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은 공자가 사람을 살피는 가장 중요한 실마리다. '

 

논어' 학이편에서 공자는 "일을 할 때는 민첩하게 하고 말은 신중하게 해야 한다[敏於事而愼於言]"고 말한다.

 

또 이인편에서는 "말은 어눌하려고 애쓰고 행동은 민첩해야 한다[欲訥於言而敏於行]"고 말한다. 일은 곧 행동이다. 둘 다 민첩함[敏]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민첩함이라고 해서 그냥 잽싸다는 뜻이 아니다. 일에 임하는 태도와 관련해 공자는 학이편에서 경사(敬事)라고 했다. 기존 번역서들은 이를 '일을 공경하라'는 식으로 번역하는데 이렇게 해서는 그 말의 본 뜻을 알 길이 없다.

 

오히려 '매사에 임할 때 조심하고 삼가는 태도로 임하라'고 해야 그나마 본 뜻에 가깝다.

 

반드시 일에 임하여서는 두려워 하고[臨事而懼] 치밀한 전략과 전술 세우기를 즐겨 하여 일을 성공으로 이끄는[好謀而成者] 사람(안회)과 함께할 것이다."

 

일에 임해 두려워 하는 것이 바로 경사(敬事)이고, 치밀한 전략과 전술 세우기를 즐겨 하여 일을 성공으로 이끄는 것[好謀而成者]이 바로 민첩함[敏]이다.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일에 임해 두려워 한다는 것은 일을 두려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이 혹시라도 실패할까봐 두려워 하여 만반의 태세를 갖춘다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 자체의 성격을 잘 알아야 한다. 그 결정적인 실마리는 '대학'에 나온다.

 

"모든 일에는 근본과 곁가지가 있고 모든 일에는 끝과 시작이 있다[物有本末 事有終始].

 

진덕수는 '대학연의'에서 물(物)은 곧 사(事)라고 말한다. 즉 국내 번역서들이 모호하게 옮겨 놓듯이 사물이나 물건이 아니라 일[物=事], 즉 사람의 일로 보고서 인재를 보는 법[辨人才]으로 풀었다는 뜻이다. 결국 일[物=事]은 사람의 일, 즉 인사(人事)인 것이다.

 

다시 '대학'이다. 일에는 근본과 곁가지, 즉 중히 여겨야 할 것과 가벼이 여겨도 되는 것[重輕=輕重]이 있기 때문에 이것부터 가려야 한다.

 

그리고 모든 일에는 끝과 시작이 있다. 그래서 '대학'은 먼저 해야 할 것과 뒤에 해야 할 것을 알아야 한다[知所先後]고 말한다. 이런 사람은 일을 민첩하게 처리할 수밖에 없다. 말도 신중하게 할 것이다.

 

그래서 민어사이신어언(敏於事而愼於言), 욕눌어언이민어행(欲訥於言而敏於行), 경사(敬事), 임사이구(臨事而懼), 호모이성자(好謀而成者), 물유본말(物有本末), 사유종시(事有終始), 지소선후(知所先後)는 사람을 살피는 핵심 개념이 된다.

 

 

예쁘다

향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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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적인 일에 오랜 시간 투신한 친구와 만나 대포 한잔 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저런 한담이 오가다가 요즘 배우는 재미에 빠졌다고 합니다. 이에 제가 좀 자극 적으로 반응했습니다. “넌 앞으로도 창의적이기 어려울 것 같다. 배우는 일이 아름다운 일이기는 하지만, 배우다가 보통은 자기 길을 잃어버린다. 지금 너처럼 좋은 경력을 가진 사람이 아직도 배우는 일이 재밌어진다면 어쩌란 말이냐?”

저의 이런 반응에 의문을 품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배우는 건 좋은 일 아닙니까? 평생 배움의 고삐를 늦춰선 안 되겠지요?” 하면서요. 그런데 저는 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단계에서는 배움의 고삐를 늦춰야 할 때도 있지 않겠어요? 배움이 습관이 되어 버리면 평생을 배우다 세월을 다 보내버립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만 배우다가 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보통은 이러지 않나요?

