면 '아 지금 낮이구나' 생각하고 낮에 하는 활동을 합니다. 그래서 늦은 밤에 식사를 하면 내 몸은 자도 장기들은 낮으로 잘못 생각해서 쓸데 없는 에너지 낭비를 하게 됩니다. 잘 때 너무 온도가 높아도 장기들이 밤을 낮으로 착각해서 열심히 일하게 되는데, 그래서 열대야가 되면 잠을 자도 잔 것 같지 않아 피곤합니다.

 

뇌에 있는 생체시계는 시차 적응을 잘하지만 말초에 있는 시계는 적응이 더딥니다. 그래서 외국에 갈 때 시차부적응이 발생합니다. 빨리 적응하려면 말초시계를 신속하게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밥을 현지 시간에 맞게 먹으라고 권합니다. 밥 들어오는 것으로 낮과 밤을 구별하거든요. 낮과 밤을 바꾸어 생활하는 교대근무자(shift worker)들도 이 방법을 사용합니다.

 

이렇게 낮과 밤에 따라 신체의 모든 조직이 규칙적으로 on-off를 되풀이하는데 이런 리듬을 일주기성(circadian rhythm)이라고 합니다.

 

일주기성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혈압과 호흡, 체온입니다. 낮에 활동할 때는 혈압도 높고 호흡도 빠르고 체온도 높습니다. 그러나 쉬어야 하는 밤에는 저절로 혈압도 낮아지고 호흡도 천천히 깊게 바뀌고 체온도 1~2도 떨어집니다. 신기합니다. 이뿐 아니라 혈당, 인슐린, 콜레스테롤, 통증 민감도도 낮과 밤에 따라 많이 달라집니다.

 

교대 근무자처럼 낮과 밤이 자주 바뀌면 이런 일주기성이 교란되어 깨지기 쉽습니다. 그로 인해 혈압, 혈당, 스트레스 조절 등의 문제가 생겨 당뇨병, 심장병의 위험이 많이 증가하는데 이는 현대의학이 직면한 어려운 문제입니다. 미국의 통계에 의하면 전체 근로자 중 교대근로자의 비율이 가까운 장래에 약 20퍼센트 정도를 차지할 것이라고 하는데, 공중 보건학 측면에서 장차 심각한 문제로 떠오를 듯합니다.

 

이런 일주기성을 정리한 표가 있어 소개합니다.

 

 

 

 

/출처= Drug interaction, P111, 대한임상약리학회, 대한약학회 (이 표에 대한 참고문헌은 아쉽게도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이 표를 살펴보면 운동은 오후에 하는 것이 좋고, 뭘 빨리 외워서 써 먹으려면 아침 10시에 해야겠고, 무슨 일을 도모하려면 저녁 7시에 만나 밥을 먹으면서 하면 잘되겠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습니다. 통증이 왜 주로 밤에 많이 오고 아픈지, 층간 소음 문제가 왜 유독 밤에 심한지도 알 수 있습니다. 밤 10시 이후에는 잘 자야 하는 이유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건강의 첫 번째 비결은 몸과 자연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와 같이 사람이 인공적으로 만든 환경에서는 그러기가 쉽지 않지만, 따를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따르면서 사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ㅎㅎㅎㅎ 

항상 늘 오늘 자전거를 탈때

 아   날씨가 자전거타기  딱 이즈음이다.

마음에 빙점찍고

집을 나선다.

역시 이 기대감은 그 이상이었다.

반포대교 지나 오늘은 어제와 다른 길로

의정부가는쪽으로

뚝섬한강공원지나

영동대교 아래 양재쪽으로 잠실거쳐 잠수교다리가 아닌 여의도방향으로

행주대교건너 난지한강쪽에서 집으로 방향잡고

그런데 여의도 한강에 다다르자 한강보고싶다고 부산에서 올라온 친구 전화로

여의나루3번  출구에서 합류

63빌딩까지

마침 석양을 볼수있어 금상첨화였다

 

친구남편까지 합류

그것은 31년의 만남에 획을 그어버리는 기회였다

그 남편의 태도 가부장적문제가 아니다

인격을 의심케하는 언행으로

참으로 많은 생각에 불을 당기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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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영의 News English

인생을 바꾸고 싶으면(transform your life) 습관을 바꿔야(tweak your habits)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찍이 서기 전 300년 "우리의 존재는 우리가 반복해 하는 행위의 모습이다.

