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는 진정한 친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제가 유명하다 보니 제 리무진 함께 타려는(ride with me in the limo) 사람은 엄청 많아요. 하지만 리무진이 고장 났을(break down) 때 저랑 같이 버스를 타겠다는(take a bus with me) 사람은 친구뿐이죠."

친구는 당신을 속속들이 다 알면서(know you inside out), 그래도 당신을 좋아해주는(still like you) 사람이다. 당신을 위해 자기 일정표에서 시간을 내주는(find time on his calendar) 사람이 아니라 아예 일정표를 들여다보지도 않고(do not consult his calendar) 당신 시간부터 물어보는 사람이다.

미국의 인생상담 전문가(a life coach) 도미니크 베르톨루치는 이런 친구들이 있어야 든든하다고 말한다. 첫째, 당신보다 세상물정과 유행에 더 밝은(be better at keeping up with what's hip) 친구. 이런 친구는 당신 눈을 뜨게 도와준다. 빠져버리기 쉬운 틀에 박힌 생활에서 벗어나게(unstick yourself from the rut that's easy to get bogged in)해준다. 그냥 지나쳐 갔을 수도 있는(may have passed you by) 것들을 알게 해 당신 인생을 살지게(enrich your life) 한다.

둘째, 언제든 주저하지 않고 전화를 걸(call at the drop of a hat) 수 있는 친구. 그리고 예고 없이 갑자기 계획을 바꿔도(change plans at short notice) 아무 군소리 없이(without any ifs and buts) 받아주는 친구가 있어야 한다.

 

 

셋째, 당신이 본받고 싶은 친구(a friend who you aspire to be). 최상의 당신이 되도록 도전 의식을 북돋우고(challenge you to be the best version of yourself) 모범이 돼준다. 당신의 강점과 약점에 모두(on both your strengths and weaknesses) 보탬이 된다.

넷째, 대단히 솔직한 친구. 듣고 싶은 이야기만 하지 않는, 적어도 달콤하게 꾸며(sugarcoat things at the very least) 말하지 않는, 곧이곧대로 말해주는(tell it to you straight)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 당신이 책임져야 할 위기에 봉착했거나(get a crisis on your hands) 긴급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찾아갈 수 있는 사람(your go-to)이어야 한다.

다섯째, 당신보다 당신을 더 잘 아는(know you better than you know yourself) 친구. 여드름이 난 얼굴에 벙거지 머리를 하고(have pimples and a bowl cut) 돌아다니던 시절 친구가 필요하다. 자신 있는 척 허세를 부릴(put on a brave face) 필요가 없는 친구, 당신 집처럼 무조건 당신을 받아주는(accept you unconditionally) 오랜 친구가 있어야 행복하다.

"내가 바뀌면 따라 바뀌고, 고개를 끄덕이면 같이 끄덕이는 친구는 필요 없다. 그건 내 그림자가 훨씬 더 잘한다"(플루타르크·그리스 철학자).

"친구란 다른 사람들은 다 가버리는데(walk out) 거꾸로 나를 향해 들어오는 사람이다"(월터 윈첼·미국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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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욕심에서, 내 이기심에서 벗어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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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 안 해도 좋아질 환자를 수술대에… ‘획기적인’ 시술법이란 詐欺다”

“사실은 내 허리가 안 좋아 30분만 서 있으면 못 견뎌 내가 내 허리 수술하는 꿈꿔”

“레이저·로봇·내시경 수술…
요즘엔 ‘신경성형술’이 大유행 길면 3년 짧으면 1년 만에 사라져”

절개된 살의 단면(斷面)은 두껍고 질겨보였다. 파인 살 속에 끈적한 피가 고여 있었다. 허옇게 드러난 척추는 생각보다 가늘었다. 수술대 옆에는 칼, 가위, 송곳, 고리, 망치 등 '목공' 연장이 놓여 있었다. 내가 아침부터 사람 피를 보고 있구나, 그제야 메스꺼움이 느껴졌다.

서울아산병원 3층 수술실. 이춘성(56) 정형외과 교수는 조각하는 것처럼 살을 째고 파고 벌리고 깎는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그는 '척추 명의(名醫)'로 소문이 나 있다. 그에게 수술을 받으려면 1년 넘게 기다려야 한다.

그런 그가 최근 출간한 '독수리의 눈, 사자의 마음, 그리고 여자의 손'이라는 책에서 의료계의 '장삿속' 수술에 대해 내부 고발을 했다.

"척추 수술을 많이 하고 성공률이 어떻다고 자랑하는 병원은 일단 의심하면 된다. 허리디스크의 8할은 감기처럼 자연적으로 낳는다. 수술 안 해도 좋아질 환자에게 돈벌이를 위해 수술을 권하는 것이다. '획기적인 새로운 시술법'치고 검증된 게 없다. 보험 적용도 안 된다. 결국 환자 입장에서는 돈은 돈대로 버리고, 몸은 몸대로 망가진다."

이춘성 교수는 “나이 들면 허리가 아프게 마련이고 대부분 수술 없이 자연 치유된다”고 말했다. /성형주 기자 foru82@chosun.com

―구체적으로 무엇을 두고 그렇게 참지 못하는가?

"척추 수술만 예로 들면, 한동안 '레이저 디스크 수술'이 유행했다. 레이저 고열로 디스크를 녹인다는 것이다. 그걸로 좋아질 증상이라면 가만 놔둬도 좋아진다. 오히려 시술 시 발생하는 고열로 주변의 뼈나 신경이 화상을 입을 수 있다. 로봇 수술, 몸에 흉터를 안 남긴다는 내시경 수술, 5~10분 만에 디스크를 제거한다는 수핵성형술 등이 나왔다가 사라졌다. 주현미의 노래 제목처럼 '길면 3년 짧으면 1년' 딱 이거다. 요즘에는 '신경성형술'이 획기적인 치료법인 양 퍼지고 있다."

―시장에서 수요가 있다는 것은 그런 수술을 받아본 환자들이 효과를 봤기 때문이 아닌가?

"신경성형술은 가느다란 관(管)을 몸에 집어넣는데 그 비용만 200만원이 넘는다. 검증된 적 없는 이런 시술에 왜 고비용을 물어야 하나. 이는 우리나라만의 현상이다. 좀 좋아진 기분이 느껴졌다면 시술 전에 맞은 '스테로이드' 주사 효과일 뿐이다."