우리가 배우는 목적은 언젠가는 자신을 표현하기 위함입니다. 배움은 수단이고,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목적인 것이죠. 삶은 자기표현의 과정이어야 합니다. 수동적으로 배우는 것이 습관이 되다 보면 이 표현 능력이 사라지기 쉽습니다. 그러니 무언가를 배울 때는 항상 머릿속에 ‘내가 배우는 목적은 나를 표현하기 위해서다’라는 생각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세계 어느 민족이 젊은 학생들을 붙들고 “공부 열심히 하라”고 그토록 다그쳐댑니까. 공부에 몰두하다가, 즉 다른 사람의 생각을 따라 배우다가 잘못하면 죽을 때까지 잃지 말아야 할 야수 같은 눈빛이 사라져버릴 수도 있습니다. 남에게 들은 말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자기 눈에서는 원초적인 힘찬 눈빛이 사라집니다. 자신의 주인 자리를 자기가 차지하고 있지 못하고, 배운 내용들이 대신 차지해버릴 때 이런 형형한 눈빛이 사라지는 일이 나타납니다.

공부는 내가 나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 내가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한 수단임을 잊지 말아야 해요. 이 기본적인 자세를 노자는 ‘자율自律’이라 했습니다. 자율이란 내가 나를 조율하는 겁니다. 남에게 들은 말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자신의 길은 잃고 삶은 더욱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공부를 멈추고 생각을 시작해야 하루를 살아도 나답게 살 수 있습니다.


출처 :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 EBS인문학특강 최진석 교수의 노자 강의


 

 

보스턴에서 북서쪽으로 차를 타고 40분 정도 달리면 한적한 도시 콩코드에 도착한다. 이곳에는 월든이란 호수가 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라는 철학자가 1845년부터 2년간 이 호수 북쪽에 기거하면서 '월든'이란 책을 써서 유명해졌다.
그는 손수 집을 짓고 밭을 일궈 자급자족 하며 살았다. 그가 살던 오두막에 가면 푯말이 하나 등장하는데 이렇게 쓰여 있다.

'나는 숲에 간다. 삶의 가장 본질적인 것들만을 대면해 보고 싶기 때문이다.


 

 

“육신은 잠시 걸친 옷일 뿐,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

 

2003년 4월 법정 스님과 최인호 작가가 서울 길상사 요사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덕조 스님 제공

 

 

“스님께선 어느 책에서나 죽음이 무섭지 않다고 하셨는데 정말 무섭지 않습니까.”(최인호) “죽음은 나무가 자라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거늘, 육신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겨 소유물이 소멸된다는 생각 때문에 편안히 눈을 못 감는 것이지요. 육신은 내가 잠시 걸친 옷일 뿐인걸요.”(법정 스님)

 

다음 달 11일 법정 스님(1932∼2010)의 입적 5주기를 앞두고 고(故) 최인호 작가(1945∼2013)와의 산방 대담을 담은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네’(여백·사진)가 24일 출간됐다. 2003년 4월 길상사 요사채에서 4시간 동안 나눈 대담이다. 책에는 2004년 출간된 ‘대화’(샘터)에 수록된 대담과 산문집 ‘최인호의 인생’에 실렸던 법정 스님 관련 글이 수록됐다.

 

최 작가는 생전 암 투병 중에도 법정 스님의 입적 3주기에 맞춰 2013년 이 책을 출간하려 했지만 소설 작업과 병세 악화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해 9월 세상을 떠났다. 그는 출판사에 스님이 입적한 날(3월 11일)을 전후해 책을 내 달라고 유지를 남겼다. 책 제목과 구성도 작가가 직접 정했다.

 

 

두 사람은 행복, 사랑, 고독, 죽음, 진리, 시대정신 등 11가지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남은 생의 꿈에 대한 이야기가 특히 눈길이 간다.

 

“저는 정면 승부하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다시 태어나도, 지금 이 생에서도 끝까지 창작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고요.”(최인호)

 

“내게도 꿈이 있지요. 얼마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남은 삶을 보다 단순하고 간소하게 살고 싶군요. 그리고 추하지 않게 그 삶을 마감하고 싶습니다.”(법정 스님)

 

두 사람 모두 말을 행동으로 옮겼기에 지금도 깊은 울림을 준다.

 

작가는 서로의 인연도 소개한다. 1980년대 초반 잡지 ‘샘터’에 각자 ‘산방한담(山房閑談)’과 연작소설 ‘가족’을 연재하던 두 사람은 우연히 잡지사에서 마주쳤다. 이런저런 대화가 오가다 법정 스님이 “앞으로 무슨 소설을 쓰겠느냐”고 묻자, 최인호는 “불교에 관한 소설을 쓰고 싶다”고 답했다. 최인호는 “쓰고 싶어 하면 언젠가는 쓰게 되겠지요. 말과 행동이 업이 되어서 결과를 이루게 됩니다”란 스님의 격려를 화두로 가지고 불교소설 ‘길 없는 길’을 완성했다.