'탁월함(excellence)'이란 단일한 행위가 아니라 습관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했다.

미국에서 출간된 '1%의 원리'라는 책은 1%씩 습관을 바꿔나가면 인생에 커다란 차이를 가져온다는(bring about a big difference) '원리'를 담고 있다. 아주 작은 변화들(tiny changes)이 성공 가능성을 엄청나게 높여준다는(massively increase the chances of success) 내용이다. 저자인 톰 오닐은 "그런데 우리는 삶의 틀에 박혀(be in a rut of life) 매일 매일의 일상만 그럭저럭 하면서(muddle through) 그저 행운을 빌고(cross our fingers) 잘되기만 바란다(hope for the best)"고 지적한다. 요지는 이렇다.

습관을 바꾸려면 작은 목표들을 세우고 하나씩 실행에 옮겨보라(put them into practice). 하루 24시간의 1%인 14분 동안만 어떤 1%를 바꿔야 할지 생각해보라. 어떤 옷, 무슨 차를 살까는 그리 많은 시간 고민하면서 왜 자기 인생에 대해선 하루의 1%도 투자하지 않는가.

알람시계를 15분 일찍 울리게 하라. 30분 일찍 잠자리에 들라. 많은 게 달라진다. 탄산음료나 술을 마시지 않고 일주일을 보내본다(go for a week without fizzy drinks or alcohol).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물건은 필요한 사람에게 준다. 덕을 베풀면서 집안과 삶을 정돈할(set your house in order and declutter your life) 수도 있으니 도랑 치고 가재 잡기다.

현재 하는 일의 좋은 점 3가지를 꼽아본다. 그리고 10년 후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적어본다. 그 꿈을 이루기(make the dream come true) 위해 지금 해야 할 것 하나를 정한다.

 책상 서랍을 하루에 하나씩 정리 정돈한다(tidy one drawer a day).

지난 12개월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take time to reflect on the past 12 months).

좋았던 때와 나빴던 때(highs and lows), 성공과 실패(successes and failures)를 가려본다.

정말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feel really alive) 때는 언제였는지, 그런 느낌을 다시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되짚어본다.

 

사소한 일에 격하지(get excited over trifles) 말고 무시하는 법을 배워라(learn to ignore them). 작은 것들에도 웃고, 실수와 실패도 즐기는 법을 배워라.

 완벽주의자(perfectionist)가 되지 말라.

도달할 수 없는 것을 찾아(in search of the unattainable) 헤매게 해 고단하게 한다.

 목표를 향해 다음의 1%를 내딛는 것에만 집중하라(focus on taking the next 1 percent step towards your destiny).

안 될 것이라는 모든 이유는 잊어버리고, 될 것이라는 이유 하나만 믿어라.

인생은 자동차 핸들과 같아서(be like a steering wheel) 살짝만 움직여도 방향이 완전히 바뀐다(change the entire direction).

 여기서 1%만 틀어도 저 끝에 가서는 천양지차다.

다만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해야 한다. 어디로 갈지 모르는데 어떻게 가야 할지 어찌 알겠나.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엄마 아버지 가신이후 처음이라면 처음이다.

제자리에서 산다

함께 존재한다는 그 이유만으로 행복이다

가을날 우린 사치에 가까운 만남을 누렸고 행복했다

훗날 이 날 또한 그리워 할것임을 충분히 알것임을 안다.

모두 모두 다음에 또 이 사치를 누릴수 있게 잘 살고있길바라면서 그날까지 안. 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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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하며 지식이 쌓인게 아니라 의식이 달라졌다" 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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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내 참된 자아가 일러주는 말들에 맞추어 살아보고만 싶었다.