―그들도 같은 전공 의사로서 나름대로 판단이 있지 않을까?

"처음에는 양심을 속이고 한다. 그렇게 세 번쯤 반복하면 자신도 그런 시술이 정말 옳다고 믿는다. 사람은 합리적인 게 아니라 자기 합리화를 하는 존재라고 하지 않나."

―그쪽 의사들의 반발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느냐? 한때 한 척추 전문 병원이 소송을 제기했다가 취소한 것으로 안다.

"그런 새로운 시술법을 팔아먹는 쪽에서는 내게 '당신이 해봤느냐. 안 해보고서 왜 떠드느냐'고 한다. 도둑질이 나쁘다는 것은 초등학교 때부터 배워서 아는 것이지, 꼭 직접 해봐야 나쁜 줄 아는가. 이런 시술은 보험 적용 대상이 되는 순간부터 횟수가 뚝 떨어진다. 요즘 무릎관절 치료에서 자기 피를 뽑아 주사하는 'PRP 주사'가 난리다. 내 전공은 아니나 대학병원의 전공의사들과 얘기해보면 이 역시 전혀 검증이 안 됐다."

―새로운 시술법을 부정하면 고전적인 방법이 늘 옳은가?

"의료 행위는 인체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과학적인 검증 과정이 몹시 중요하다. 어떤 치료법이 행여 몇몇 환자에게 효과가 있다고 전체 환자에게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위험하다. 척추 수술은 현미경을 보면서 손으로 하는 것이다. 획기적인 방법으로 좋아질 환자라면 당초 수술을 하지 않아도 좋아질 환자다. 다시 말해 그건 불필요한 수술이고, 차라리 안 하는 게 맞는다."

―허리 디스크 대부분은 수술을 안 받는 게 맞는다는 뜻인가?

"척추 수술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다. 상업적인 의사는 환자에게 늘 얻는 것만 말한다. 수술을 했다면 목에 굴레가 씌워진 것과 같다. 어떤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다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렇게 재발해 또 수술을 받으면 결과는 더욱 나빠진다."

―선생은 어떤 경우 수술을 결정하나?

"수술받아야 할 환자는 꼭 받아야 한다. 가령 척추관협착증이나 척추측만증이 심한 환자는 수술이 아니고는 방법이 없다. 하지만 노인이 '허리 아프다'며 수술해달라고 하면, '감기 걸렸는데 폐를 잘라내나요' 하고 달랜다. 나이가 들면 허리가 아프게 마련이다. 이를 노화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운동하면 된다. 어떤 분들은 '다른 대학병원에서도 그랬는데 여기서도 똑같은 말만 한다'며 역정을 낸다."

―이번 책에서 '광고를 많이 하는 의사, 실적 홍보가 심한 의사, 운동선수나 유명 인사를 치료했다고 떠벌리는 의사는 일단 의심하라'고 했다.

"흙탕물을 흐리는 미꾸라지는 극소수 의사다. 문제는 그런 의사들이 돈을 잘 벌고 번성하고 젊은 의사들의 모델이 된다. 이 때문에 의료 행위가 왜곡되는 것이다."

 

 

―그런 의사들의 경력을 보면 대부분 외국 명문대에서 연수해 선진 의료를 배운 걸로 되어있는데도.

"외국 명문대 병원에서 일주일쯤 어깨너머로 슬쩍 들여다보고 와서는 이력서에 '어느 대학 연수'라고 쓴다. 특정 수술법 세미나에 참가비를 내고 하루이틀 참석하고도 '수술법 연수 과정 수료'라고 한다. '교환교수'니 '초빙교수'도 하나같이 사기다. 외국 명문대 병원에서 그런 제도를 운영하지 않는다. 드물게 특정 분야의 대가라면 몰라도. 그런 타이틀을 앞세우고 방송에 자주 출연하면 우리 사회에서 스타 의사로 대접받는다."

―선생도 '스타 의사'로 분류되지 않는가.

"나도 한때 유명해지려고 했겠지만, 그건 정말 젊었을 때 잠깐으로 그쳐야지. 인생 살면서 그런 게 다 부질없는 것 같았다. 돼지는 먼저 도살될까봐 살찌는 것을 두려워하듯, 사람도 추락하지 않으려면 유명해지는 걸 두려워해야 한다(人�Q出名 猪�Q壯·인파출명 저파장)고 했다. 정말 실력 있는 의사 중에는 매스컴을 거부하는 의사도 많다."

―선생의 수술 일정은 1년 뒤까지 꽉 차 있다고 들었다.

"나는 학생들 척추측만증이 관심사다. 여름·겨울방학에는 그 수술에만 집중한다. 1년에 150명쯤 한다. 어른 환자는 1년 넘게 기다려야 한다."

그는 스마트폰으로 찍은 '110도가 휜 S자형 척추' 사진을 보여줬다.

"열다섯 살 여자아이인데, 어제 수술실에 아침 9시 15분에 들어가 오후 2시 반에 나왔다. 수술 도중 아이의 오른쪽 발 신경 기능 수치가 떨어졌다. 순간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곧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 수술을 앞두고 수류탄을 투척하는 꿈을 꾸는데 내가 잘못 던지는 꿈까지 꿨을 정도로 스트레스가 심했다. 이렇게 수술이 잘되면 2~3일은 기분이 정말 좋다. 소풍 가는 날 아침처럼 오늘 4시 반에 깼다."

―수술 잘하는 비결이 있나?

"전문 분야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무모한 담력, 뛰어난 수술 기술이다. 이번 책 제목으로 '독수리의 눈, 사자의 마음, 여자의 손'이라고 한 것과 같다. 신경을 덮은 뼈가 1㎜ 두께라도 나는 망치로 칠 수 있다. 전혀 신경에 손상이 안 가게 하고. 그럴 때면 '이건 보기 좋은 예술이야' 하는 생각도 든다."

―척추 수술에서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은?