 

이들은 첫 만남 이후 30년 가까이 열 번 남짓 만나면서 서로 격려하고 응원했다. 최인호는 “법정 스님과의 인연은 전생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숙세(宿世)의 것임을 깨달았다. 법정 스님과 나는 둘이 아니다.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다. 우리는 하나다”라고 썼다.

 

 

 

뛰자. ㅋㅋㅋㅋ

 

 

 

 

 

점프. 악악악악ㅎㅎㅎㅎ

 

 

 

 

 

여기에 이런 곳이 있었네

 

 

 

 

 

20150219(0101) 강화도 갯벌 일몰시간대였다

보는것만큼의표현은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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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차엔 ‘선거 불복’ 논란, 2년차엔 세월호 거짓 눈물

갈수록 최악인 총리 후보, 남은 임기 아득하기만 합니다

 

 

하는 일마다 왜 이렇게 고약합니까. 국민을 힘들게 하는 겁니까. 일주일 지나면 집권 3년차가 시작되는데, 앞으로 남은 당신의 임기가 아득하기만 합니다.

이완구 의원을 국무총리로 지명하고 인준 투표가 이뤄지기까지 벌어진 난장판을 돌아보십시요. 먼저 정치권이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그나마 생산적 경쟁의 원칙과 화합의 분위기가 자리잡아 가던 중이었습니다. 새누리당은 여권 전체가 파국으로 내몰릴 것을 우려해 울며 겨자 먹기로 인준 투표를 밀어붙였습니다. 거부할 수도 수용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 야당은 고심참담한 처지였습니다. 이래서야 야당이 국정에 생산적으로 협조할 수 있겠습니까?

다음은 이 나라를 망국으로 빠뜨려온 지역감정이란 괴물을 불러냈습니다. 그것도 비교적 중립적이었던 충청 사람들에게 불을 질렀습니다. 눈도 귀도 먼 충청권은 호남을 원망했고, 정부 여당은 이런 분위기를 악용해 호남을 고립시키려 했습니다. 내년이 총선이니 손 안 대고 코 풀려고까지 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충청 출신 새정치민주연합 소속 의원들과 정치인들은 중앙당에 조속한 인준을 재촉했겠습니까.

알다시피 이완구씨는 홍성 출신이라지만, 그곳의 김좌진, 한용운, 김복한, 김종진 선생 등 지조 높은 인사들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어떻게든 국방의 의무를 회피하려 했고, 땅 투기는 물론 절세·탈세를 귀신같이 해왔고, 심지어 친인척을 동원해 대학교수로 임용돼 월급만 받아 챙기고, 언론을 제 수족처럼 부리려 했습니다. 충절을 브랜드로 삼는 이곳의 우국지사가 본다면 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더 기가 막힌 것은 그런 사람을 지명하고, 지역감정을 부채질하여, 통과시킨 당신의 재주입니다. 대통령이라면 모름지기 국론을 하나로 모으는 데 앞장서야 합니다. 특정 지역의 대통령이 아니라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지역간 분열을 자극해 당파적 목적을 관철하려 했습니다. 그것이 지지율 30%대 대통령이 싸움에서 승률을 높이는 길이라는 걸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러나 그건 대통령이 아니라 조폭이나 할 짓입니다.

이완구씨는 지난해 12월 땅속에 묻힌 지 오래인 ‘대통령 각하’를 당신의 면전에서 세 번이나 언급했습니다. ‘대한민국을 힘들게 이끌어오신 대통령 각하께 박수를~’ ‘대통령 각하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당시는 정홍원 국무총리 후임자들이 거명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로서는 당신의 심장에 남을 최고의 아부를 날린 셈이고, 당신은 그런 이씨의 모습이 흐뭇했던가 봅니다.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당신의 충성스런 새누리당은 그의 인준을 관철시켰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당신을 흔쾌히 지지하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런 처지에서 입속의 혀처럼 굴 사람을 수하에 두려는 당신의 심정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전두환씨의 이 한마디만큼은 기억해야 합니다. “눈물 많은 놈 믿지 말라.” 재임 시절 동기동창이면서도 그 앞에서 각하, 각하 하며 온갖 비굴을 다 떨던 노태우씨를 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는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뒤 전씨 앞에서 감사의 눈물을 철철 흘렸습니다. 노씨는 대통령이 되자 그를 청문회에 세우고, 백담사로 보냈습니다.