왜 그건 그다지도 어려웠을까?" - 헤르만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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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기획] 이 가을, 꼭 봐야 할 로맨스영화

<오마이스타>는 스타는 물론 예능, 드라마 등 각종 프로그램에 대한 리뷰, 주장, 반론 그리고 인터뷰 등 시민기자들의 취재 기사까지도 폭넓게 싣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노크'하세요. <오마이스타>는 시민기자들에게 항상 활짝 열려 있습니다. 편집자 말

오스트리아의 대표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가을날>이란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쓰고 저주라 읽는)다.

"지금 집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지금 홀로 있는 사람은 오래오래 그러할 것입니다."

천고마비의 책 읽는 계절은 무슨. 산책을 부르는 가을만큼 사랑하기 좋은 계절이 또 어디 있으랴. 릴케의 저주 마냥 지금 홀로 있는 자, 유죄일지 모른다. 아마도 25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비긴 어게인>의 이례적인 흥행 역시 가을로 접어들며 탄력을 받은 결과이리라. 존 카니 감독의 전작 <원스> 역시 2006년 9월 개봉했으니 가을 로맨스 영화 흥행 공식은 당분간 불패의 신화로 남게 될 것 같다.

그 로맨스의 계절 가을에 집이 없든 있든, 데이트용이든 교본용이든 상관없이 기어코 꺼내 보게 하는 영화가 있다. 가을을 맞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영화, 커플이 관계를 돌아보게 하고, 싱글에게는 연애 DNA나 구 남친, 구 여친의 기억을 되살려 주는 2000년대 고전(?) 영화가 여기 있다. 부디, 이 영화를 다시 보며 (혼자든 둘이든) 오래오래 그러하시기를.

<만추>, 기묘한 안개만큼이나 운명적인 3일 간의 사랑




▲ 영화 <만추>의 포스터
ⓒ CJ엔터테인먼트 관련사진보기


이제는 '탕웨이의 남자'가 된 김태용 감독과 '중국인 한국 며느리'가 된 배우 탕웨이를 사랑에 빠지게 한 운명의 영화 <만추>. 이만희 감독의 고전을 리메이크한 이 작품은 3일간 귀휴한 애나와 그에게 차비를 빌린 훈, 어색했던 두 사람이 가을밤 한적한 놀이동산에서 마음을 열게 되는 판타지 장면만으로 로맨스 영화의 반열에 오르기에 충분하다.

인물의 미묘한 감정을 화려하기보다 내밀한 영화 언어로 포착하는 김태용 감독 특유의 색채는 <만추>의 배경인 시애틀의 안개와 화학 작용을 일으키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극대화한다. 그 분위기 속에서 3일 만에 묘한 감정을 느끼는 애나와 훈의 그 미묘하면서도 마법 같은 심리를 꼭 대리 체험하시라는 것. 혹시 아는가. 이 가을, 은은한 미소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애나처럼 운명의 상대를 만나(거나 지금 상대의 진가를 알아 보)게 될지.

<500일의 썸머>, 세상의 모든 톰들이여 '가을양'을 영접하라




▲ 영화 <500일의 썸머>의 한 장면
ⓒ 이십세기폭스코리아 관련사진보기


<500일의 썸머>를 추천하는 이유는 살짝 엉뚱하다. 영화의 말미, 톰이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여성의 이름이 '가을(autumn)'이라서만은 아니다. 뜨거웠(다고 생각했)던 썸머(조이 드샤넬 분)와의 연애에서 한 뼘 더 성장한 톰(조셉 고든 레빗 분)은 운명의 상대를 알아보고 말을 건넨다. 얼핏 로맨스 영화의 흔하디흔한 엔딩이라고 평가절하하면 곤란하다.

시간대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썸머와의 연애를 기억하고 추적하는 <500일의 썸머>는 어쩌면 지금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거대한 환상이 실제로는 본인들의 착각일지 모른다는 진실을 재기 발랄하게 그려낸다. 그 달고 쓰고 아팠던 500일을 견뎌낸 세상의 모든 톰과 썸머에게 바치는 헌사인 셈이다. 각자의 썸머를 잊지 못한 분들이라면 더더욱, 운명의 '가을양'을 만나게 되기를.

