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했다" 자기 부고 써놓고 떠난 작가

[중앙일보]입력 2013.08.14 01:38 / 수정 2013.08.14 03:49

유머 칼럼 쓰던 61세 미국 여성
"이 글 쓸 시간 있던 게 말기암 장점…길게 쓰면 원고료 많아지니 생략"
신문에 실리자 SNS로 전국 퍼져

 


당신이 숨진 뒤 신문에 부고가 실린다면 누가 쓰는 것이 당신의 삶과 추억을 가장 잘 담을 수 있을까. 가족이나 친구라면 분명 당신이 남기고 싶은 발자취를 잘 기록해 줄 것이다. 하지만 그들조차도 당신이 인생의 반려자를 만났던 운명적 날의 떨림은 알지 못할 것이다. 부고에 이를 제대로 담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단 하나 당신 자신뿐이다.

 미국 일간지 시애틀타임스에는 지난달 28일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여성 작가 제인 로터의 부고가 실렸다. 761단어로 구성된 이 부고를 쓴 사람은 바로 로터 자신이었다. 유머 칼럼니스트로 활약했던 로터가 쓴 자신의 부고는 SNS 등을 통해 미 전역에 퍼지며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그리고 그가 원했던 대로 많은 이를 울리고 웃음짓게 했다.

 로터의 부고는 시작부터 그다웠다. “말기 자궁내막암으로 죽어가는 것의 몇 안 되는 장점은 바로 내 부고를 쓸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귀찮게 자외선차단제를 챙겨 바르거나 콜레스테롤 걱정을 할 필요 없는 것도 좋다).”

 로터는 자신이 1952년 시애틀에서 태어났고 워싱턴대에서 역사학으로 학사 학위를 받았다고 했다. 그는 작가협회 콘테스트에서 수상한 자신의 코믹 소설 『베티 데이비스 클럽』을 소개하며 “아마존닷컴에서 구입할 수 있다”는 홍보도 빼놓지 않았다. “내 유머 감각을 보여주기 위해 농담 몇 개를 하고 싶지만 부고 양이 길어지면 시애틀타임스가 지급해야 하는 원고료도 많아지니 이만 생략하겠다”는 농담도 했다.

 그는 결혼 30년째인 남편 로버트 마르츠에 대해 “밥(로버트의 애칭)을 만난 것은 75년 11월 22일 파이어니어광장의 술집이었다. 그날은 정말이지 내 생애 가장 운 좋은 날이었다. 밥, 당신을 하늘만큼 사랑해”라고 사랑을 표현했다. 딸 테사와 아들 라일리에게는 “인생길을 가다 보면 장애물을 만나기 마련이란다. 하지만 그 장애물 자체가 곧 길이라는 것을 잊지 말렴”이라는 조언을 남겼다.

 로터는 죽음의 공포를 이겨낸 긍정적인 사고방식도 소개했다. 로터는 “내가 바꿀 수 없는 일로 슬퍼하는 대신 나의 충만했던 삶에 기뻐하기로 결정했다. 태양, 달, 호숫가의 산책, 내 손을 쥐던 어린아이의 손… 이 신나는 세상으로부터 영원한 휴가를 떠나는 것”이라고 적었다. 로터는 “이 아름다운 날, 여기 있어서 행복했다. 사랑을 담아, 제인”이라고 부고를 끝맺었다. 그는 존엄사를 택했고 지난달 18일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로터의 부고는 이달 초 뉴욕타임스(NYT)·USA투데이 등 유력 매체들이 인용 보도하며 널리 알려졌다. 로터의 남편 마르츠는 NYT에 “제인은 삶을 사랑했기에 부두에 널브러진 생선 같은 모양새로 삶을 끝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에도 창가에 만들어놓은 새집에 벌새가 날아드는 것을 보고 싶다며 콘택트렌즈를 빼지 않겠다고 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NYT는 “로터가 쓴 글의 힘은 그가 무덤에서 독자들에게 이야기한다는 데서 나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호사종마(好事從魔)

“가라지의 비유(마태 13,24~30; 36~43).”

 

 

 

'가라지'라는 게 어떻게 생긴 건지? 중학교 때까지 농사하는 집안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웬만한 건 아는데... 논에는 '피'라는 게 있지요(표준어로는 뭐라는지?) 도시 대학생들의 농촌활동에는 피를 뽑는다고 논에 들어가서 벼를 뽑고 옥수수를 풀로 알고 뽑아버리는 학생들이 늘 있습니다. 잎이 비슷하게 생겨서 헷갈린 거죠.


벼는 대공 마디가 없고 피는 벼보다 키가 크고 꽃도 일찍 피어나니까 성장한 다음에는 다 구분이 되지만, 그 때는 이미 늦어서 뽑는다는 어렵습니다. 농부들 눈에는 구분이 되지요. 피는 거름만 실컷 빨아먹은 기생초입니다. 하여간 가라지건 피건 개망초건 명아주건 농부는 심지도 않았는데 잡초는 왜 그렇게 잘 자라는지? 아마도 인간이 돌보지 않은 것은 하느님께서 돌보기 때문일거라고 생각합니다. '호사종마(好事從魔)', 좋은 일에는 항상 마가 끼게 마련이지요. 지금도 우리 마을 가족들은 잡초와의 전쟁이예요. 예수님께서 농부가 기다리는 곡식(벼)과 잡초(피)의 비유를 드셨습니다. 농부가 애써 심고 가꾸는 곡식은 하늘나라의 이상과 가치이고 이성적 생각과 태도입니다. 마을의 삶으로 볼 때는 좋은 생각, 겸손, 헌신, 마음 열기, 양보, 희생, 용서, 배려심, 솔선수범 같은 덕목들이겠지요.

우리는 매일 생활을 성찰하면서 그런 공동체적 가치들의 성장을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런데 참 알 수 없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좋은 생각을 하고 겸손과 양보와 배려로 희생하려면 꼭 알 수 없는 어떤 속삭임이 있는 겁니다.

'왜 맨날 나만 양보해야 하지?' '이러면 날 호구로 알거야!' '이렇게 희생해주면 그에게 나쁜 버릇이 될거야?' '나도 강하다는 걸 보여줘야 해!' '나도 성깔 있다는 걸 알게 해줘야지!'

이런 속삭임이 일어난단 말이지요. 교오한 마음과 시기와 질투, 욕심과 인색함의 타당한 이유들이 슬그머니 올라오는 거지요. 좋은 생각을 곁에는 슬그머니 어느 새 감정의 한 편에 앉아있고 냄새를 피운다는 말입니다.


그런 나쁜 감정이나 생각은 좋은 생각과 동시에 나타나기도 하고 시간차, 공간차를 두고 나타나기도 해요. 대체적으로는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버젓이 버티고 앉아있는 형국입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악마가 그렇게 한 것이라 합니다. 악마란 좋은 마음 좋은 결심 좋은 생각 바로 뒤에 그림자로 붙어 있고 친구인척 늘 곁에 얼정거린다는 사실을 명심할 일입니다. ‘호사종마(好事從魔)’ 라 하겠지요. ‘좋은 생각엔 늘 욕심도 따른다!’

공동생활에서 내 생활태도에서 칠죄종과 같은 부정적 감정이나 본능이 자주 나타난다는 것은 내 안에 악마가 공존한다는 것입니다. 내 성품에 하늘나라도 있고 악령의 심보가 있다는 말인데,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상대방도 누구나! 이걸 예수님은 마태오 복음에서 '가라지' 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산위의 마을에서는 남자건 여자건 '콩밭매는 아낙네야~' 노래를 수십번 불러야 한 여름을 보냅니다. 김을 매더라도 풀이 작을 때면 대충 뽑기 쉽고 성큼성큼 뽑을 수 있지만 대공이 굵어지면 나무 뽑아내듯 합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예취기를 쓸 때도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가치를 부정하는 가라지의 모습들은 어렸을 때 뽑아버려야 합니다. 어른이 되어서 뽑는다는건 몸시 힘들기 때문에 수도원도 신학교도 공동체도 어린 시절에 선택해 어린 풀을 뽑고 좋은 모종을 정식하는 것이 좋겠지요. 예의염치(禮義廉恥), 인의예지(仁義禮智) 등 기본적 소양과 인성교육은 어른이 되면 이미 늦거나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좋은 것 나쁜 것 가릴 것 없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생활을 하더라도 종마(從魔)가 없고 숭고한 덕목들, 하늘나라 자녀, 밀뿐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 게 가능할까요?

그걸 완덕(完德: 아빌라의 데레사)의 상태, 혹은 합일(合一: 십자가의 성요한)이라고 합니다. 공자께서도 “七十而, 從心於欲 不足踰拒(칠십에 이르니, 욕심을 부려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더라).” 하셨습니다. 성현들이 그렇게 말씀하신 걸 보면 충분히 우리에게도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가장 최선 최고의 경지는 '좋은 습관' 입니다. 습관이란 행동이 스스로를 기억하여 생각이 자동 센서화 된 상태를 말합니다. 생각에는 유혹이 많고 시험에 들기 쉽지만 습관으로 이루어지는 행동은 이미 행위가 이루어져버렸기 때문에 악마도 기회를 놓쳐버리고 어떻게 해보려면 고심해야 하겠지요. 발붙일 기회를 자주 놓칩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이여, 오늘도 좋은 습관! * (2013. 7. 30)

 

 

 

심리치료 전문업체 마인드프리즘의 정혜신 대표는 본연의 자아와 사회적 자아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면 마음이 병든다고 말한다

 

 

 

정신과전문의 정혜신은 지난 8년간 SE(Self-Encounter: 자기조우) 프로그램을 통해 CEO·정치인 등 1000여명에게 자아성찰과 치유의 장을 마련했다. 특히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를 위한 치유 프로그램을 이끌어 관심을 모았다. 그는 최근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과 의기 투합해 ‘직장인 마음 건강 되살리기’에 뜻을 모으고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했다(김 의장은 지난해 초 정혜신 대표가 운영하는 마인드프리즘의 지분을 70.5% 인수했다).

올 한해 판매·서비스·상담 분야 종사자 등 다양한 직업군에서 500여 명을 선정해 마인드프리즘의 심리치유 프로그램 ‘내 마음 보고서’를 무료로 체험하게 하는 것이 골자다. 직업과 성격을 달리하는 많은 사람의 마음속 깊이 감춰놓은 이야기를 접하며 그가 내린 결론은 마음의 여유와 행복은 경제적 상황보다 개인의 성숙도와 관련 있다는 것. “가난한 사람은 행복할 수 있어도 부자들은 행복하기 어렵다”는 역설을 강조하는 정 대표에게 CEO의 행복을 자문했다.

행복이 성숙도와 관련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성숙한 사람은 자신의 사회적·직업적 페르소나(persona, 가면)를 상황에 맞게 바꿔 쓴다. 회사에서는 임원으로 대접받더라도 가정에 돌아오면 아버지와 남편 역할을 충실히한다. 반면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직업적 자아와 자신을 과도하게 동일시하는데 그로 인한 자아상실이 불행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집에서 아내가 남편이 아닌 ‘회장님’이라 부르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TV 드라마 속 기업인의 모습이 그 전형이다.

성공한 경영자는 행복하기 어렵다는 의미인가?

내면으로 들어가면 직원이나 경영자나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본연의 자아와 사회적 자아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면 마음이 병든다. 성공한 기업 경영인은 그 거리가 멀어지기 쉽다는 것이 문제다. 사회적 성공이 어느 정도 자기 억압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옛말에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하는데 그래도 먹고 살만해야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것 아닌가?