"신경을 다쳐 하반신 마비 같은 합병증이 오는 것이다. 나는 1년에 250명쯤 척추 수술을 해오지만 그런 마비가 없었다. 다만 환자 사망을 딱 한 번 경험했다. 140도 측만증의 뇌성마비 환자였다. 수술 과정에서 심장 문제로 숨졌다. 다시 경험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경우에 일부 의사는 "나처럼 잘하는 사람이 수술했는데도 문제가 생겼다면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라고 하지 않나?

"그런 사건을 겪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곧 다시 수술하거나 아랫사람한테 '이건 네 책임이야' 하고 미루는 의사들도 있다. 병적인 자기도취의 성격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의사들 모습이 그렇지 않은가?

"훌륭한 수술 의사가 되려면 그런 성향이 필요할 수도 있다. 수술 도중 환자가 사망하면 차라리 담담해진다. 보호자들에게 멱살 잡히고 화끈하게 며칠 당하면 된다. 환자에게 마비 합병증이 생기면 그때부터 견디지 못한다. 나도 과거에 한 노인분을 수술한 뒤 발목 마비가 와서 정말 괴로웠다. 심약한 의사들은 이런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기도 한다. 한 보고서를 보니 산부인과 의사 자살률이 5%가 넘었다. 출산한 아기가 뇌성마비이거나 어떤 문제가 있으면 감당해낼 수 없다."

―의료 사고를 걱정해 어려운 수술은 아예 피하지 않는가?

"어려운 수술이라고 해서 수당을 많이 받는 게 아니다. 하지만 진정한 의사라면 8000m 히말라야를 오르는 산악인이 북한산에 만족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더 어려운 수술에 도전해보고 싶은 것이다. 물론 막대한 손해배상과 형사 책임을 떠올리면 무모하게 할 수는 없다. 미국 병원에선 수술 후 환자에게 합병증이 나타나는 사례가 거듭되면 해당 의사의 칼을 뺏는다."

―선생은 외래 환자를 볼 때 한 명당 1분도 안 걸리는 것 같았다.

"수요일 하루, 금요일 오후에 외래 환자를 본다. 나도 많이 알려져 외래 진료 스케줄이 2년치가 차 있다. 연결된 진료실 4개 방을 왔다 갔다 하면서 본다. 진료를 받는 환자들은 나와 인간적으로 대화하고 싶어 한다. 환자는 밀려있고 이들과 눈 맞추고 인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줄 아는가. 대부분 수술해야 할 환자가 아니다. 내 수술이 필요한 환자에게만 시간을 많이 쓴다."

―선생을 보면 허리가 좀 불편하더라도 병원을 찾지 않는 것이 현명한 것 같다.

"사실은 내가 허리가 안 좋다(그의 연구실에는 스트레칭 매트, 윗몸일으키기 기구가 놓여 있었다). 30분만 서 있으면 못 견딘다. 서점에서 책을 읽을 때도 바닥에 쪼그리고 앉는다. '내 허리 수술을 형(한 살 위인 서울대병원의 이춘기 교수로 척추 분야 전공)한테 맡길까. 하지만 너무 터프해' 이런 생각을 하다가, 내가 내 허리를 수술하는 꿈도 꿔봤다."

―그 허리 상태로 환자들 허리를 본다는 게 역설적이다.

"오늘도 수술 전에 윗몸일으키기를 70회쯤 하고 들어갔다. 수술대에 기대면 몇 시간 서서 수술해도 괜찮다."

―MRI는 찍어봤나?

"안 찍어봤다. 그 결과로 수술해야 된다면 굉장히 의기소침해질 것이다. 내 의사적 소견으로는 지금 증상으로는 수술 안 해도 되지 않을까. 암이라면 모르겠지만 허리 병을 빨리 안들 무슨 도움이 되겠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는 과거 정기 검진에서 혈압이 아주 높게 나오자 그 뒤 십몇 년 동안 검진을 아예 안 받았다. 당시 너무 놀랐고 의사로서 창피했다고 한다. 그를 봐도 훌륭한 직업인이 꼭 상식적인 인간은 아니다.

 

순풍 타고 3000m 상공에서 태평양 종단 비행 8일…먹지도, 마시지도, 자지도 않아

체중 절반 지방 태워 물과 에너지로, 쓰지 않는 창자 등 장기 줄여

 

epic_flight1.jpg » 태평양을 크게 한바퀴 도는 붉은 선이 큰뒷부리도요가 해마다 반복하는 여정이다. 사진=미국지질조사국(USGS)

 

새만금 갯벌이 망가진 뒤 우리나라 최대의 도요·물떼새 도래지가 된 금강 하구 유부도에 “뿅~뿅~뿅~” 하는 청다리도요의 맑은 울음소리가 퍼져나갔다.

 

갯벌에는 밀물에 쫓기면서 도요새들이 바삐 먹이를 찾고 있었다. 몸이 작은 좀도요, 민물도요, 물떼새는 종종걸음을 치며 작은 갯가생물을 잡았고 긴 부리를 지닌 도요들은 느긋하게 갯벌 속에 숨어 있는 갯지렁이와 게를 노렸다.

 

갑자기 도요새들이 연기처럼 피어오르더니 휙 각도를 바꿔 갯벌로 스며들었다. 맹금류인 새홀리기 한 마리가 갯벌의 평화를 깼다.
 

wader1.jpg » 지난 15일 금강 하구 유부도 갯벌에서 도요새들이 구름처럼 날아오르고 있다. 사진=조홍섭 기자

 

“도요새를 날리지 마세요.”
 

지난 15일 도요새 탐사에 나선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의 오동필 물새팀장이 참가자들에게 당부했다. 도요새들이 이곳에서 충분히 먹이를 먹어 지방을 얼마나 비축하느냐가 삶과 죽음을 가르기 때문이다.
 

알록달록한 깃털이 두드러지는 붉은어깨도요는 대표적인 피해자이다. 오스트레일리아 북부에서 5400㎞를 날아 황해에 도착해 ‘급유’를 한 뒤 다시 시베리아 북부 툰드라로 날아가 번식하는 이 도요새는 중간 기착지인 ‘새만금 주유소’가 문을 닫는 바람에 전세계 개체수의 20%가 줄었다. 오씨는 “새만금에서 4만~5만마리까지 큰 무리의 붉은어깨도요를 볼 수 있었는데 요즘엔 1000~2000마리가 고작”이라고 말했다.
 

wader3.jpg » 서해 갯벌에 중간 기착한 붉은어깨도요. 호주와 북극의 오가는 장거리 여행자이다. 사진=오동필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 물새팀장

 

이런 장거리 이동 도요새가 수천㎞를 비행한 끝에 내려앉을 때는 어떤 모습일까. 오씨의 설명을 들어보자.
 