눈물 연기에선 이완구씨도 빠지지 않습니다. 지난해 10월 안산 합동분향소를 찾은 그는 유족들 앞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그러나 그 뒤 그가 한 일은 ‘세월호 특별법’이 유족들의 뜻대로 제정되는 걸 방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진상조사위에 수사권·기소권을 줄 수 없다, 특검 추천권도 줄 수 없다는 그의 의견은 결국 관철됐습니다. 그리고 여당 쪽 진상조사위원회 위원으로 그동안 세월호 참사를 왜곡했던 인물들을 선임했습니다.

당신도 눈물 연기를 해봐서 알 겁니다. 눈물 잘 흘리는 탤런트는 상황만 바뀌면 언제든 해죽해죽 웃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언제든 배반하고 만다는 게 전씨가 제 삶에서 얻은 교훈입니다.

이 총리 후보자의 인준이 끝났으니 곧 당신의 집권 3년차를 함께할 진용이 꾸려지겠죠. 김기춘 비서실장도 짐을 다 쌌다고 하니, 내각과 청와대의 컨트롤타워가 새롭게 바뀌는 셈입니다. 그러나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섭니다. 문고리 3인방과 상시들은 건재하고, 문지방에 머리 박고 ‘황공무지’만을 읊조릴 총리가 들어섰으니 어찌 내용이 바뀔 수 있겠습니까. 비서실과 총리의 충성 경쟁이 오히려 가관일 것 같습니다.

김장수 주중대사 임명은 기대를 일찌감치 접게 한 또다른 이유입니다. 웬만하면 이완구 총리 지명으로 말미암은 난장판에 대해 속죄하는 차원에서 은인자중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중은커녕 당신은 소란을 틈타 김씨를 주중대사에 임명했습니다. 그는 외교의 문외한입니다. 게다가 그는 꼿꼿 장수가 아니라 뺑소니 장수였습니다. 세월호 참사 때는 ‘청와대는 컨트롤타워가 아니’라는 말로 책임을 회피했고,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파동 때는 그 내용을 잘 알고 있는 처지이지만, 진실이 왜곡되어 유포되는 걸 침묵으로 방관했습니다. 군사정부 시절 군 장성 출신을 즐겨 전권대사로 임명하던 독재자들의 습관이 아니라면 쉽게 할 수 없는 인사입니다.

하도 많이 되풀이되다 보니 이런 생각마저 듭니다. 국민들이 놀라 자빠지는 모습을 즐기는 건 아닐까? 중국의 서주를 망하게 한 건 포사와 그의 미색에 빠진 유왕이었습니다. 유왕은 포사가 웃는 걸 보려고 외적의 침략이 없는데도 시도 때도 없이 봉화를 올려 제후들이 군대를 끌고 장안으로 오도록 했습니다. 어이없이 돌아가는 병력을 볼 때마다 포사는 웃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견융이 침략했고, 유왕은 봉화를 올렸지만 아무도 지원병을 끌고 오지 않아, 나라는 망하고 유왕은 참수를 당했습니다.

2년 동안 당신은 총리로 다섯명이나 지명했습니다. 이 가운데 김용준, 안대희, 문창극씨 3명은 낙마했습니다. 인준됐다고 하여 적절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특히 부적격의 정도는 뒤로 갈수록 높아졌습니다. 이번이 최악이었습니다. 병역, 재산 형성, 탈루 탈세, 부동산 투기, 삼청교육대 인권유린, 교수 임용 의혹, 그리고 언론 협박 등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이뤄진 편법 탈법 불법 의혹, 부도덕한 처신과 부적절한 자질은 산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꼭 그렇게 해야 합니까? 그래야 직성이 풀리겠습니까? 집권 1년차엔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불복’ 논란으로 대통령선거 부정 문제를 덮고 넘어갔습니다. 2년차엔 거짓 눈물로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피했습니다. 그럼 3년차엔? 국민이 피해갈 만큼 지저분한 자들을 앞세워 국민과의 불통을 강화하겠다는 겁니까?

 

오직 우리 자신만이 스스로를 구원 할 수 있다

 

언제나 나 자신도 모르면서 당신들을 잘 아는것처럼 속단하고조언하는자신. 자신의 모습만이라도 잘 볼수있도록 힘써보자.

봄비일까가볍게난지한강을지금도달려본다.