오너 회장을 만나 이야기 나누면 ‘사실 나 돈 없어요’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수백억원을 들여 재단을 만들고도 자기보다 돈 많은 사람을 의식하며 부끄러워하는 사람도 봤다. 기업도 경기가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위기의식을 조장해 직원들을 압박한다. 결국 여유와 배려는 경제적 상황이 아닌 사람의 성숙도와 관련 있다.

오너와 경영자의 심리적 건강이 기업에 미치는 영향이 적잖다.

물론이다. 물질중심적인 가치가 팽배한 우리 사회에서 재계 리더의 영향력을 고려하면 국가 전체에 미치는 영향도 상당할 수 있다. 달라이 라마에게 재테크를 자문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기업인으로서의 성공이 인격적인 성숙을 담보하지 않음에도 기업 오너에게 인생의 조언을 구하는 자연스런 모습이 이를 증명한다.

다분히 권위적인 우리 기업문화의 폐해는 없나?

우리 기업문화는 구성원 개개인의 차이에 주목하지 않는다. 회사에 일정 기간을 부분적으로 기여할 수 있지만 결국 ‘나’로 충실히 살기 위해 태어난 건데 말이다. 삶에는 가정·친구 등 여러 영역이 있고 직장도 그 중요한 일부다. 하지만 사람을 고용했다고 노예로 산 것이 아닌데도 과도하게 일을 시키고 희생을 강요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모습을 종종 본다. 회사와 직원들 사이에도 돈과 성공을 위해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암묵적 동조가 이뤄진 듯하다.

그렇다면 치유는 어떤 과정을 통해 이뤄지나?

자신의 맨 얼굴을 보게 해 주는 것이 치유의 시작이다. 어떤 오너 회장은 친구도 소수만 만나고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지만 경영 성과는 좋았다. 너무 내향적이라 기업경영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적극적이고 외향적인 사람을 임원으로 뽑았다. 하지만 성격이 다른 임원과 관계를 형성하는데 에너지 소모가 너무 커져 힘들어 했다. 결국 심리분석을 통해 자신의 콤플렉스가 사실은 장점이라는 것을 깨닫고 편안한 마음으로 업무에 매진하게 됐다.

자신의 본 모습을 발견하는 것만으로 도움이 된다는 말인가?

성찰을 통해 자기 정리가 되면 현실을 합리적이고 담담하게 볼 수 있고 그로 인해 에너지가 축적될 수 밖에 없다. 운전 중 가장 사고가 많이 날 때가 안개 낀 날 아닌가? 대인관계의 안개가 걷히면 자동차 급브레이크 밟는다든지 조바심 내느라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모할 필요가 없어진다.

CEO의 달라진 심리상태가 경영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 예는?

어떤 오너 회장상담을 받고 돌아가서 “50년 넘게 살아오면서 자기 본 모습을 처음 봤다”며 “선생님 살려주세요”라고 문자를 보내왔다. 특별히 아픈 기억이 있지는 않았지만 평생 거울 없이 살다 본연의 모습을 마주 대하고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 후 다시 만나 이야기 했는데 “본인이 구조조정을 많이 했는데 그것을 정책적 결정이라고만 생각했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털어놨다.

자신을 돌아보고 오너가 아닌 한 인간으로 섬세한 감정을 회복하고 나니 직원은 물론 아내와 자식의 감정에 대한 공감이 일순간에 쓰나미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에는 그 회사의 퇴직 임직원에 대한 배려가 많이 달라졌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구조조정을 하더라도 직접 당사자를 만나, 회사가 처한 상황 때문에 그런 것이지 당신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며 격려한다고 들었다.

‘동업자’ 카카오 김범수 의장과의 인연은?

오래전 NHN 이해진 의장의 심리상담을 진행한 것이 인연이 돼 당시 (NHN의 관계사인) 한게임 대표였던 김 의장과 다른 임원들의 심리상담도 맡았다. 소박하고 좋은 분인데 다 인간관계에 대한 섬세하고 예민한 통찰의 소유자기도 하다. 무엇보다 그 소박함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대단하다.

김범수 의장과 이해진 의장을 비롯한 젊은 오너 기업인은 이전 세대 기업인과 어떤 부분이 다른가?

두 사람과 나성균 네오위즈홀딩스 대표처럼 자기가 가진 부를 사회적으로 어떻게 의미 있게 사용할지 고민하는 CEO가 많다. 정보기술(IT) 사업가뿐만이 아니다. 고무적인 현상이다.

지난 대선 기간 중 문재인 후보의 찬조연설자로 나섰는데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닌가?

오랫 동안 (쌍용차) 해고 노동자의 심리치료를 맡으며 느낀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 나섰을 뿐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세상의 길들은 몸속으로 흘러들어온다."

소설가 김훈의 에세이 '자전거 여행'에 나오는 첫 문장이다. 소설가보다 자전거 라이더로 불리기를 더 좋아한다는 김훈 아저씨가 자전거로 미처 경험해보지 못한 게 있으니 바로 자전거 캠핑여행. 세상의 길들 위에 누워 오롯이 야영을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잠시나마 '금속말 탄 유목민'이 된 이채로운 경험과 추억을 남길 수 있다. 더불어 경치까지 좋다면 여행의 즐거움이 배가되기도 한다.

흔히 캠핑이라고 하면 차 안에 캠핑 용품을 싣고 떠나는 오토캠핑을 연상하기 쉽지만, 배낭 하나에 모든 캠핑 도구를 짊어지고 다니는 백패킹(Backpacking)과 자전거에 캠핑 도구를 싣고 떠나는 여행인 자전거 캠핑(Bicycle Camping)도 있다. 이 두가지는 대표적인 미니멀(미니멀리즘: 최소주의) 캠핑으로 불편함을 기꺼이 혹은 즐거이 받아들이고, 여정(여행의 과정)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잘 맞는다.

더운 여름날에도 땀 흘리며 달리는 '쾌감'을 느끼고 싶다. 쏟아지는 비를 맨몸으로 맞아보고 싶다. 정해진 캠핑장이 아닌 야외에서 텐트를 치고 잠을 자고 싶다. 길을 헤매거나 찾아갈 땐 GPS보다는 JPS(주민 대화형 시스템)이 좋다. 때론 배고픔과 목마름에만 충실한 단순하고 원초적인 삶을 경험해 보고 싶다…. 여기에 해당되는 사항이 많으면 많을수록 당신은 자전거 캠핑족의 유전자를 지니고 있을 확률이 높다.

금속말 탄 유목민 되기, 패니어와 트레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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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에 짐가방(패니어)을 장착하고 그 속에 캠핑장비를 수납한 자전거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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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용 트레일러는 보다 많은 짐을 싣고 캠핑여행을 할 수 있다.
ⓒ 박주하

 


캠핑의 또 다른 진미를 맛볼 수 있는 자전거 캠핑,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 (이영돈 PD 성대모사). 자전거에 집 한 채를 실어야 하는 특성상 초경량, 울트라 라이트,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며 짐을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 기본적으로 들어가며 자전거 캠핑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텐트, 침낭, 매트, 코펠 등은 모두 1~2인용의 작고 가벼운 장비들을 사용하면 된다 (매트는 공기 주입식 베개가 붙어있는 에어매트가 편리하고 수납에 좋다). 여기에 자전거 바퀴에 펑크가 날 것을 대비해, 예비용 튜브와 비상용 수리기구는 잊지 말고 필히 휴대해야 한다.

준비된 캠핑장비들을 자전거에 수납하기만 하면 되는데 보통 두 가지 방법이 쓰이고 있다. 자전거에 부착하는 짐 가방(패니어, pannier)이나 자전거용 트레일러를 이용한다. 패니어는 위 사진처럼 캠핑장비들이 모두 수납이 되며, 비가 내릴 때를 대비해 방수기능까지 갖추고 있다. 기차나 고속버스로 여행지 부근까지 이동할 때도 편해 대부분의 자전거 캠핑족들이 패니어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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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호 기차 카페칸에 생겨난 자전거 거치대.
ⓒ 김종성

 

참고로 무궁화호 기차의 카페 칸에 자전거 거치대가 있어 접이식 자전거가 아닌 일반 자전거도 기차에 실을 수 있게 되었다. 철도청 홈페이지에서 기차표 예약 시 자전거 거치대 예약도 같이 할 수 있으며 따로 이용료는 없다.

트레일러는 자전거 뒷바퀴에 연결하는 일종의 짐수레로, 자전거용 제품이 따로 있다. 무게 중심이 낮아 안정적이고 많은 짐을 수납할 수 있다. 기차나 고속버스를 이용하기 힘들어 중거리 여행에 적합하다 (서울로 치면 춘천, 대부도, 강화도 여행 등). 트레일러에 포함된 짐 가방도 방수기능이 있는 천이다.

마침내 금속말 탄 유목민이 되었다면 다음은 자전거 캠핑 여행지 선택. 다행히 어디로 갈 것 인지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한 번 캠핑을 나서보면 '우리나라에 이렇게 캠핑장이 많았구나'라고 실감하게 된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지도 메뉴에서 가고 싶은 '동네 지명+캠핑장'을 치면 지도상에 해당 캠핑장들이 이름과 함께 우수수 나온다. 최근 캠핑 붐을 타고 전국에 400여 곳의 오토캠핑장이 생겨났다고 한다. 자가용을 위한 오토캠핑장이지만 자전거 여행자도 사용할 수 있다.

 


나만의 소울 플레이스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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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정자에 텐트를 칠 땐 마을회관에 가서 양해를 구하는 것이 좋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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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형지물을 이용 좁은 자리에서도 캠핑을 할 수 있는 자전거 캠핑.
ⓒ 박주하

 


자전거 캠핑 여행의 장점은 여유롭고 자유롭게 구석구석을 돌아보는 재미가 남다르다는 점이다. 버스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차비를 준비할 필요도 없다. 가고 싶은 곳까지 두 바퀴를 굴려서 이동하면 그만이다. 야영장비와 취사도구가 있으니 잠자리와 식사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도를 닦듯 반복적으로 페달을 돌리다보면 온갖 잡념이 날아가고, 길들이 몸속으로 들어오며 아름다운 풍경과 내가 하나가 되는 신묘한 경험까지 할 수 있다.

이렇게 여정이 풍성한 자전거 캠핑 여행족은 어느 마을의 오래된 느티나무 밑 평상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더위를 식혀줄 바람과 그늘이 있는 마을 정자는 자전거 여행자에게 천국이 되기도 하고, 물마시며 휴식도 취할 겸 잠시 누워 즐기는 낮잠은 꿀같이 달콤한 추억으로 남기 때문이다. 굳이 속도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자전거 유람'이다.