흑꼬리도요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논스톱으로 날아오는데 내려앉기 전 ‘뾰~뾰~뾰~’ 하는 소리를 집단으로 내면서 선회합니다. 긴 여정이 끝나고 이제 다 왔다는 신호겠지요. 그러곤 너무 힘들다는 듯 죽은 듯이 앉아서 쉽니다.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죠. 하지만 무척 허기진 듯 먹이가 눈에 띄면 우선 먹습니다.”
 

흑꼬리도요의 친척인 큰뒷부리도요는 진정한 장거리 여행자이다. 자신의 신체 구조까지 바꿔 가며 장거리 비행에 극단적으로 적응했다.
 

Arnstein Rønning_Limosa_lapponica_rg.jpg » 수면 위를 나는 큰뒷부리도요. 장거리 비행 때는 2000~3000m 상공에서 무리지어 난다. 사진=아른슈타인 뢰닝, 위키미디어 코먼스

 

몸 길이 41㎝에 70~80㎝ 길이의 날개를 지닌 비교적 큰 도요인 큰뒷부리도요는 약 1000년 전 마오리족의 조상이 뉴질랜드를 발견하도록 만든 새로 유명하다. 일단의 폴리네시아인은 해마다 같은 시기에 남쪽으로 날아가는 ‘쿠아가’ 무리를 따라가면 틀림없이 육지가 나온다고 믿었다.

 

그 믿음에는 합리적 근거가 있었는데, 쿠아가는 물갈퀴도 없고 물에 빠지면 익사하는 육지 새였기 때문이다. 마오리족이 길잡이로 삼았던 큰뒷부리도요는 지금 이 시각 태평양을 세로로 건너질러 알래스카에서 뉴질랜드로 비행하고 있다. 1만㎞가 넘는 이 망망대해를 8~9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잠 한숨 자지 않고, 물 한 방울 마시지 않고 쉬지 않고 날갯짓을 한다.

 

wader2.jpg » 우리나라 서해 갯벌에서 먹이를 찾는 큰뒷부리도요. 사진=오동필 새만금시민생태조사단 물새팀장
 

조류 연구자들은 일찍부터 이 새의 대양 횡단을 짐작하고 있었다. 8월 말부터 알래스카에서 이 새가 사라진 뒤 뉴질랜드에서 갑자기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리에 식별표지를 붙인 큰뒷부리도요가 가을철 아시아에서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혹시 이들이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섬에서 쉬었다 가는 건 아닐까. 그러나 이동로에 위치한 하와이제도 위로 해마다 10만마리의 큰뒷부리도요가 지나가지만 지난 35년 동안 이 섬 안에서 목격된 개체는 40마리에 지나지 않는다.
 

이 새의 장거리 이동에 대한 결정적 증거는 2007년 나왔다. 미국 국립지질조사국 조류학자들은 피부 밑에 건전지 크기의 무선송신기를 삽입한 큰뒷부리도요 9마리를 알래스카에서 날린 뒤 인공위성으로 이들의 경로를 추적했다. 이들의 놀라운 대양 횡단 비행 궤적은 실시간으로 전세계에 알려졌다.
 

 

 

이때 세계 최장거리 비행 기록을 세워 유명해진 큰뒷부리도요가 ‘E7’이었다. 8월30일 해가 지기 2시간 전 이륙한 이 새는 8일 동안 1만1680㎞를 쉬지 않고 날아 9월7일 저녁 뉴질랜드 피아코강 어귀의 습지에 착륙했다. 평균 시속 60㎞의 속도로 지구의 반대편으로 비행한 것이다.
 

큰뒷부리도요를 주인공으로 한 자연 다큐로 다음달부터 전국 극장에서 개봉될 부산경남 민방(KNN)의 <위대한 비행>에는 2만7000㎞에 이르는 알래스카~뉴질랜드~서해~알래스카 여정을 4번 완수하고 지난해 죽은 ‘얄비’ 이야기가 나온다. 4년 동안 얄비는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 중 3분의 1을 난 셈이다.
 

e7_entire_track_rev_dates.jpg » 세계 최장 비행 기록을 세운 큰뒷부리도요 E7의 여행 경로. 사진=미국지질조사국(USGS)

 

여행을 떠나기 전 이 도요는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운 알래스카 유콘강 하구에서 배를 채워 ‘공처럼’ 뚱뚱해진다. 출발 직전 레이더 기지와 충돌해 죽은 큰뒷부리도요 수컷을 조사한 결과 몸무게 367g 가운데 201g이 지방이었다.

 

장거리 이동 도요들은 대개 이동 직전 몸무게의 절반을 지방으로 채우고 이를 태워 얻은 에너지로 비행한다. 도착지에서 몸무게는 절반으로 줄어든다. 흥미롭게도 태평양을 횡단하는 점보 제트기도 무게의 절반을 연료로 채운다.

그런데 최근의 연구 결과 이들 도요새에게는 몸의 조직과 장기가 변하는 극단적 생리변화가 일어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긴 여행을 떠나기 전 최대한 많은 지방을 몸에 채우기 위해 비행 동안 불필요한 소화기관 등의 장기는 가능한 한 축소시킨다. 앞서 출발 직전 죽은 도요새의 가슴 근육은 한쪽이 27g이나 됐지만 간은 7g, 콩팥은 한쪽이 1.5g에 지나지 않았고 위장은 텅 비어 있었다.
 

Dick Bos_800px-MirandaNzWetland02.jpg » 뉴질랜드 미란다 강 하구에 도착해 먹이를 먹는 큰뒷부리도요 무리. 사진=딕 보스, 위키미디어 코먼스

 

중간 기착지에 도착하면 신체는 다시 극적으로 변화한다. 심장, 다리 근육, 콩팥, 위, 간, 창자가 다시 커진다. 하지만 출발 직전엔 다시 지방에 공간을 내주고 움츠러든다. 이런 생리변화를 보고한 네덜란드 과학자의 논문 제목은 ‘위장은 날지 않는다’였다.
 