역시난보이지않는두먼

더 달려볼까

걸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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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뛴다. 라디오 듣고 음악속으로. Dj의 유머속으로. 마침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또 그속으로 들어갔다가. 머리를 들고 마주오는 사람들과 간혹 시선이 마주칠때도 한참을 뛴다보면 그저 뛰기만하는 자신을 발견할때도 있다.

싸락눈사이로 난 현재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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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7대륙·7회 '지옥의 마라톤'…인간의 한계에 '도전'

한 선수가 일주일간, 일곱 대륙를 돌며 일곱번의 마라톤 풀코스를 뛰는 대회 
12명의 참가자가 출발한 이곳은 남극.
42.195m의 마라톤 풀코스를 마치자 쉴 틈도 없이 바로 이동
이번엔 바다 건너 남미의 칠레
남극에서 남미 칠레를 거쳐 북미의 미국을 찍고, 유럽 스페인과 아프리카 모로코에 들렀다 
아시아 아랍에미리트로, 그리고 마지막엔 호주 시드니까지.

 총 이동거리만 3만8천km.
이들이 잠을 자거나 쉴 수 있는 곳은 비행기 기내 뿐. 
식사도 기내식으로 제한
.영하 20도의 남극에서 영상 25도의 호주까지, 발가락은 동상에 걸리고 아킬레스건이 망가지는 등의 고통
.7번의 풀코스를 합친 295km를 25시간 36분 3초에 완주, 지옥의 레이스 우승자 기록
 대단한 모험이다
 단순한 경주가 아니라 모험
참가비 4천만원을 내고 고통의 레이스에 뛰어들어 완주한 12명의 참가자들, 인간의 한계에 도전한 그들 모두가 우승자이다

이들은 위대한 사람들이다

[정민의 世說新語] 은산철벽 (銀山鐵壁)

 

은산(銀山)은 중국 베이징시 창핑구(昌平區)에 위치한 산 이름이다. 봉우리가 워낙 높고 험준한 데다 겨울이면 흰 눈에 늘 덮여 있어 이 이름을 얻었다. 기슭은 온통 검은 석벽으로 둘러싸여 이를 철벽이라 부른다. 그래서 은산철벽은 사람의 의지가 굳고 기상이 높아 범접할 수 없음을 비유하는 말로 많이 쓴다.

 

권상하(權尙夏·1641~1721)가 정황(丁)의 신도비명에서 "대개 공은 실지 공부가 이미 깊어 대의를 환히 보았다. 이 때문에 변고를 만나서도 지조를 잃지 않았다. 비록 옛날에 이른바 은산철벽이라 한들 어찌 이에서 더하겠는가?"라고 썼다. 명(銘)에서도 "절해에 유배되어 죽음 앞에 더욱 굳세. 곤륜산에 불이 나도 안 타는 건 옥뿐일세(流移絶海, 九死確. 火炎崑岡, 不燼唯玉)"라고 기렸다.

 

 

월봉 무주(月峯 無住·1623~?) 스님의 '시혜사(示慧師)'란 시는 이렇다. "푸른 바다 깊이 재기 무에 어렵고, 수미산 높다 한들 못 오르리오. 조주 스님 '무(無)' 자 화두 이것만큼은, 철벽에다 더하여 은산이로다(滄海何難測, 須彌豈不攀. 趙州無字話, 鐵壁又銀山)." 깊은 바다도 닷줄로 잴 수 있고 수미산도 작정하면 못 오를 리 없다. 하지만 조주 스님의 무(無) 자 화두만큼은 눈앞이 캄캄해 어찌해볼 수가 없다. 시는 자신이 날마다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지만 이 화두 하나를 들고 중노릇의 끝장을 보려 한다는 얘기다.

 

은으로 깎은 산, 무쇠 절벽은 기대고 비빌 언덕조차 없는 난공불락이다. 선가(禪家)에서는 화두를 들 때 마치 은산철벽 앞에 마주 선 것처럼 어찌해볼 수 없는 극단의 경계까지 자신을 밀어붙여 활구(活句)로 이를 타파해야 화두가 비로소 열린다고 본다. 은산철벽을 유가에서는 지향해야 할 대상으로 본 데 반해 선가에서는 깨달음으로 가는 길에 반드시 넘어야 할 장벽으로 본 것이 다르다.

 

기필코 넘지 않으면 안 되는 은산철벽은 누구에게나 있다.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한 걸음 더 내딛는 불퇴전(不退轉)의 정신만이 끝내 우리를 붙들어준다. 스스로 은산철벽으로 우뚝 설 때까지 물러서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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