안내 책까지 나올 정도로 전국에 오토캠핑장이 생겨나고 있지만 자전거 캠핑족에겐 따로 정해진 야영장은 없다. 강변, 해변가, 마을, 들판, 나무 밑…. 세상의 모든 곳이 나만의 캠핑장이다. 여행을 가려는 지역에 캠핑장이나 야영 데크가 있는 자연 휴양림이 있으면 좋겠지만 예약이 꽉 찼거나 없어도 상관이 없다. 자전거는 전천후 캠핑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마을마다 한두 개 씩은 꼭 있는 정자, 마을회관 앞, 동네 체육공원, 심지어 교회 안마당도 이용가능하다(기차역 주변은 피하자, 새벽에도 기차들이 쇳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마을 정자를 이용할 땐 마을회관에 가서 주민들에게 정중히 부탁해 양해를 얻는 것이 좋으며, 화장실이 가까운 곳이 세수나 세탁, 전자기기 긴급 충전 등 여러모로 유리하다. 외지인이지만 사람의 경계심을 풀어주게 하는 자전거 덕분에 지역 주민들은 대부분 야영을 허락해 주고, 운이 좋으면 마을회관에서 쉬거나 식사를 권하기까지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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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소울 플레이스를 만나러 가는 자전거 캠핑여행.
ⓒ 김종성

 


멋지고 시설 좋은 자연 휴양림이나 오토캠핑장은 아니지만 계획 없이 우연히 야영한 곳에서 '죽어도 좋을 만큼 기억 속에 오래 남는 내 인생의 마지막 한 곳'이랄 수 있는 소울 플레이스(Soul Place)를 만나기도 한다. 돌돌돌~ 강물소리가 자장가처럼 아득하게 들려오는 전북 임실 섬진강변의 구담마을 정자, 정다운 모래강 내성천이 흐르는 경북 예천 회룡포 마을 무료 야영장, 용천수 노천탕이 있는 작고 아담한 바닷가 제주 애월읍의 곽지과물해변가 등이 그런 곳이었다. 자신의 나머지 인생을 후회 없이 숨 쉬게 해줄 수 있는 소울 플레이스를 간직했으니, 여름날의 자전거 캠핑여행은 비록 무모했으되 무용(無用)하지는 않았던 셈이다.

종종 그런 풍경은 자전거 여행자의 운명을 바꿔 놓기도 한다. 욕망의 바벨탑으로 이루어진 이 첨단의 자본주의 세상에서 성공의 논리와 승리의 질서를 따르지 않을 수 없고, 이 세상이 온통 생존과 성공을 위한 싸움터라고만 여겨왔던 한 사람은 어느 한가롭고 허허롭고 그윽한 들판에서 비로소 자신이 오래도록 속고 살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풍경 앞에서 그는 싸움터를 등진 채 이전과는 다른 삶을 향해 뚜벅뚜벅 걸음을 옮긴다. 단지 아름답고 멋진 경치를 넘어 풍경이 운명을 바꿔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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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이 풍요로운 자전거 캠핑족은 이런 나무 밑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 김종성

 


그리 크지 않은 땅덩이지만 때론 몇 시간을 달려도 사람을 만날 수 없을 때도 있다. 하지만, 외롭거나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무도 아무것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지만, 그 빈 공간과 멈춰버린 시간은 이름 붙일 수 없는 무언가로 가득 차 있다는 걸 자전거 페달을 부지런히 돌리다 문득 깨닫게 된다.

자전거 캠핑여행은 새로운 것을 보고 사람을 만나고 자연과 스치며 긍정적인 힘을 얻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여정 속을 달리며 나와 만날 수 있는 의미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좋다. 도시의 삶은 나 자신과 마주할 시간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다. '먹고 사느라' 바쁜 일상의 삶에 매몰되고 방치되었던 내 안의 나와 오롯이 마주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있다는 것, 자전거 캠핑여행의 또 다른 매력이 아닐까 싶다.

일찍 일어나 하루를 계획하고 부지런히 달리며 정신을 집중하기, 소박하게 먹고 가진 것을 줄이기, 여행 중 받은 친절에 감사하고 이방인으로서 겸손해하기, 모든 것을 새롭게 보기…. 집에 돌아온 후에도 자전거 여행자의 마음으로 일상을 살면 더욱 좋겠다.


 

 

 
구문소를 살펴 본 우리들은 인근 동점동에 위치한 '태백고생대자연사박물관'으로 이동했다. 지난 2003년부터 2010년까지 200억 원을 들여 건립한 이 박물관은 고생대를 주제로 한 전문박물관으로 경상도에서 태백으로 진입하는 관문에 위치하고 있어 누구나 학습과 체험을 위해 찾고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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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백고생대자연사박물관 박물관 내부
ⓒ 김수종

 


사실 이곳 박물관 내부는 이미 박제된 기념물을 전시하고 있는 공간일 뿐이다. 그러나 외부는 실재로 지금도 살아있는 고생태 지층으로 자연사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야외전시장이다.

고생대 퇴적침식지형과 삼엽충·완족류 등 다양한 산출을 보이는 직운산층 등이 산재해 있어 그야말로 살아 있는 현장체험 학습장으로 인기가 높다. 전시물의 선캄브리아기 20%, 고생대 60%, 중·신생대 20%로 구성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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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백고생대자연사박물관 공룡의 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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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방문한 당일에는 '생물의 독(毒)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동물·식물·미생물의 몸속에서 생성되는 독과 산·들·바다에서 자라는 독을 품은 생물, 독을 이용한 의약품의 개발 등 독의 효능과 기능을 공부하는 멋진 학습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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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백고생대자연사박물관 생물의 독 특별전
ⓒ 김수종

 


박물관을 전부 둘러 본 우리들은 다시 차를 타고 황지동에 위치한 '송이닭갈비'집으로 이동하여 태백의 명물 중에 하나인 '물 닭갈비'를 먹으러 갔다. 춘천 닭갈비는 통상 채소와 닭고기를 볶아서 먹는 형식인데, 태백은 독특하게도 채소와 닭고기에 육수를 부은 다음 당면·라면사리·고구마·떡·냉이를 넣어서 전골처럼 끓여먹는 게 특징이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약간의 나물과 밥을 볶아서 먹는 맛도 남다르다. 태백시에서는 지역 특산품으로 상표등록을 하고 싶기는 한데, 현재 태백에 닭을 잡는 도계장이 없는 관계로 상표등록이 쉽지 않다고 한다. 상표등록을 위해서는 현지에서 생산된 닭을 현지에서 잡고, 현지에서 생산된 푸성귀 등을 이용해 만든 음식이라는 조건이 있는가 보다.

태백 닭갈비, 참 특이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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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백시 물 닭갈비
ⓒ 김수종

 


우리는 태백에서도 3대째 물 닭갈비 장사를 하고 있다는 '송이닭갈비'집에서 3대를 잇고 있는 아들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깨끗하고 깔끔한 맛의 물 닭갈비를 맛있게 먹었다. 개인적으로는 태백에서는 감자 수제비·곤드래 밥(산채 비빔밥)·물 닭갈비가 최고의 음식인 것 같다.

식사를 마친 우리들은 '삼수령(三水嶺)'을 넘어서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儉龍沼)'로 행했다. 삼수령을 넘기 전까지는 사실 나는 왜, 태백에 한강과 낙동강의 발원지가 모두 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삼수령을 넘으면서 지도를 살펴보니 태백시의 대부분은 사실 백두대간의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고, 북쪽의 일부인 삼수동 지역만 백두대간을 넘어서 한강수계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신동일 해설사의 설명에 따르면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태백은 백두대간을 중심에 두고 구분하는 현재의 영서·영동의 구별법으로 보자면 영동이 아니라 영남지방이다. 지도를 보니 태백은 강원도에서 유일한 영남지방으로 낙동강 수계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의 삼수동 지역만 백두대간을 넘어서 한강 수계에 위치하고 있어 영서지방이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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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룡소 가는 길 물푸레 나무
ⓒ 김수종

 


따라서 태백에서 한강과 낙동강이 시작되는 것이다. 신 해설사는 "백두대간 선상에 있는 삼수령은 봉우리를 중심으로 북쪽에 내리는 비는 한강으로 흘러가고, 남쪽에 내리는 비는 낙동강으로, 동쪽에 내리는 비는 오십천으로 흘러간다"고 설명했다.

삼수령은 천의봉과 덕항산을 잇는 고개로 삼척지방 사람들이 난리를 피해 이상향(理想鄕)으로 알려진 황지로 가기 위해 이곳을 넘었기 때문에 '피해 오는 고개'라는 뜻으로 '피재'라고도 한다.

정상에는 전망대 구실을 하는 삼수정이라는 정자각과 조형물이 있고 주변은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해발 고도 920m 정도 되는 곳이라, '푄 현상'으로 눈비가 많은 곳이라고 한다. 실재로 삼수령에 올라 물길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한강과 낙동강으로 흘러가는 물길뿐이다. 오십천으로 가는 물길은 수맥으로 흘러 삼척에서 가서야 물길을 드러낸다.

삼수령을 넘으면 매봉산의 고랭지 배추단지와 풍력발전단지, 귀네미골의 배추단지와 풍력발전단지 등을 볼 수 있다. 특히 귀네미골에서는 동해바다를 눈으로 볼 수 있는 풍경이 연출되기도 한다.

 

 

 


다시 차를 타고 금대봉 아래에 있는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73호인 검룡소로 행한다. 사실 불과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한강의 발원지는 '오대산 우통수'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때부터 몇 차례의 실측 결과 오대산보다 30km 이상 멀리 자리 잡고 있는 검룡소가 지난 1987년 국립지리원에 의해 최장 발원지로 공식 인정됐다.

금대봉의 왼쪽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검룡소는 서해에 살던 이무기가 용이 되려고 강줄기를 거슬러 올라와 이곳에서 머무르고 있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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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룡소 가는 길 한강의 발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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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대봉 기슭에 있는 작은 샘들인 제당굼샘과 고목나무샘, 물골의 물구녕 석간수와 예터굼에서 솟아나는 물이 지하로 스며들어 이곳에서 다시 솟아난다.

둘레 약 20m이고, 깊이는 알 수 없으며 사계절 9℃의 지하수가 흘러나오는 냉천(冷泉)으로 하루 2,000~3,000 톤씩 석회암반을 뚫고 솟아 폭포를 이루며 쏟아진다.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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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룡소 안내문 태백시
ⓒ 김수종

 


오랜 세월 동안 흐른 물줄기 때문에 깊이 1∼1.5m, 너비 1∼2m, 길이 20m 이상의 암반이 구불구불하게 폭포를 이루며 패여 있어 마치 용틀임을 하는 것처럼 보여 신기감이 더하다. 소의 이름은 물이 솟아 나오는 굴속에 검룡이 살고 있다 해서 붙여졌다.

물은 정선의 골지천과 조양강, 영월의 동강을 거쳐 단양·충주·여주로 흘러 경기도 양수리에서 한강에 흘러든 뒤 서울을 거쳐서 김포에서 임진강과 마지막으로 만난 뒤 서해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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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룡소 시작은 작지만 끝은 창대하다
ⓒ 김수종

 


금대봉 일대는 환경부가 정한 자연생태계보호구역으로 국내 최고의 야생화 단지로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동시에 간직한 들꽃들을 관찰하기 위해 카메라를 든 탐방객들이 희귀 동식물을 보기 위해 많이 오는 곳이다.

아울러 이곳은 물놀이나 취사·야영 등이 금지돼 있다. 매년 8월 첫째 주 일요일에 태백문화원 주최로 한강대제가 열린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우리들은 왕복 5km 정도 되는 물길을 따라 올랐다.

신 해설사는 산책로를 오르면서 계속해서 나무와 풀·꽃들에 대한 설명과 함께 검룡소와 한강의 물줄기에 대한 개략적인 해설도 해줬다. 물푸레나무·돌배나무·박달나무·산뽕나무·자작나무·굴참나무 등 이름만 알지 실제로는 전혀 구분이 되지 않던 나무의 구별법은 무척 재미가 있었다.