큰뒷부리도요는 비행 중 필요한 수분을 지방을 분해해 충당하며, 잠은 고래 등 해양동물처럼 뇌의 절반씩 가수면 상태에 빠지는 식으로 자는 것으로 과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대양을 횡단하는 비행이 새의 강인함과 인내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큰뒷부리도요는 적어도 5가지의 다른 바람을 적시에 이용해 비행 에너지를 줄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출발 때는 알류산 저압대의 주기적 폭풍을 이용하는데, 순풍을 받아 1000㎞ 거리를 시속 144㎞까지 속도를 낸다.
 

wader5.jpg » 2010년 새만금 갯벌에서 죽은 채 발견된 큰뒷부리도요. 중간기착지의 환경변화는 이들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 사진=조홍섭 기자

 

이정표나 지형지물이 있을 리 없는 대양에서 이들은 낮에는 태양의 편광을 보고 밤에는 별자리를 이용해 2000~5000m 상공을 난다. 이들은 대양에서는 비교적 좁은 폭 1800㎞의 통로로 이동하는 뛰어난 방향감각을 보인다.
 

큰뒷부리도요는 해마다 가을철 번식지인 알래스카에서 월동지인 뉴질랜드로 이동하지만, 반대로 봄철엔 태평양을 횡단하지 않고 우리나라 서해안 갯벌을 들러 알래스카로 가는 우회로를 택한다.

 

USGS Alaska Science Center_Bar-tailed_Godwit_migration.jpg » 봄철 알래스카 번식지로 갈 때는 황해에 중간 기착하는 다른 항로를 이용한다. 사진=미국지질조사국(USGS)

 

그 이유로는 남행길과 달리 북행길엔 바람을 활용할 수 없고, 중간에 두둑하게 지방을 축적하고 번식지에 도착하는 것이 유리하며, 만일 지방층이 고갈되더라도 4000㎞ 거리엔 ‘비상 착륙’할 곳이 전혀 없다는 점 등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뉴질랜드로 가는 남행길에서 목적지 이전에 지방층이 없어지면 도요새는 마지막 1400㎞ 비행을 포기하고 뉴칼레도니아에 내려앉기도 한다.


밀물이 계속 밀려오자 도요새들은 더 높은 곳을 찾아 유부도 해안을 떠났다. 갯벌 생태체험 전문가인 여길욱 한국도요새학교 대표는 “도요새에겐 먹이 한 점이라도 절박한데 최근 이곳에 탐조객과 사진가들이 몰리면서 새들을 간섭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wader4.jpg » 유부도에 도요새 탐조에 나선 군산중앙여고 탐조동아리 원더버즈 회원인 김현주, 이수영, 이우희(왼쪽부터) 양이 필드스코프 앞에서 모였다.

 

군산중앙여고의 철새보호 동아리 원더버즈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현주(2년) 양은 “도요새들의 쉼터로 쓰기 위해 금강 하굿둑 부근 농지 매입 모금활동을 하고 있다”며 “많은 이들이 큰뒷부리도요처럼 신기하고 대단한 도요를 지키는데 참여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군산/조홍섭 환경전문기자 ecothin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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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풍 산바가 오고있다는 증거일까?
아침나절 비가 내리고 토란잎에는 비이슬이 맺힌다.
자연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 실감하는 요즘이지만, 여전히 인간은 자연 앞에서 오만하다.
맨 몸의 자연, 그들은 자신의 빛깔을 숨기지 않는다.
봄의 빛은 은은하고, 가을의 빛은 강렬하다.
그 강렬한 가을의 빛깔을 남한산성 오전리장에서 만났다.

꽈리.
어릴적 뒷뜰에 꽈리가 지천으로 퍼져있어 가을이면 잘 익은 꽈리를 입에 물고 꽉꽉 소리를 내기도 했다.
싸구려 고무로 만든 꽈리를 문방구에서 팔기도 했고, 성능은 그게 더 좋았으므로 형형색색의 고무꽈리를 골라 입에 물고 놀기도 했다.
70년대 초반, 모든 것이 귀한 시절이었으며 프라스텍 장난감들도 막 나올 무렵이니 그것이 건강에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었다. 아마, 지금 그런 고무꽈리를 판다면 질겁을 할 것이다.

허긴, 검 조차도 귀하던 시절이라 띠를 씹고 다니기도 했으니....
그땐, 자연이 주는 장난감이 얼마나 좋은지 잘 알지 못했다. 그것이 내내 아쉽기만 하다.
조그만 일찍 그것을 알았더라면.....

화초꽈리라고 한다.
말라도 그 색깔 그대로라고 한다.
색이 참으로 현란스럽다.

야생에서 채집한 버섯들이라고 한다.
이름을 가르쳐 주었지만 다 잊었다. 참나무에서 자란다는 버섯, 그냥 살짝 물에 씻어서 고기하고 함께 볶아 먹으면 고기보다 더 맛있다는그 버섯을 샀다.

향이 더 깊고 쫄깃할 것 같다.
그냥 느낌일까? 아니다.
집으로 돌아와 다듬어 살짝 데쳐서 맛을 보았더니 시중에서 사는 버섯보다 향이 깊고 쫄깃하다. 출처가 어딘지 아는 아내는 내심 먹기가 찝찝한가보다. 결국, 내가 스스로 임상실험을 했고, 몇 시간이 지나도 아무 문제가 없자 아욱국에도 넣고, 감자볶음에도 넣었다. 모두가 맛나게 먹는다.

프라스틱 바구니에 담긴 채소들...무슨 모자이크 작품을 보는 듯하다.
묘한 조화다.
자연의 색깔이 인조의 색깔보다 훨씬 더 진하다.
제 철인 아욱, 그리고 조금 철지난 가지나 오이....기상상황때문에 제법 값이 나간다. 그렇게 값이 나갈 때 풍년이면 좋으련만, 풍년이면 어김없이 똥값이 되는 것이 농산물 가격이다. 풍년이든 흉년이든 웃을 수 없는 농심,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이들이 천대받는 세상은 건강한 세상이 아니다.