<시월애>, 전지현과 이정재, 그리고 김현철의 음악




▲ 영화 <시월애>의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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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엽기녀'에서 지금은 '천송이'로 거듭난 전지현과 만년 청춘스타에서 <신세계>의 이자성과 <관상>의 수양대군으로 전성기 시절의 인기를 회복한 이정재. 둘의 14년 전 앳된 얼굴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즐거운 영화가 바로 <시월애>다. 실제 내용은 현대인의 고독,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실연의 상처 등을 감각적인 화면에 담고 있지만 말이다. 시간을 초월한 사랑이라는 설정으로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됐다지만, 지금이라면 시도하기 힘든 파격(두 남녀 주인공이 실제로 결말에야 만나는)보다 긴 여운을 남긴 건 가수이자 작곡자 김현철의 음악이다.

'천재 뮤지션'이라 불리던 총각 시절의 감성을 간직한 그의 음악은 주제곡 'You Must Say Goodbye(유 머스트 세이 굿바이)'를 바탕으로 다채로운 재즈선율로 편곡한 OST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지금과 달리 한국영화 OST의 인기가 시들하지 않았던 때다. 누구는 청승으로, 누구는 감미로움이라 받아들일 영화 속 음악은 쓸쓸하면서도 감성에 젖기 마련인 가을과 무척 잘 어울린다.

<클로저>, 가까워지면 멀어지는 당신 "Hello Stranger"




▲ 영화 <클로저>의 한 장면
ⓒ 소니픽쳐스코리아 관련사진보기


"Hello Stranger(헬로 스트레인저)"란 명대사를 남긴 <클로저>를 꼽은 이유는 사실 역설에 가깝다. 동명의 연극을 노장 마이클 니콜스 감독이 연출한 이 작품은 만남과 헤어짐, 버림과 매달림을 반복하는 네 남녀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간결한 구성과 사실적(이어서 거부감이 들 정도)인 대사로 승화시킨 블랙 멜로라 할 만하다. 주드 로와 클라이브 오웬의 지질한 망가짐과 나탈리 포트만의 처절함, 줄리아 로버트의 원숙함이 빛나는 연기는 꽤 능숙하게 조율돼 있다.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고, 떠나간 뒤에야 그 사랑이 진짜였음을 깨닫는 극 중 댄의 후회, 일견 육체적인 사랑을 중시하는 듯한 래리, 현재와 과거의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안나 가운데 오로지 한 사람에게만 집중했던 (가장 어린) 안나야말로 이 복잡하고 지저분한 관계의 승자다. <클로저>는 그렇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관계, 그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이들의 어리석음에 대해 폭로한다. 커플들이라면, <클로저>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쓰디쓴 교훈이 한둘이 아니리라.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가을에 만난 사랑 부디 이듬해 봄까지...




▲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포스터
ⓒ 스폰지 관련사진보기


이누도 잇신 감독이 연출하고 츠마부키 사토시, 이케와키 치즈루, 우에노 주리가 출연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2004년 10월 개봉해 국내 관객에게 일본 영화의 감성을 알린 작품이다.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 조제와 사랑에 빠지는 청년 츠네오의 이야기는 사랑에 서툰 이들이나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이들, 일상에 변화를 준 이들이 공감할 만한 구석이 크다.

예컨대 뭔가 색다른 상대, 이질적이지만 매력적인 대상에 끌렸던 이들이 종국엔 자기 처지를 돌아보고 거부하고 싶던 현실로 돌아오며 느끼는 씁쓸한 자괴감 등이다. 사실 이 작품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겨울 바닷가를 찾은 조제와 츠네오의 여행과 모텔 시퀀스다. 그렇지만 가장 슬픈 장면은 가을 즈음에 만나 계절이 두 번 바뀌고 이듬해 봄에 조제와 헤어지며 길바닥에서 꺼이꺼이 우는 츠네오의 오열이 아닐런지. 그러니 부디, 올가을에 사랑을 시작한 커플이 있다면 오래오래 함께 하시기를. 릴케의 저주 따윈 잊어버리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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