약초와 풀 등도 설명을 해줬는데,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름 공부가 많이 된 것 같다. 검룡소를 오르면서 "자연학습과 산책로로 이 길을 더 멋지게 개발하면 좋을 것 같다"고 했더니 신 해설사는 "이곳에서부터 황지까지를 연결하는 한강과 낙동강 발원지 답사 코스는 거의 길 개척이 완료됐다"고 했다. 언제 한 번 날을 잡아 이곳을 걸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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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룡소 폭포물이 시작된다
ⓒ 김수종

 


30분 정도 길을 오르니 검룡소가 보인다. 더운 여름날에는 시원한 바람이 막 불어올 것처럼 깨끗하고 청량감이 넘치는 맑은 물이다. 주변의 녹색과 어우러진 풍광이 절로 감탄이 나온다. 이곳이 말로만 듣던 한강의 시작점이구나! 잠시 기도를 한 다음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이제까지 본 것과는 전혀 새로운 느낌의 시작과 출발을 알리는 작지만 장대함으로 끝나는 한강의 발원지에서 숙연함을 느낄 수 있었다. 너무 기쁘고 감격적이었다. 부모님이 주신 건강한 두 다리에 멋진 경치를 볼 수 있는 두 눈이 있어 무척 행복했다.

잠시 쉬었다가 다시 길을 돌아 주차장으로 왔다. 비가 조심씩 오고 다시 본격적으로 장마가 시작되려나 보다. 이제 서둘러 서울로 가자. 길은 멀지만, 그리고 행복한 이틀 동안의 태백여행이었다. 즐거웠다.

 

트레킹을 준비하면서부터 시작된 고민은 해발 5416m 쏘롱라를 넘는 것이었습니다. 해발 5000m 높이는 경험해 보지 못했기에 기대와 두려움이 교차되었습니다. 우려와는 달리 어제 무사히 쏘롱라를 넘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높은 곳을 경험한 것이지요. 자고나서도 흥분이 가시지 않습니다. 이제 세상 어떤 어려운 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깁니다.

힌두교와 불교가 어우러진 '묵티나트'

어젯밤에는 함께 고생한 가이드와 포터를 위한 잔치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도움이 없었으면 쏘롱라를 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랜만에 여유를 가지고 고용한 자와 고용된 자의 관계가 아닌 오랜 시간을 함께한 형과 아우의 마음으로 술과 안주를 주고받았습니다.

아침에 마을을 산책하였습니다. 해발 3800m에 자리 잡은 묵티나트는 티베트 불교와 힌두교의 흔적이 마을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마을과 계곡 곳곳에는 룽다와 타르초가 나부끼고 까마득한 절벽 아래에는 사원이 있습니다. 종교 간 반목 없이 어우러져 공존하는 모습이 보기 아름답습니다.


묵티나트를 출발하였습니다. 오늘은 좀솜(2720m)까지 갈 생각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가이드북에는 묵티나트에서 좀솜까지의 트레일이 안나푸르나 라운딩 중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고 합니다. 안나푸르나(8091m)와 다울라기리(8167m) 사이에 있는  세상에서 가장 깊은 칼리간다키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것입니다.

마을에는 새로 집을 짓는 모습이 많이 보입니다. 마을 끝자락에는 지프차 정류장이 있구요. 지프차는 좀솜까지 운행된다고 합니다. 나날이 증가하는 순례자와 여행자의 편의를 위한 것 같습니다. 순간적으로 지프차의 유혹이 왔지만 포기하였습니다. 트레킹은 자신의 두 발로 걷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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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작로와 트레일 묵티나트를 벗어나면 서로 다른 길이 있음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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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식의 '희망을 만나다'

마을을 벗어나자 도로와 트레일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삼십 분 쯤 내려오자 황량한 다울라기리를 배경으로 자르코트(3550m)가 있습니다. 마을은 황무지 사이에 섬처럼 떠 있습니다.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보입니다. 마을 위쪽에는 사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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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르코트 히말라야 바랍이 머무는 곳의 배경 '자르코트' 모습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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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르코트는 2009년 최민식 주연의 <히말라야, 바람이 머무는 곳>의 배경이 된 곳입니다. 이 영화는 우연히 동생의 공장에서 네팔 청년 도르지의 장례식을 보다가 그의 유해를 고향에 전달해달라는 부탁을 받으면서 일어나는 일을 담고 있습니다. 유해를 전달하기 위해 도착한 자르코드에서 도르지가 죽었다는 이야기는 전달하지 못 하고 그간 남기 돈만 건넨 채 며칠을 마을에 머물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이 영화는 삶의 의욕을 읽은 남자가 세상의 끝에서 희망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영상에는 안나푸르나의 거대한 설원, 바람이 휘몰아치는 칼리간다키 강 그리고 퇴락한 성채 같은 자르코트의 모습을 통해 자연만이 줄 수 있는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 최민식은 현지 사전 답사에 참여하지 않고 촬영에 임했다고 합니다. 그가 산을 오르며 숨을 헐떡이고 구토를 하며 괴로워하는 모습은 연기가 아닌 실제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이런 어려움을 겪고 난 후 그는 이야기합니다.

"여기에서 나는 희망을 만난다."

같은 곳을 걷고 있는 그와 저의 바람이 서로 다른 것은 아니겠지요.

무스탕 왕국의 관물 '카그베니'

자르코트를 지나면 카그베니(2740M)가 나옵니다. 마을 주변에는 보리가 푸른색을 띄며 자라고 있습니다. 기나긴 겨울을 견딘 어린 싹들이 세상을 구경하기 위해 목을 내민 모습에서 자연의 신비로움이 느껴집니다. 물과 빛이 있으면 모진 추위와 척박한 토양에서도 싹을 틔우는 것이 생명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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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그베니 모습 무스탕 왕국의 관문 '카그베니'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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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그베니는 은둔의 왕국 '무스탕'에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무스탕 왕국은 칼리간다키 강이 발원하는 곳으로 히말라야 중부 산악 지대에 있는 가장 오래된 왕국입니다. 지금은 명맥만 유지하고 있으며 이곳을 여행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허가서와 많은 비용을 지급해야 합니다.

카그베니에서 점식을 먹었습니다. 저는 볶음밥을 주문하였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점점 식욕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몇 번의 트레킹 경험이 있음에도 네팔 음식에는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습니다. 식사 때만 되면 무엇을 먹을까 하는 것이 가장 큰 걱정입니다. 여행을 잘하는 방법은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것인데 먹는 것이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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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리간다키 강 안나푸르나와 다울라기기 사이의 계곡 모습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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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솜까지는 칼리간다키강을 따라 내려가야 합니다. 바람이 점점 거칠어지며 흙먼지 때문에 눈을 뜰 수 없습니다. 아침에는 잠잠했던 바람이 오후가 될수록 더 심해집니다. 공항이 있는 좀솜에서는 바람 때문에 비행기도 오전 11시가 넘으면 이착륙이 금지됩니다.

좀솜(2720m)에 도착하였습니다. 공항, 관공서, 군부대, 경찰서 등이 상주하는 좀솜은 안나푸르나 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마을입니다. 갑자기 만난 도심 모습에 적응이 되지 않습니다. 이곳에서는 버스나 비행기를 이용하여 트레킹의 종착지인 포카라로 이동할 수도 있습니다. 안나푸르나 라운딩이 점점 편리해지고 기간 또한 짧아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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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항 좀솜 공항 모습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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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은 "As you like it"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트레킹에서 이동과 숙소의 결정은 가이드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경험 많은 가이드는 난이도와 트레커의 상태를 감안하여 일정을 결정합니다. 가이드가 내일을 생각해서 다음 마을인 마르파(2670m)까지 가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합니다.

네팔 사과의 수도 '마르파'

좀솜에서 마르파가는 길은 트레커와 주민이 함께합니다. 개발이 진행되면서 버스와 지프차가 가끔 왕래합니다. 먼지 날리는 신작로를 걷는 것은 먼지 때문에 무척 힘듭니다. 버스의 유혹이 있지만 두 시간을 걸어 마르파에 도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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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파 마르파 이정표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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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은 나무 한 그루 자라지 못하는 까막득한 절벽을 등지고 칼리간다키강을 바라보는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마을 주위에는 과수원이 보입니다. 지금을 철이 지나 을씨년스럽지만 마르파는 사과의 고장입니다. 마을 규모는 크지 않지만 매서운 추위를 막을 수 있는 단아한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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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 정경 마르파 마을 모습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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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수원과 들판 마르파 주변 모습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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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트레킹 거리는 21km입니다. 트레킹을 시작한 후 가장 많이 걸었습니다. 해발도 3800m에서 2670m 로 내렸습니다. 바람 때문에 힘들었지만 내리막길이 계속되어 가능했습니다.

사과 브랜디로 저녁을 대신하였습니다. 주민들이 직접 만든 브랜디는 알콜 농도가 25도 이상으로만 표기되어 있습니다. 애플 브랜디는 히말라야의 빛과 물이 빚어낸 사과로 만들었습니다.

브랜디 한 잔에 몸과 마음 모두가 이완되며 편안한 저녁을 맞습니다.

 

히마라야 설산을 누비는 청전스님-.jpg

히말라야 설산을 누비는 청전 스님



<히말라야 도사의 히말라야에서 밤을 맞다>

  

험로를 한달음에 가게 한 “니째 도 키로!”(이 킬로만 더 가요)


‘히말라야 도사’ 청전 스님이 한국에서 온 백수 산사람과 함께 희말라야 산행길을 나섰다. 매상을 올리기 위해 20킬로를 2킬로라고 속인 찻집 주인 말만 믿고 한 산행에서 밤 11시까지 헤매다 목적지에 도착해 먹은 밥 한그릇은 진수성찬보다 꿀맛이었다.

 

“때론 나를 속이고 기만하는 것조차 내가 험고를 넘어설 수 있는 에너지가 될 때가 있다. 찻집 아저씨의 그 말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20킬로가 넘는 길을 한달음에 갈 수 있었을 것인가.”

 

 

 산을 좋아하다가 아예 공무원까지 내던지고, 무작정 히말라야 품안에 살아보겠다고 작심한 분이 다람살라로 찾아온 적이 있다. 자칭 전국백수연합회 회장이라는 이재환씨였다. 그는 한국의 웬만한 산을 다 올랐고, 백두대간 종주도 두 번이나 했다니 산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람살라에 오기 전 네팔의 이름난 트레킹 코스들을 돌고, 티베트의 성산 카일라스를 두 번이나 순례를 해 히말라야에도 이골이 난 사람이다.


 히말라야 산행은 한 구간만 가려고 해도 열흘이 넘는 일정이어서 텐트와 먹을 것 등짐이 많아 고역이다. 그런데도 그때 둘이 죽이 맞아 다람살라 뒷산 트리운드로 올라갈 때 가장 가기 어려울 듯 보이는 지점을 목표로 길을 나섰다. ‘바라방갈’이란 산동네였는데, 이 일대 히말라야에서도 최오지다.


 해외 등반가들이 다니는 유명 루트가 아니니 코스에 대한 정보도 전무하다. 천행으로 사람을 만나면 물어물어 가는 원시적인 산행 외엔 방법이 없는 길을 무작정 떠난 것이다. 


 4340미터 고지인 인드라하라 패스를 넘을 때부터 첫 고비가 닥쳤다. 느닷없이 눈과 우박이 내렸다. 둘은 조그만 바위틈새에 몸을 웅크리고 눈이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 그런데 등산로보다 하산로가 훨씬 위험했다. 우박과 눈으로 길이 얼어붙어 버렸다. 아이젠 없이 지팡이 하나에만 의지해야 했기에 급경사에서 미끄러지면 수백미터 벼랑으로 떨어져 주검을 찾을 수도, 천도재도 지낼 필요가 없는 황천행이었다. 콧김이 얼어붙는 날인데도 미끄러운 발끝의 촉감 때문에 생땀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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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드라하라패스에서 청전 스님과 이재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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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의 설산



 

 




 그렇게 산행중에 비박을 하며 이레 만에 도착한 마을이 다라리였다. 처음 목표로 한 바라방갈에 이르기 전 마지막 마을이었다. 다라리 사람들은 자기 마을로 찾아든 외지인을 처음 본 듯이 신기해하며 둘레에 모여들었다. 손짓 발짓으로 배가 고프다는 시늉을 하자 철 이른 사과를 따주었다. 천도복숭아가 그보다 맛이 있을까? 지금도 사과하면 다라리 산골에서 먹은 그 사과향으로 인해 군침이 돈다. 내리 두 개의 사과를 껍질째 우적우적 씹어 삼키고는 인도돈 십 루피를 주었다. 하지만 신인 듯 길손을 맞이하는 산골 동네 사람들이 돈을 받을 리 없다.