참으로 곱다.
그냥 모든 의미들 다 접어두고 그냥 곱다. 가을, 천연의 색깔이 이토록 강렬하고 곱다.
자연은 자기의 색깔을 드러내지 않아도 드러내어도 다 예쁘다. 그래서 자연이다.

 

 

 

 

내일쯤 16호 태풍 산바가 온다는 일기예보 탓일까... 하늘은 완전 회색톤이다. 바람은 깨끗한 또한 시원한 전파라고 해야하나  

종일 집에만 있기에는 아깝다. 오랫만에 서울 성곽쪽으로 한바퀴 돌고와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마음이 바빠졌다.   부지런히 움직여 지하철 6호선 또 3호선 경복궁까지 왔다... 

오전 9시20분에 입구에 신분증 제출 10시전에 백운대 꼭대기까지 왔다... 상쾌했다  구름도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탓일까   시야는 먼지 한톨없는 보이는곳까지완전 다 보였다...

 

올라오면서 여름에 그것고 열사병, 일사병 ,  열대야하면서  온나라가 더위때문에 몸살을 하고 있을 즈음 부산에서온 동생과 함께 서울성곽 꼭대기까지 올라오다가 무모한 계획으로 동생은 119응급으로 강북삼성병원까지 가는 소동이 있었다.   진짜 큰일날뻔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가뿐히 오늘의 일정을 마치고 성곽에서 찍은 사진을 저장한다

고요하다....

폭풍전야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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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jpg

     개신교 은성수도원에서 묵상중인 청년 사진 조현

 

 

 

 

      

 

 

 

요즘 우리 사회에 '힐링'(치유)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그만큼 사회 갈등이 심하고 사람들의 삶이 각박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는 인생이 그렇지 않았는가 반문도 해보지만, 경제는 발전했다는데 삶은 점점 더 팍팍해지고 있다.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는 온 나라가 민주대 비민주, 노동대 자본의 극심한 대립 가운데 최루탄 가스 냄새를 맡으면서 뜨거운 시절을 보냈다.


요즈음 다시 우리사회에 양극화 문제가 심화되면서 사회정의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으며 경제민주화와 복지가 다가오는 대선의 주요 관심사로 부상하고 있다.


그래도 우리사회가 이런 문제를 공론의 장에서 다룰 수 있고 정치권에서 경쟁이라도 하듯 복지를 공약으로 내세울 정도로 민주화된 것은 지난날 뜨거운 투쟁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도 민주 대 비민주의 구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공정한 선거를 통해 정권교체의 길이 열려 있고 절차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정착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변화를 반영하듯, 오늘 우리 사회의 관심은 경제는 성장에서 분배로, 정치는 갈등과 투쟁에서 대화와 타협으로, 대기업과 중소기업 내지 자영업, 그리고 노와 사도 상극보다는 상생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 중론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종교도 양적 성장에서 영적 성숙으로, 시민운동도 민주화와 인권 문제에서 환경/생태계 살리기 쪽으로 무게 중심이 바뀌어 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비단 한국 사회뿐 아니라 전 세계적 현상이다. 외환위기, 금융위기, 재정위기 등 그치지 않는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이제 자본주의 시스템의 최전방에서 일하는 기업가들이나 경제학자들도 규제받지 않는 자본주의가 얼마나 불안정하고 위험한 것인지 실감하게 되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는 것은 뻔히 알지만 달리는 차를 멈추지도 못하고 뛰어내리지도 못하면서 불안 속에서 지켜만 보고 있는 것이 오늘날 세계의 형국인 것 같다.

 

 

여하튼 국내외를 막론하고 현재 우리 모두가 찾고 있는 것을 한 마디로 규정하자면 넓은 의미의 <평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내 안의 평화뿐 아니라 사회의 평화, 세계의 평화, 그리고 인간의 탐욕으로 죽어가는 생명계와 인간의 평화이다.

문제는 이 평화를 어떻게 이룰 수 있는가이다. 이에 대해 크게 두 가지 관점과 접근방식의 차이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평화는 나부터”라는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평화는 사회정의로부터”라는 관점이다. 전자는 자기 자신이 평화를 모르는데 어떻게 남을 평화롭게 하는 일에 나서겠냐면서 사회 운동에 뛰어든 사람을 백안시하거나 조소하기도 한다.

반면에 후자는 사회란 개인의 도덕적 노력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차원의 심각한 문제들을 안고 있으며 정의가 없는 부조리한 사회에서는 평화가 요원할 뿐 아니라 어떤 개인도 도덕적으로 살기 어렵다고 하면서 개인의 도덕성과 영성에 치중하는 사람들을 도피적이고 무책임한 사람으로 매도한다.


극단적 입장을 취하는 사람을 제외한다면 아마도 대다수 사람들은 이 두 관점이 대립적일 필요가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개인의 성향과 관심에 따라 문제를 보는 시각과 접근방법이 차이가 있고 사회 상황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개인의 삶의 태도를 보아도 이 두 입장 사이에서 우왕좌왕하기도 한다.


시민운동이나 공익을 위해 헌신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치고 이 문제를 안고 고심해보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이 문제를 단순히 관찰자적 입장이나 사회평론의 관점이 아니라 나 자신이 당면한 실존적 문제로 고심하고 있기에 이 글을 쓰고 있다는 점을 먼저 밝혀두고 싶다. 여하튼 평화를 위한다면서 평화를 이루는 방법을 가지고 다툰다면 큰 모순이다.


사실 이 문제는 내가 작년 강화도에서 심도학사라는 영성센터를 시작하려던 순간부터 직면했던 문제였다.

 아니, 어쩌면 나의 평생 학문 인생과 신앙생활을 관통하고 있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두 가지 회의가 나를 괴롭혔고 지금도 나의 관심을 떠나지 않고 있다.

하나는 우선 내가 무슨 영성의 대가도 아니고 선사나 인도의 구루 같은 존재도 아닌데, 과연 영성센터 같은 것을 운영할 자격이 있는가 하는 회의였다.

 내 안에 평화도 확고하지 못한 주제에 감히 누구를 위해 평화 영성을 말하고 지도한단 말인가 하는 양심의 문제였다.