 필자는 산골마을에 다닐 때는 언제나 한국의 지인들이 보내주는 진통제와 연고 항생제 등 의약품을 배낭 가득히 담아간다. 그날도 저녁을 물린 뒤 마을 사람들이 아프다는 부위에 따라 상비약을 나눠주었는데, 산 너머에 산다는 50대쯤의 남자가 자기 아내가 많이 아프다면서 이곳에 데려올 테니 가지 말고 꼭 기다려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주일 넘는 산행중 만난 산골 사람들에게 약을 다 나눠줘 버린 뒤였다. 부인이 아파도 의약의 혜택을 받을 길이 없어, 나를 신의처럼 믿고 산 넘고 물 건너 아내를 데려오겠다던 그 오지인의 순박하고 안타까운 말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이튿날 바라방갈까지 거리를 물으니 ‘십 킬로미터’란다. 해 지기 전엔 도착하기 위해 이른 아침 서둘러 길을 나섰다. 그런데 날이 어둑어둑해지는데 이제나저제나 했지만 마을이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산이라면 이골이 난 나나 이재환씨 걸음으로 10시간 이상을 달리다시피 했으니 족히 20킬로 이상은 갔을 성싶은데도 첩첩산중일 뿐이었다. “왜 이 먼길을 10킬로라고 했을까”라고 부아가 치밀었지만, 문명인들의 거리 개념 없이 자기들의 어림짐작으로 쉽게 내뱉는 오지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알아들은 우리가 바보였다. 


 해가 지면서 비까지 내려 옷도 흠뻑 젖어서 추워 떨렸다. 그러니 전등을 켜고라도 기어코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산행 중 산골마을 가게에서 산 건전지가 얼마나 오래됐는지 깜박깜박하더니 채 1분도 안 돼 꺼지는 게 아닌가. 아마 가게에 들여놓은 지 10년도 더 지나 자연 소모된 건전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날이 칠흑처럼 어두워 더 이상 한 발도 더 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진 자리 마른자리 가릴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텐트를 치고 요기를 할 엄두도 못 내고 춥고 배고픈 상태로 지쳐서 잠에 곯아떨어졌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 해가 떠오른 뒤에야 미숫가루로 간신히 연명만 하고 또 길을 재촉했다. 


 그 길엔 태고 적 전나무 숲이 하늘과 땅을 뒤덮고 있었다. 그 숲을 벗어난 순간 도연명이 말하는 별천지 같은 풍경이 나타났다.  너와 지붕으로 엮어진 마을이었다. 수십 년 전 강원도 삼척이나 정선지방 산골 순례 길에서 보았던 것과 다름없었다. 


그 사이 굴뚝에선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해발 2550미터의 깊고 깊은 산골에 이런 마을이 숨어있었다니. 입이다물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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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전 스님과 히말라야의 양치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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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오지의 소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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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전 스님(뒷쪽 맨왼쪽)과 다라리 마을 주민들



 바로 바라방갈마을이었다. 놀랍게 이곳에도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가 있었다. 그런데 겨울방학이 6개월이라고 했다. 겨울이면 추운 이곳에서 머물러 있을 교사가 없어서였다. 이른 가을에 하산한 교사가 눈이 녹는 5월께 산을 넘어오는 날이 개교 날이었다.


 이 아름다운 마을에서 이틀을 지냈지만 무리한 산행으로 지친 몸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그래서 엿새가 걸리는 5050미터 고개의 타인투 패스를 피해 4700미터 고개인 탐사르 패스를 택해 넘었다. 그 고개에서 예상치 못하게 눈밭에 청정한 호수가 있어서 그야말로 ‘하늘 호수인가’ 몇 번이고 다시 봐야 했다.


 그러나 선경이 주는 기쁨은 잠깐이고 또 한발 한발의 고행길이 이어졌다. 간신히 고개를 넘으니 허름한 찻집이 있다. 여름철에 곡식이나 생필품을 나르는 마부들의 중간 숙박처로 밥과 짜이(밀크티)를 파는 곳이다. 그곳에서 짜이를 한 잔 시켜 마셨다. 그런데 아직도 해가 많이 남아 이곳에서 숙박하기보다는 더 하산하기로 하고 찻집 아저씨에게 “얼마나 더 가야 다음 숙소가 나오느냐”고 물으니 “니째 도 키로(2킬로만 더 가요)”라고 답한다. 2킬로면 잰걸음으로 반 시간이면 족했기에 날 듯이 길을 나섰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2킬로면 나온다던 집은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더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밤하늘에 별이 총총 나있어서 희미하나마 그 별빛을 등불 삼아 한발 한발 내 디뎠다. “이놈의 ‘니째 도 킬로’가 도대체 어찌 된거냐”고 한탄하면서.


 마침내 밤 열 한시가 되어서야 구원의 빛이 저 멀리 눈에 띄었다. “이제 살았네!” 하고 들어가니 그 찻집 아저씨가 말한 바로 그 집이었다. 그때야 모든 게 이해가 되었다. 바로 그 아주머니는 그 아저씨의 아내였다. 우리를 자기 집에서 밥을 먹이고 재워 매상을 올리려고 이십여 킬로를 줄여 이 킬로라고 말했다는 것을. 그날 밤 12시가 되어서야 먹은 밥 한 그릇과 야채 한 그릇은 어느 진수성찬보다 맛이 있었다. 그런 꿀맛이 어디 있을까. 다음날 아침 길을 떠나면서, 다람살라에서 비상음식을 싸오느라 챙겨온 플라스틱통과 잡동사니들을 모두 내주었다. 산골에서 긴요한 세간살이를 얻자 아주머니는 다 빠진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다.


 그 후로 이재환씨와 몇 번 산행을 함께했는데, 험한 고개를 넘을 때마다 “니째 도 키로!”를 박자 맞추듯 내뱉으면 웃음이 터지고 없던 힘이 났다.


 고지를 넘는 것과 같은 힘든 과정이 없는 인생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때론 나를 속이고 기만하는 것조차 내가 험고를 넘어설 수 있는 에너지가 될 때가 있다. 그래서 고통이 곧 행복의 씨앗이 된다. 그때도 찻집 아저씨의 그 말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20킬로가 넘는 길을 한달음에 갈 수 있었을 것인가. 지금도 힘든 여정을 만나면 찻집 아저씨의 말이 저절로 주문처럼 되새겨진다.


 “니째 도 키로!”


  청전 스님





 조현이 히말라야에서 만난 청전  스님

 

 ‘휴심정’ 벗님글방 필자 가운데 청전 스님의 글을 1번으로 택한 것은 청전 스님의 산행기가 결코 남 얘기처럼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신학대학에 다니다가 송광사(전남 순천)로 출가해 25년째 달라이 라마를 스승으로 히말라야에서 수행중인 그를, 사람들은 ‘히말라야 도사’라고 부릅니다. 포터들에게 배낭과 먹을 것까지 양껏 지우고 귀족 산행을 하는 일부 산악인들과 달리 오지인들에게 줄 상비약까지 등에 지고 아무도 가지 않은 산길을 달리는 그를 보면 그런 말이 과언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제가 청전 스님을 우연히 만난 건 11년 전 신문사를 1년 쉬고 인도를 순례하던 중 다람살라에서였습니다. 그때 오지 중의 오지라는 스피티 등을 함께 순례하며 한 달을 함께 보냈지요. 


 3년 전엔 한 달간 라다크를 순례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고개인 싱고라를 함께 넘기도 했습니다. 청전 스님은 이제 60살이니 이팔청춘이 아니지만 산에 가면 여전히 펄펄 납니다. 갈림길에서 앞서 가던 그가 보이지 않아 애타게 부르며 당혹해 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지요. 라다크에선 고산병에 시달리며 지쳐 떨어지자 “설산에 묻어버리고 가겠다”며 제 분기를 자극해 다시 산을 기어오르게 한 분이지요. 


 그러나 병에 걸려도 의약품 구경도 못하는 오지인들의 아픈 곳을 쓰다듬으며 약을 주는 그를 히말라야인들은 ‘산타클로스 스님’이라며 좋아합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면 어김없이 공중파 방송국에서 다큐멘터리 출연을 의뢰하지만 “수행자가 그런 데 얼굴을 내밀면  좋지 않다”며 한 번도 응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그가 휴심정 독자들에게만 무주상글보시를 해주고 있습니다.


 조현 기자 cho@hani.co.kr


 



    *이 글은 <한겨레> 지면 6월 5일자 25면에 나간 것입니다

 

 

 

 

"쟁기와 칼은 손의 확장이다. 그러나 책은 그 이상이다. 책은 기억의 확장이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장석주의 <취서만필>은 여러 날 전에 읽었지만 읽고 싶은 책이 많아 두 권의 책을 더 읽고 난 후에야 노트 정리를 하였다. 도서관에서 빌려 보는 책은 여러 가지로 제약을 받는다. 무엇보다도 마음대로 밑줄을 칠 수도 없고 깨알 같은 글씨고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어넣지도 못한다. 어쩌다가 연필로 밑줄을 표시 하고 보면 책을 돌려 줄 때가 되면 지우개로 지우느라 애를 먹는다. 역시 책은 사 봐야 한다. 그런데도 다 사볼 수 없으니 여전히 빌려본다. <취서만필>은 먼저 빌려 읽고 다시 구입했다.

 

 

 

시인이며 비평가요 2만 권의 장서가요 독서광인 장석주의 <취서만필>(부제: 책에 취해 마음 가는 대로 쓰다)은 독서편력기다.

제1부 '책, 사소함에 취하다'에서부터 제4부, '책 예술에 취하다'까지 수많은 작가들과 책을 장석주의 잘 요리한 안내로 만날 수 있다. 그의 글은 한편 한편에서 동·서양을 아우르는 방대한 지식과 깊은 사유 속에서 건져 올린 지성과 감성으로 엮은 글들에 깊이 빠져든다.

그는 한 해에 수백 권의 책을 사서 읽는 독서광인가 하면 또한 한 해에 다섯 권 안팎의 책을 집필하는 왕성한 창작열을 내뿜는다. 그가 어떤 책을 읽어왔는지, 얼마나 책을 좋아하는지 그가 읽은 책을 어떻게 소화시키고 글을 써왔는지를 장석주의 독서일기를 통해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저자가 소개한 책들은 모두 읽고 싶은 생각이 들 만큼 결코 가볍지 않은 책 읽기와 사유의 깊이와 글에 장석주의 글은 매료되고 만다. 그의 글맛을 한 번 보면 자꾸만 그의 저서를 찾아 읽고 싶게끔 만든다.

저자의 다른 책 <고독의 권유>에서 "나는 침묵, 견고한 책상, 펜과 백지, 나만의 시간, 무서운 집중력들을 꿈꾼다. 인류에게 유익한 그 무언가 경이로운 것은 거의 모두 정금과도 같은 순도 높은 자기만의 시간에서 탄생한다"고 했듯이 그런 가운데 태어난 글들이리라.