 내 마음 하나 아직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공연히 영성센터 한다면서 스스로를 괴롭히고 남도 고달프게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어려웠다.


또 하나의 문제는, 설령 내가 영성센터를 열어 기도와 명상에 힘쓰고 찾아오는 이들에게 자기 성찰과 휴식의 기회를 제공한다 해도, 이는 세상의 고통에 눈을 감는 도피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다.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을 외면한 채 조용한 곳에서 고전을 읽고 명상 수행을 하는 일이 행여 팔자 좋은 사람들이나 하는 사치가 아닐지 하는 생각이 나를 떠나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다.


사실 이 문제는 일찍이 종교는 아편이라고 갈파한 마르크스 같은 사람에 의해 제기된 지 오래다.

최근에 나는 주로 한국 종교계를 염두에 두면서 종교와 영성을 구별하는 글을 쓴 적이 있지만, 실은 두 개가 쉽게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종교든 영성이든 문제의 핵심은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영성이 어떤 성격의 영성, 좀 더 정확히 말해 세상/세간이나 사회/역사, 그리고 물질과 육체를 폄하하고 도외시하는 영성인지, 아니면 둘을 대립적으로 보지 않고 둘 다 변화시키려는 영성인지에 있다.


불행히도 마르크스가 접했던 ‘아편’ 종교는 사회정의와 세상의 행복을 도외시하고 저세상의 행복에만 매달렸던 종교, 사람들로 하여금 부조리한 사회 현실로부터 눈을 돌려 하늘의 위로만 구하게 했던 기독교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사실 기독교 신앙에 이런 비판을 받을만한 소지가 충분히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성서에는 마르크스 자신이 보여준 비판정신의 원조와도 같은 정의의 예언자 아모스, 거짓 평화를 외치는 기득권층을 신랄하게 고발한 예레미아 같은 예언자도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예수 자신도 이런 예언자들의 정신을 물려받은 사람이었으며, 기독교 2,000년 역사가 다분히 권력층의 양심을 무디고 편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대변해주는 일도 해 왔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1970-80년대의 우리사회만 해도 많은 신부님들과 목사님들이 신앙의 이름으로 인권과 사회정의를 위해 목숨을 걸고 투쟁한 일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성직자들이 절대 다수였지만, 그래도 소수의 예언자적 삶과 정의에 목말라 했던 수많은 젊은이들의 용기 덕분에 우리가 이 정도나마 민주화된 사회에 살게 되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마르크스의 비판은 비단 기독교에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모든

종교는 어떤 보이지 않는 실재,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와는 전혀 다른 초월적 세계, 물질세계와 구별되는 영적 세계, 그리고 현세 너머의 내세를 말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종교가 아니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초월적 실재를 인정하는 것 자체가 그렇지 않은 입장에서 보면 이미 세계 도피라면 도피다.


세계는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이 땅 하나 밖에 없는데 종교는 하늘을 가리키고 있으며, 인생은 단 한 번 살뿐인데 또 다른 삶이 있다고 말하며, 물질과 육체는 누가 보아도 엄청 중요한 것인데 무슨 보이지 않는 영적 실재나 영혼 같은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니, 종교는 현실도피, 인간소외, 심지어 성직자들의 사기극이라고 할만도 하다.

하지만 종교는 본래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현실의 괴로움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생겨났다.

현실을 알되 현실만으로는 문제가 안 풀리기에 초월적 세계에 눈을 떠서 그 시각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 종교다.


종교가 이렇게 초월적 세계를 추구하다 보니 알게 모르게 현실을 외면하거나 도피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지만, 처음부터 현실을 도피하려고 시작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너무나 현실에 집착해서 괴로워하기에 문제를 해결하려다 보니 - 물론 문제의 진단과 처방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 못 되었다고 세속주의자들을 말하겠지만 - 종교가 종종 현실을 무시하는 우를 범하게 된 것이다.


어떤 종교는 초월적 세계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나 물질계를 아예 탈출해야 할 감옥으로 간주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환상으로 보기도 했다.

 이런 세계관을 가진 종교가 사회와 역사의 문제를 외면하고 현실 도피적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모든 종교가 다 그런 것이 아니며 항시 그런 것도 아니다.


종교는 아편일 수 있고 영성도 현실도피적일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현실을 폄하하고 초월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종교일수록 실제로는 오히려 물질을 더 탐하고 세상 권력과 쉽게 타협하기도 한다.

이는 단순한 인간적 연약함이나 위선일 수도 있겠지만, 극단은 극단과 통하듯 물질 자체를 악으로 간주하거나 현실세계를 사탄의 왕국처럼 악마화하는 것과 물질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나 권력과의 손쉬운 타협 사이에는 본질적 연관성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런가 하면, 현대 종교는 현실 도피와는 정반대로 지나치게 현실 문제에 집착하면서 마치 시민운동 단체나 여느 사회단체처럼 사회 문제에 전적으로 몰두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둘 다 종교의 바른 모습은 아니다. 초월적 시각을 상실한 종교는 더 이상 종교가 아닐 것이며, 현실을 도외시하는 종교 역시 현실을 변화시키고 구원하는 사명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현실과 초월 어느 하나도 무시하지 않고 양자 간의 긴장을 유지한 채 매개하는 자세가 종교와 영성에 요구된다. 각 종교가 이를 어떻게 자체의 교리와 사상에서 구체화하는가는 물론 각 종교 지도자들의 몫이다.

 

 

중세 그리스도교에서는 명상 내지 관상을 주로 하는 관조적 삶(vita contemplativa)과 수도원이나 교회 행정을 비롯해서 사회봉사를 중시하는 활동적 삶(vita activa)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우월하냐는 문제가 많은 관심을 끌었다.

하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그의 발치를 떠나지 않았던 마리아의 자세로 대변되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접대하고자 부엌에서 바삐 움직였던 마르타의 행위로 대변되곤 했다.


내가 좋아하는 마이스터 엑카르트 같은 신학과 영성의 대가는 이런 논란이 근본적으로 부질없는 짓이라고 비판했다.

그에 의하면 진정한 영성은 오히려 활동적 삶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며, 봉사와 섬김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영성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영성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에 대한 설교에서 마리아를 아직은 성속이원론을 넘어서는 원숙한 영성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 여인으로 보고 있다.