역시 같은 책에서 그는 "나의 혈관을 흐르는 피와 근육들은 책의 자양분에 의해 형성된 것들이다. 책은 나의 유일한 학교였다. 그것은 획일화된 규율과 책임을 강요하지 않는 학교다. 사람이 저마다 타고난 인격, 개성, 자유의지를 존중하고, 어떤 억압도 정당화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탁월한 학교였다"라고 썼다.

이 책에서 장석주가 소개한 작가와 저작들 중에 유독 관심을 끈 것은 책에 미친 사람들이었다. 보르헤스, 알베르토 망구엘, 조선 후기의 북학파 실학자인 이덕무, 다치바나 다카시…. 쉰여덟 번째의 생일을 보낸 뒤 완전히 실명했다. 그러나 실명이 그의 '책을 향한 열망'을 꺾지는 못했다. 눈이 먼 보르헤스는 책을 읽어 줄 사람을 구했고, 서점에서 소년 알베르토 망구엘이 발탁되었다. 뒷날 망구엘은 이렇게 썼다.

"보르헤스에게 현실의 정수는 책 속에 있었다. 책을 읽고, 책을 쓰고, 책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그 알멩이였다. 그는 수천 년 전에 시작돼서 한 번도 끝난 적이 없는 대화를 이어가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인식했다." ('보르헤스에게로 가는 길' 중)

조선시대 후기 북학파 실학자 중의 한 사람인 이덕무는 21세가 될 때까지 하루도 선인들의 책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온갖 서적을 두루 구해 읽었는데 평생 읽은 책이 2만 권이고 손수 베낀 책이 수백 권이다.

집은 비바람을 채 가리지 못할 정도였고, 끼니조차 자주 거를 정도로 이덕무는 가난했다. 오죽하면 한겨울에 자다가 일어나 이불 위에 <한서> 한 질을 덮고 <논어>를 매서운 바람이 들어오는 곳에 병풍처럼 세워 주위를 막았을까. 그런 가난 속에서도 책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은 이덕무는 마침내 나이 39세가 되던 해 규장각 초대 검서관에 임명되었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일본에서 명실공히 최고의 지식인으로 꼽히는 사람이다. 그는 명문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에 들어갔지만 3년 만에 짐을 싸들고 나온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점점 산더미처럼 쌓인 책들을 읽어치우지 못하게 되었다… 읽고 싶은데 읽지 못하는 책들이 책장 가득히 꽂혀 있는 것을 매일 바라보기만 한다는 것은 심한 고통이었다"라고 했다. 장석주 역시 독서광이다. 그의 본격적인 독서편력은 20세 때 시작되었다고 '나의 독서편력기'에서 쓴다.

"나는 시립도서관에서 전가통의 세계를 꿈꾸고, 동과 서, 옛것과 새것들을 두루 찾아 읽으며 그것을 향해 한 발 한 발 내딛는 청년시절을 보냈다. 어깨너머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던 시립도서관의 참고 열람실에서 이루어진 책읽기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희망 없는 내일과 궁핍이 의식을 옥죄었지만 날마다 책들을 읽는 것으로 그 고통을 견뎌냈다.

20대후반부터 30대 후반까지 생업에 전력투구하던 시절은 아주 암울하고 빈곤한 시절이다. 반가통의 독서로 겨우 연명하고, 늘 알 수 없는 결핍감과 불행한 느낌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생업에서 풀려 나온 뒤로 나의 독서편력은 다시 활력을 찾고 풍요로워졌다. 특히 지난 10년 동안에는 책에 온전히 몰입해서 수천 권의 책들을 읽고 수십 권의 책을 썼다. 나는 날마다 책 한 권 읽기를 실천하는 원칙을 따르려고 애쓴다."(p378)

그에게 있어 책 읽기는 '하루도 쉬지 않고 책을 한 권이나 두 권씩 읽어치우는 것은 책 읽기에서 찾는 즐거움'이라고 말한다. '나는 읽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저자는 또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부지런히 책을 구해 읽었으니, 이것은 책으로 유폐하는 것이요, 책으로 망명하는 것이고, 책 속의 위리안치였다. 나는 기꺼움으로 그 운명을 받아들인다. 하루에 여섯 시간, 때로는 그보다 많은 시간을 책 읽는 데 바친다. 어느 날은 세끼를 먹는 시간도 아까워 두 끼만 먹고 종일 책을 붙들고 읽는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정한, 급하게 처리해야 할 아무 업무도 없는 그런 오롯한 자유, 손발을 부지런히 움직여 나를 조각조각 쪼개 분주함 속에 흩뿌리지 않아도 되는 오직 나만을 위해 쓸 수 있는 집중력 속에서 책을 읽는 게 행복했다. 그 행복이 덧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다른 무엇과 바꾸고 싶지 않았다."

"나는 책을 읽는 사람이다. 쉬지 않고 읽는다. 읽음으로써, 나는 존재한다. 나는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책을 먹고 산다. 책의 성분 요소들인 질료들과 날짜와 속도들을 먹고 산다. 그렇게 함으로써 책이라는 다양체를 내화한다. 나는 하나의 이성, 하나의 주체가 아니라 다양한 이성, 여러 개의 주체다. 차라리 흩뿌려진 점들, 차이의 유목민들이다. 책은 하나의 점이며, 점들로 이루어진 선이다. 나는 그 점과 점들을 잇는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또 한 번 책에 미친 사람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 독서광 즉 책에 미친 사람은 많고 많다는 것을 알았고 책을 어떻게 깊이 읽고 어떻게 내재화시켜서 자기 것으로 만들고 풀어내는지 새롭게 발견하는 시간이었다. 독서일기나 서평쓰기 등 작가마다 다양하게 접근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는 좋은 한 예였다.

책에 미친 사람들은 많고도 많아 나는 감히 그 축에 낀다고 말도 못할 정도다. 책에 미친 사람들의 독서편력기는 흥미진진하다. 그들은 어떻게 책을 읽어왔고 어떤 책을 읽고 있는지, 그들에게 책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문자를 해독하게 된 이후로 끊임없이 책을 읽어왔지만 지난 10년은 특히 책읽기 시간이 더 늘고 집중은 더 높아졌던 세월이 분명하다.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가택연금을 선택했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유폐된 상태에서 그저 책만 읽었다. 카프카는 말한다. "만약 우리가 읽고 있는 책이 정수리를 내려치는 타격으로 우리를 깨우지 않는다면, 그걸 무엇 때문에 읽어야 하겠어?" 그렇다. "우리 내부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는 책"만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나는 부지런히 책을 구해 읽었으니 이것은 책으로 유폐하는 것이요 책으로 망명하는 것이고, 책 속의 위리안치였다. 나는 기꺼움으로 그 운명을 받아들인다. 하루에 여섯 시간, 때로는 그보다 많은 시간을 책 읽는 데 바친다."(p38~)

아무도 간섭하지 않고 간섭받지 않는 칩거 속에서 오롯한 시간을 독서에 바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장석주의 책읽기의 뜨겁고도 차가운 열정을 맛보는 시간이었다. "나는 책을 읽는 사람이다. 쉬지 않고 읽는다. 읽음으로써, 나는 존재한다." "세계는 거대한 사막이고 책은 오아시스다. 나는 오아시스를 찾아 사막을 횡단하는 여행자다" 나도 책을 먹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1일1식…"꼬르륵 소리 나면 건강"

SBS스페셜, '1일1식' 실천 신혼부부 소개

 
1일1식(내 몸을 살리는 52일 공복 프로젝트).ⓒ News1

하루에 한 끼만 먹는 '1일 1식' 식사법이 소개됐다.

10일 방송된 'SBS 스페셜 - 끼니 반란 Stay hungry. stay healthy' 1편에서는 일본의 나구모 요시노리 박사가 전파해 유명해진 '1일 1식'을 지키는 사람들의 일상을 공개했다.

5개월째 1일 1식 식사법을 따르고 있는 심승규(35), 김은아(31) 부부의 일상은 남들과 달랐다.

이들은 아침에 일어나 물 한잔을 마시고, 점심 시간에는 회사 도서관에 가 책을 읽거나 차 한잔만 마셨다.

 
이들의 유일한 식사시간은 저녁. 한끼에 부족한 영양을 보충해야 해 밥과 반찬의 영양 균형에 신경을 쓴다는 게 이들의 원칙이다.

푸드스타일리스트인 김씨는 "평소 소식 습관을 지켜오던 남편 심씨의 식습관을 따라하게 된 게 1일 1식의 계기가 됐다"며 "실천하길 잘한 것 같다"고 말했다.

김씨는 하루 한 끼 식사와 적당한 간식 섭취, 공복을 생활화하며 되도록 완전식품을 먹고 골든타임(밤 10시~새벽 2시) 수면을 지키라고 제안했다.

하루 세 끼가 아닌 하루 한 끼 식사가 오히려 건강을 지켜준다는 '1일 1식'은 공복일 때 장수 유전자인 시르투인 유전자가 활동하면서 건강해지고 수명이 늘어난다고 주창해 화제를 모았다.

'1일 1식'의 저자인 나구모 요시노리 의학 박사는 "영양을 계속 섭취해야 건강하다는 생각은 낡은 사고방식"이라고 단언하며 "공복 상태에서 '꼬르륵' 하고 소리가 나면 몸이 젊어지는 효과가 있다"고 주장했다.

[우먼 동아일보 컬처]이지현의 아주 쉬운 예술이야기 “피카소, 그 녀석이 다 해 먹어서 할 게 없어” 반항아의 상징 잭슨 폴록의 ‘넘버 5’ 들여다보기! 잭슨 폴록 ‘넘버 5’
기사입력 2013-03-05 11:27:48


“모든 인간에게는 일생 쓰고 죽어야 하는 ‘지랄’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
경북대 김두식 교수의 저서 ‘불편해도 괜찮아’에 소개된 이 말을 들었을 때, 너무 공감이 돼 속이 다 후련해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춘기에, 그 시기를 그냥 지나간 사람은 늦바람이 나서, 또 어떤 사람은 총량이 커서 평생 주어진 지랄을 쓰면서 산다는 것이죠.
이상과 현실, 마음과 몸이 따로 놀아 세상을 향해 반항한 작가, 잭슨 폴록. 그의 유명한 작품 ‘넘버 5’입니다. 물감을 뿌리고 튀기는 기법을 처음 시도했는데 당시 평론가들조차 “머리카락 뭉치, 카타르시스의 분열”이라며 난해해했던 작품이죠.
지금은 ‘넘버 5’가 최고의 경매가를 기록할 만큼 비싼 그림이지요.
잭슨 폴록이 이름을 알리기까지는 방황과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 가출해 어머니가 다섯 아들을 어렵게 키웠습니다. 미술학교를 중퇴한 후 형들과 무작정 뉴욕에 갔지만 경제 공황기였던지라 매우 가난하게 지내야만 했죠.

 


온몸을 움직여 캔버스에 물감을 뿌리는 ‘액션 페인팅’ 작업
폴록은 누구 못지 않게 미술에 대한 열정이 있었지만, 스스로 “기교도 뒤떨어지고 드로잉도 할 줄 모르는 작가”라고 자학했습니다. 또, “피카소, 그 녀석이 다 해 먹어서 할 게 없다”며 열등감을 표현하기도 했죠.
잭슨 폴록은 알코올 중독, 정신 질환, 동성애 성향으로 구설수에 자주 오르내렸습니다. 파티에서 식탁을 뒤엎는가 하면 친구 전시에서 그림을 찢으며 난동을 부리기도 했죠. 개인전이 성공을 거뒀지만, 정신질환에 시달려 화가이자 자신을 보살펴준 아내도 떠나갔습니다. 결국 만취 상태에서 교통사고로 44세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쯤 되면 캔버스에 물감을 끼얹고 뿌리며 작업한 그의 작업방식, 붓이 아니라 몸을 움직여 그리는 ‘액션 페인팅’이 그냥 나온 기법은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그의 아내는 “폴록이 물감을 흩뿌리는 작업은 괴로워서 내는 신음소리와 같았다”고 했는데, 아마도 상처를 치유하는 자기만의 방식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림을 사심 없이 보면 기분이 좋을 텐데, 사람들은 일부러 복잡한 것을 즐기나보다” 라고 한 잭슨 폴록의 말에서 세상을 향한 괴리감을 짐작해 봅니다.
짧은 생애를 반항적으로 살았던 폴록은 그에게 주어진 지랄 총량을 다 썼을까요? 누군가에게 지랄은 규정된 선을 뛰어넘는 시도이자 자신의 욕망을 들여다보는 귀한 시간일 겁니다.
억눌린 욕망의 에너지. 여러분은 어디에 어떻게 숨겨놓고 있나요?

글·이지현(‘예술에 주술을 걸다’ 저자 mimicello@naver.com)


 


 

 

 

 

중앙일보//‘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말을 새삼 되새기게 되는 연말이다. 새해 달력을 챙기고, 내년치 수첩도 새로 구해 식구들 생일이나 각종 아이디·비밀번호, 은행 계좌번호 따위를 틈틈이 옮겨 적고 있다. 나는 과연 생각하는 대로 살아왔는가. 아니면 사는 대로 생각해왔는가. 연초부터 지금까지 온갖 메모로 빽빽해진 올해 수첩을 보면 그저 휘둘리며 살았을 뿐 나 스스로의 생각대로 신선하게 지낸 날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다.

 대학시절 성경을 읽다가 눈에 꽂혀 자계(自戒)의 문구로 삼은 구절이 있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어리석은 자는 그 어리석은 짓을 거듭 행하느니라’(잠언 26장 11절). 무언가 목표를 세워도 대부분 작심삼일(作心三日)로 끝나고, 나쁜 습관은 반대로 고칠 줄을 모르는 자신에 대한 경계였다. 그러나 수십 년 세월이 흘렀어도 ‘토한 것을 도로 먹는’ 한심한 행태는 개선될 기미가 없다. 이제는 성경 구절의 효용이 자계인지 자조(自嘲)에 있는지 헷갈릴 지경이다. 흡연 습관만 해도 그렇다. 매년 1월 1일 금연 결심을 했다가 곧 무너지고, 이어서 설날, 내 생일, 무슨 기념일 하는 식으로 퇴각만 거듭하다 한 해가 저문다. 어쩌다 석 달간 금연한 적이 있지만 100일을 못 채우고 동굴에서 뛰쳐나간 의지 약한 호랑이 꼬락서니이긴 마찬가지다.

 사실 습관은 뇌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려는 본능에 따른 것이다. 미로 끝에 먹이를 두고 쥐에게 길을 찾아가게 하면 처음엔 뇌 활동이 매우 활발하다. 그러나 길 찾는 데 익숙해지면 뇌의 움직임도 줄어든다. 굳이 에너지를 낭비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일련의 행동이 기계적인 습관으로 바뀌는 과정을 학자들은 청킹(chunking·덩이 짓기)이라 부른다고 한다. 우리 일상생활은 대부분 신호-반복행동-보상의 3단계를 거쳐 형성된 행동 덩어리, 즉 습관이 지배하고 있다(찰스 두히그, 『습관의 힘』).

 문제는 뇌가 좋은 습관과 나쁜 습관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공기를, 물고기가 물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듯 습관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기 일쑤다. 행동만 그럴까. 생각에도 습관이 스며든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생각하던 대로 생각하면 머리가 편하다. 편한 데 익숙해지면 세상과 사물의 본질을 파헤치는 수고로움을 점차 꺼리게 된다. 생각이 다른 사람의 얘기는 듣기조차 싫어진다. 사서 피곤해질 이유가 없으니 말이다. 올 한 해 우리 사회를 지배한 집단사고 간의 격렬한 대립의 배경에도 생각을 습관에 맡겨버리는 몰(沒)지성, 몰성찰이 깔려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다투는 주제마다 합의점을 찾기는커녕 지루한 동어반복 싸움만 되풀이됐을 리 없다.

 

 

식도락가도 빠져드는 '1일 1식' 열풍
다이어트와 건강 모두 챙기자는 것
세 끼 식사하는 건 의외로 짧은 전통
한 세기 전 산업화와 함께 정착해…
몇 끼 먹느냐 노심초사하기보다는
약간 모자란 듯 규칙적 小食·절제를

극(極)과 극은 통하는 걸까. 식도락(食道樂)을 즐기는 이들 사이에서도 ‘1일1식(一日一食)’이 화제다. ‘공복(空腹) 상태일 때 생명력이 솟구친다’고 주장하는 일본 의사 나구모 요시노리가 쓴 책이 출간되면서, 한국에서도 하루에 한 끼만 먹어 다이어트와 건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자는 열풍이 불고 있다. 하지만 많은 이가 ‘하루 세 끼라는 전통 식사법에서 벗어나도 과연 괜찮을까’ 의심하고 걱정한 것도 사실이다. 하루 세 끼를 먹는 것이 과연 전통적인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인류의 식사 시간을 조사해봤다.

결론적으로 하루 세 끼는 그리 긴 전통이 아니었다. 비교적 최근에 정착된 식습관이다. 고대 로마에서는 보통 하루에 한 끼만 먹었다. 로마인들은 소화가 잘 돼야 건강하다고 봤다. 하루에 두 끼 이상 먹으면 해롭다고 생각했다. 흔히 ‘저녁 식사(dinner)’로 번역되는 ‘세나(cena)’를 푸짐하게 먹고 나머지 두 끼는 먹지 않거나 빵 조각 따위로 간단히 때웠다. 저녁 식사라지만 지금처럼 오후 늦게 먹지 않고 정오쯤에 먹었다. 한 끼로 절제하는 건 귀족 등 부유층에 해당하는 이야기였고, 절대다수였던 평민은 아마 한 끼밖에 먹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식습관이 그대로 이어졌는지, 이탈리아에서는 지금도 아침 식사를 에스프레소 커피 한 잔과 비스킷 또는 빵 한 조각으로 가볍게 때운다. “아침 식사를 거하게 하는 건 건강에 좋지 않다”고 믿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19세기까지 대개 조석(朝夕)으로 하루 두 끼 식사가 일반적이었다. 먹을 게 부족했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상 너무 먹어서 비만을 고민한 시기보다 먹거리가 부족해 기아에 허덕였던 시기가 훨씬 길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식사 시간은 다른 생활 습관과 마찬가지로 태양에 의해 정해졌다. 전기가 없던 시절이니 해가 지기 전 모든 일을 처리해야 했다. 등잔불을 밝히려면 값비싼 기름이 필요할 뿐 아니라, 등잔불을 켜더라도 그리 밝지 않아 햇빛이 훨씬 나았다. 해가 뜨면 일어나 간단히 요기하거나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로 밭에 나가 일했다. 저녁은 해지기 전에 먹었다.

 

조선시대 농부들은 새벽 일찍 아침을 먹고 해질 무렵 저녁을 먹었다. 보리밥에 묽은 된장국, 나물 따위가 식사 내용이었다. 노동량이 많은 농번기에나 새참을 낮에 먹었다. 점심은 ‘마음(心)에 가볍게 점을 찍는다(點)’는 본뜻처럼 먹을 수도, 먹지 않을 수도 있는 가벼운 식사 또는 간식이었다. 하루 두 끼 식사는 왕이나 양반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의 왕들이 하루 다섯 번 먹었다지만, 정식 수라는 오전 10시경 아침 수라와 오후 5시경 저녁 수라 두 번이었다. 두 끼 식사는 최근까지도 계속됐다. 일부에선 하루 세 끼를 먹을 수 있게 된 건 보릿고개가 사라진 1970년대 이후라고 말한다.

유럽의 사정도 그리 낫지 않았다. 중세 농부들은 아침에 일어나 거의 먹지 않고 밭에 나가 대여섯 시간 일하다 오전 10~11시쯤 집에 돌아와 식사했다. 가장 풍성하게 먹은 게 이때였다. 그러곤 다시 일하다 오후 4~5시쯤 대충 먹고 일찍 잠을 청했다. 홍차에 과자나 샌드위치 따위 스낵을 곁들여 먹는 영국의 티타임(teatime)도 두 끼만 먹었기에 탄생했다. 아침과 저녁 사이에 허기를 참지 못한 베드포드(Bedford) 공작 부인이 1840년쯤 시작했다는 게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아랍 문화권도 식사 시간은 비슷했다. 다만 과학이 발달했던 지역답게 인간에게 가장 이상적인 식사 시간을 연구했고, 그 결과 ‘2일3식’ 즉 이틀에 세 끼를 먹거나 16시간마다 조금씩 먹는 것이 건강에 이롭다고 주장하는 의학자들도 있었다.

하루 세 끼 식사가 보편화한 건 19세기부터였다.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식사 시간은 자연이 아닌 ‘공장’에 의해 규정되었다. 노동자들은 아침에 출근해 저녁에 퇴근하는 생활을 하게 됐다. 온종일 일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했다. 아침 일찍 식사하고 출근해 일하다가 점심을 간단히 먹고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는 식사 시간이 정착됐다. 가장 여유 있는 저녁 식사가 자연스럽게 가장 중요해지고 풍성해졌다.

하루 세 끼 식사가 절대적으로 옳거나 이롭거나 지켜야 하는 건 아닌 듯하다. 미국 예일대의 음식 사학자 폴 프리드먼은 “인간이 반드시 하루 세 끼를 먹어야 할 생물학적 근거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1식’ 또는 ‘2식’이란 숫자에 집착하면 위험하다. 짧다 해도 수십 년 이상 하루 세 끼 식습관에 익숙해진 몸을 다이어트를 위해 갑자기 한 끼, 두 끼로 줄이면 폭식·과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 번만 먹더라도 열량만 높고 영양이 고르지 못한 패스트푸드 따위를 먹는다면 오히려 해로울 수도 있다. 1일1식 유행의 주인공 나구모씨도 “소식(小食)하는 게 중요하지 하루 한 번만 먹으란 게 아니다”고 강조한다. 외할머니는 과식하는 손자에게 “모자란 듯싶게 먹으라”며 절제를 강조하셨다. 옛 어른들의 지혜는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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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는 발걸음을 함부로 어지러이 걷지마라.

 

 

오늘 아침 나의 발자국은 뒤에 오는 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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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 <1일1식> 열풍 전부터 결식의 철학 실천해온
유영모, 김석희, 김영민, 박세환 등 이야기

두 끼를 버리면 온전한 한 끼를 얻고, 욕망의 무게도 덜어지며, 상차리기가 귀한 노동이 된다

 

 

먹고사는 일이 무거운 당신에게 굶기를 권한다. 지난 9월7일 출간된 <1일1식>이 11월1일까지 6만 부 넘게 팔렸다. 하루 한 끼를 먹으라는 이 책에 이어 10월25일에는 <하루 한 끼 공복의 힘>이라는 책이 나왔다. 두 책은 모두 일본의 의학박사들이 쓴 책이며, 장수 비결은 굶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건강을 위해 하루 한 끼를 다짐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카페 ‘1일1식’ 회원이 1800명을 넘었다. 건강하게 살려고 차라리 숟가락을 놓는 사람들이다.

 

배고픔의 힘, ‘공복력’을 강조하는 주장은 체온 건강법이나 해독 프로그램처럼 입증되기 어려운 수다한 건강 이론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끼니 열풍이 곧 식는다 하더라도 ‘사람은 하루 세 끼를 먹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진작부터 금이 가고 있었다. 사람은 밥을 만들고 밥은 사람을 만든다. 오랫동안 하루 한 끼니를 실천해온 사람들이 있다. 하루 세 끼가 만든 생활에서 벗어나려는 이들이다.

 

“책상물림에게 하루 세 끼는 과분하다”

 

 

한국모바일캐스트 박세환(48) 대표는 2년 전부터 하루 한 끼만 먹어왔다. 어느 날 문득 93kg인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건강을 걱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가 혈압, 당뇨가 있는 걸로 봐서 그도 물려받을 가능성이 있었다. 우선 탄수화물부터 멀리 했고, 먹는 양이 줄자 점심 없는 점심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점심 금단현상을 겪었다”고 말한다. 오후 2시쯤 되면 어지럼증을 느끼고 말할 기운도 없었다. 당뇨병 환자들이 겪는 저혈당 증세처럼 손발이 저리고 정신이 몽롱해질 때도 있었다. 그러나 100년 넘게 내려온 삼시세끼의 습관은 빨리 잊혔다. 일주일이 지나자 오히려 점심을 먹으면 정신이 흐릿해지고 속이 답답해 몸과 마음이 터질 듯한 상태에 시달려야 했다. 2년 전에 비해 10kg이 줄어든 몸무게는 기대한 만큼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시 세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끼니를 줄이자마자 몸은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의 음식이 들어오는 것을 거북해했다. 과하게 먹으면 몸이 비명을 지르는 것이 예민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명경지수라고 해야 하나요. 굳이 참선이나 묵상을 하지 않아도 정신이 맑아지고 가벼워집니다. 웬만한 일에는 동요하지 않을 만큼 마음이 항시 평안하지요.”

 

박 대표의 이력은 독특하다. 그는 2005년 침례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지만 교회를 맡지 않고 기관 목사로 활동해왔다. 2008년부터 모바일 회사를 차려 교회나 마을 커뮤니티, 학교를 위해 공동체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는 일을 해왔다. 그가 하루 한 끼를 통해 얻은 묵상의 내용은 이렇다. “식탐도 탐욕인 것이고 탐욕을 줄여야 한다는 생각, 결국 육체 노동하지 않고 책상물림으로 앉아 있는 이들에게 하루 세끼는 과분하다는 생각, 소비하지도 못하면서 과하게 섭취하는 일은 장기적인 자살이라는 느낌이지요.” 한국 사람들은 하루에 평균 1505g의 음식을 먹고, 2050kcal 열량을 얻는다.(<2010년 국민건강통계>) 일년새 하루 150g 넘게 먹는 양을 늘렸다. 영양 부족은 빠르게 줄어들고 있지만 영양과잉 상태인 사람들은 2010년을 기준으로 20%가 넘는다. 박 대표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내가 활동하는 양만큼만 몸에 채워넣는 것이고, 그건 내 삶의 다른 측면도 다 마찬가지인 것 같다”며 “불요불급하지 않다면 쌓아놓거나 과잉소비할 이유가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고 한다.

 

 

“끼니를 줄이면 욕심이 줄어든다.” 진작부터 1일1식을 해온 사람들의 공통된 경험담이다. 하루 한 끼를 실천하는 모바일 회사를 운영하는 박세환씨와 번역가 김석희, 출판사 문학동네 강태형 대표(사진 왼쪽부터/한겨레 김명진·신소영·윤경진 기자).
짐승의 끼니, 신선의 식사

 

제주도에 사는 번역가 김석희(62)씨도 20년 전 단식을 마치고 나서 하루 한 끼를 시작했다. 위장 질환으로 고생하던 그는 ‘속을 비워서 새살이 돋게 하는 게 좋겠다’는 권유에 따라 단식을 했고, 보식 기간을 거쳐 내친 김에 끼니를 줄였다. 속을 비울수록 속이 편해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끼니 때마다 챙겨 먹는 수고를 덜어낸 생활의 맛을 보았기 때문이다. ‘요리’라는 말은 먹는 준비를 위한 번거로운 노동을 기술적으로 섭취하는 말과 다름없다. 번역이란 같은 일을 하는 부인 조혜경씨와 살며 부부를 위해 생활 습관을 간편하고 소박하게 단장할 이유도 있었다. 밤새워 일하고 새벽 4~5시에 잠드는 그는 정오쯤 일어나서 오후 4시쯤 식사를 한다. 한 시간쯤 산책을 하고 책상 앞에 앉으면 속이 훤하고 머리가 맑아진다. ‘가뜩이나 육지 사람에게는 궁금한 먹을거리들이 많은 제주에서 살면서 끼니를 줄이는 게 어렵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사람이 세끼를 다 먹는다고 해서 모두 즐겁게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답한다. 한 끼만 먹기 때문에 둘만의 식사에 성의를 다한다. 어제 저녁은 제철을 맞은 갈치와 고등어에 김치, 멸치볶음, 오이지를 차려 먹었다. 하루 단 한 끼뿐이기 때문에 상차리는 것도 번거롭기보다는 귀하고 즐거운 노동이 되었다.

 

하루 한 끼만 먹는다면 두 끼는 잃는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거꾸로 두 끼를 버리고 온전한 한 끼를 얻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종교사상가 유영모씨는 세끼를 합쳐서 저녁을 먹는다는 뜻에서 호를 ‘다석(多夕·많은 저녁)’이라고 정했다. 그는 “하루 세끼 음식을 먹는 것은 짐승의 식사법이요, 두 끼는 사람의 식사, 한 끼 음식이 신선의 식사법”이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1941년 2월17일부터 하늘로 돌아간 1981년 2월3일까지 40년 동안 한 끼니를 지켰다고 한다. 그의 제자인 함석헌·김흥호도 평생토록 1일1식을 실천한 것을 보면 한 끼니의 뿌리는 꽤 깊은 셈이다. 다석에게 하루 한 끼만 먹는 일은 마음의 욕심을 줄여 한 점으로 만드는 일이다. 밥이 귀한 줄 몰라서가 아니다. 욕심으로 먹는 것은 “먹고사는 것이 아니라 먹고 죽는 것”이기 때문이다.(<다석 유영모>, 박재순) 현대의 ‘한끼주의자’들은 “사람은 생존의 필요와 몸의 요구를 넘어서 너무 많은 생명을 잡아먹는다”는 그의 말을 알게 모르게 따르고 있는 셈이다.

 

 

때로 비밀이 되는 그들의 한 끼

 

하루 한 끼니를 결심했다면, 배고픔을 견디는 것보다 더 어려운 문제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밥을 먹는다는 것은 시간과 관계를 공유하는 일, 곧 사교를 하는 것이다. 박세환 대표가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가 1일1식을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별나다 생각하고 거리를 둘까 봐” 말을 하지 않는다. 점심 때 약속이 잡히면 먹지는 않으면서 젓가락만 대는 극소식을 한다. 입술만 축이는 셈인데 함께 밥 먹는 이가 아주 예민한 사람이 아니면 잘 눈치채지 못한다. 대신 저녁은 사람들과 어울려서 잘 먹는다. 그러고보면 우리 주위에도 말하지 않는 한끼주의자들이 꽤 있을지도 모른다.

 

저녁 때 하루 한 끼만 먹은 지 13년째. 문학동네 강태형(55) 대표는 어지간히 단련됐지만 “아직도 점심 때 만나자고 하면 그 전날부터 몸이 긴장될 정도로 싫다”고 했다. 점심 식사를 거절하지 못했다면 저녁은 과일과 채소로 때운다. 그마저도 안 먹었으면 하는데 저녁 때 먹는 습관 때문이다. 그가 ‘하루 한 끼’를 시작한 것은 2000년 1월부터다. 욕심을 줄이고 싶어서 식사를 줄였단다. “음식이 덜 들어가면 욕심이 덜 생기는 게 맞아요. 기본적으로 욕심이 많은 사람인데다가 출판사를 경영하며 무슨 일이든 전면에 나서서 휘두르는 것을 좋아했다. 밥을 줄이니 남에게 덜 바라게 되고, 내가 객관화되고, 사람이 좀 순해지더군요.”

 

권투선수 출신인 강 대표는 하루 한 끼를 먹지만 아직도 저녁엔 밥 두 공기를 먹는다. 그런 그도 2007년쯤엔 힘이 모자라고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 끼니를 늘리려 했다. 술과 담배에 과로까지. 아침과 점심만 거르다뿐이지 몸에 안 좋은 생활습관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점도 두려웠다. 그런데 건강검진을 받아보니 의사가 나이에 비해 장내 상태가 아주 좋다는 판정을 내렸다. “알고보니 내가 속이 깨끗한 남자더라”며 좋아하는 그는 에너지 과잉을 경계하는 이 생활을 계속해나갈 것이다.

 

2011년 11월 철학자 김영민(54) 전 한신대 교수는 <한겨레21>에 기고한 글에서 “음식을 먹지 않는 자는 없지만 그 맛을 아는 자는 드물고, 비록 그 맛을 알더라도 그 경험 속에서 자신과 이웃 세상을 바꾸는 계기를 얻으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며 1일1식의 정치학을 소개했다. “음식을 먹는 일에 나름의 분별을 지켜 자신의 삶의 성격과 성질을 요량할 수 있는 낌새로 삼고, 그것이 버릇과 생활, 세속의 체제와 관련되는 방식을 탐색하는 것은 다만 수행자들의 몫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끝없이 먹어치우는 매끼의 음식도, 음식의 문화도, 그 산업과 체계도 엄연한 정치의 길”(<한겨레21> 880호)이라는 것이다. 경남 밀양에 사는 그는 전화 통화에서 “자본주의적인 삶이라는 것이 세끼 먹는 식사와 연동되어 있으니까 다른 생활방식을 얻는 한 가지가 1일1식이다. 다른 이데올로기를 얻기 위한 방식이며 철저하게 생활정치화를 위한 조건”이라고 설명했다.

 

 

‘세 끼의 정치’에 반기를 들다

 

8년 가까이 오후 5~6시쯤 저녁만 먹는 1일1식을 지켜온 그는 “사람의 탐욕은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먹는 욕심을 버리면 다른 욕심도 대개가 줄어든다”고 했다. 그가 한 끼니를 통해 얻어낸 생활방식은 이렇다. “제일 중요한 것은 친구를 다 잃는다. 밥친구나 술친구가 없어진다. 그래서 오히려 다른 생활을 하기 편하고, 다른 관계를 맺기 편하다. 제일 좋은 것은 공부하기 좋다.”

 

물론 욕심을 줄이고 생활을 소박하게 가꾸려고 모두가 그처럼 한 끼니로 돌아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김영민 교수도 “혼자 사는 사람이나 공동체 운동 속에서 하루 한 끼니를 지키는 것은 좋은데, 육체노동을 하거나 아이들을 키우는 집에서는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다석 강의를 한 후 하루 한 끼 먹기를 10개월쯤 했던 박재순 전 씨알재단 이사는 “체력이 약한 탓인지 몸무게가 너무 줄어 접었다”며 “다석 유영모도 모두에게 1일1식하기를 권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1일1식은 상징적인 어떤 행동과 다름없다. 김영민 교수는 “한 끼, 두 끼를 따지는 것은 위험한 현시가 되기 쉽다. 중요한 것은 밥의 양이 아니고 생활양식이다. 조금 나은 생활을 하기 위한 필요한 조건으로 끼니를 맞추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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