불교에서도 유사한 문제가 일찍부터 제기되었다. 대승불교는 출가승들이 사원에 안주하면서 자기들만의 수행과 학문에 집중하고 재가자들의 삶과 종교적 관심에는 무심했던 소승불교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되었다.

대승은 그래서 열반에 집착하는 아라한(阿羅漢)보다는 생사의 세계를 두려워하지 않고 중생 구제에 힘쓰는 보살(菩提薩陀)을 불자들이 추구해야 한 이상적 인간상으로 제시했다.


보살은 생사의 세계와 완전히 차단된 열반이 아니라 생사에도 머물지 않고 열반에도 머물지 않는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을 추구한다.

대승불교도 부처님이 가르쳐 주신 소승 계율을 여전히 중시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는 출가와 재가의 구별을 완전히 초월하지 못했다.


그러나 제도할 중생이 한 명이라도 존재하는 한 보살은 결코 먼저 열반에 들지 않겠다는 정신, 수행과 성불이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을 위한 것이라는 정신은 출가 재가를 막론하고 대승불자들의 의식에 자리 잡고 있다.

흔히 대승의 정신을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로 요약하며, 보살은 지혜와 자비를 새의 양 날개 혹은 수레의 두 바퀴로 삼아 사는 존재라고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스님들 가운데는 사찰이나 선방에서 수행에 전념할 것인지 아니면 중생 구제나 세상을 이롭게 하는 사회봉사 활동에 힘쓸 것인지를 두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불교가 심한 탄압을 받던 조선 시대에 스님들을 이판승(理判僧) 사판승(事判僧)으로 구분하던 관습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는 것 같다.


평화는 자기 자신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자신이 평화롭지 못하면서 평화운동 한다는 것은 모순이고 사람들이 비웃음을 살 것이다.

평화운동을 하는 사람은 우선 그의 언행과 성품에서 평화로운 모습을 지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그를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분노할만한 상황을 맞는다 해도 평화운동을 하는 사람은 분노에 사로잡혀서 냉철한 판단력을 상실하거나 타는 불에 기름을 퍼붓듯 사람들의 분노를 부추겨서도 안 될 것이다. 불의를 보고 분노하지 않는 사람은 정상적인 인간은 아니다.


하지만 평화를 만드는 사람은 결코 분노로 날 뛰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것은 물론 평소의 수행과 수련 없이는 힘든 일이다. 증오는 더 큰 증오를 불러온다는 것이 부처님과 예수님의 공통된 가르침이다.

물론 유대 청년 예수에게는 부처님과 달리 성전의 장사꾼들을 몰아내는 예언자의 거룩한 분노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분노에 지배당하거나 누구를 증오하지 않았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신 그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까지 용서하면서 돌아가셨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대학>의 구절은 누구나 한 번 쯤 들어 본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교 전통이 자기 자신을 닦는 수신(修身, 修己)을 근본(本)으로 삼고 가정과 나라를 다스려서(齊家治國平天下)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는 일(安人)을 지말(末), 즉 부차적인 것으로 여겼다는 사실이다.


이는 아직도 유교 전통이 강한 우리사회가 오늘날에도 포기할 수 없는 항구불변의 진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기 자신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남을 다스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유학(儒學)에서는 따라서 불교와 마찬가지로 공부하고 학문을 한다는 것은 우선 자기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인격을 완성하는 마음 공부였다.

공자님의 말씀 - “옛날 배우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했지만 오늘날 배우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위해 한다.” - 대로, 공부는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한 배움(爲己之學)이어야 한다고 해서 남을 위한 배움(爲人之學)과 구별했다.


정자(程子)는 이를 해석하기를, “옛 학자들은 자기 자신을 위했지만 마침내 만물(혹은 만인)을 완성하는 데 이르렀고, 오늘날의 학자들은 다른 사람을 위한다지만 결국은 자기 자신을 상실하는데 이르고 만다.”고 했다.

위기지학은 자기 자신의 문제로부터 고민하면서 시작하는 진실한 공부, ‘실존적’ 공부이어야 하며, 결국 이를 통해 세상도 위하게 되지만, 위인지학은 남을 위한답시고 하지만 실은 남을 의식하고 보이기 위해 하는 위선적 학문이 되기 쉽고 명리를 추구하다가 세상을 이롭게 하기는커녕 참된 자기마저 잃어버리게 된다는 날카로운 지적이다.


그러나 이는 결코 위인지학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다.

인간의 뿌리 깊은 이기심을 감안할 때 위기지학이 없는 위인지학은 자칫하면 허위가 된다는 경고이지 그것 자체가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유교에서 학문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수기를 통해 안인을 이루려는 데 있다.


사실 유교는 항시 이 점을 강조하면서 스스로를 불교와 차별화했다.

사회과학이 발달한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위인지학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될 수밖에 없다.

개인의 인격이 도덕성과 영성을 통해 완성된다 해서 반드시 사회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나 자신이 세상을 혼탁하게 하는 데 일조하지 않고 나아가서 도덕적 감화력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삶에 크고 작은 영향을 준다 해도, 사회의 부조리는 개인의 도덕적/영적 차원을 넘어서는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개개인의 인격이 성숙해지기를 기다리기에는 너무나 크고 심각하다.


정치가 아무리 더럽다 해도 우리가 정치를 무시할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나는 정치가 가치를 실현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일 수 있다고 믿는다. 오바마 행정부가 전력을 기울이다시피 해서 보수적 공화당의 저지를 뚫고 의료보험이 없는 약 4000만 명에 이르는 미국인들에게 혜택을 누리도록 하는 입법에 성공한 것은 좋은 예에 속한다.

선진국이라지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우리나라보다도 열악한 의료 서비스 때문에 세계의 조롱을 사던 미국이 이제 간신히 수치를 면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정치를 통한 제도적 변화 없이는 그 많은 사람들을 도울 길이 없었을 것이다.

오바마라는 한 사람의 집념이나 마르틴 루터 킹 목사 같은 사람이 주도한 비폭력 인권 운동 같은 것을 보면서 우리는 한 개인의 높은 도덕성과 강한 신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도덕성이 정치화되고 제도화되지 않는 한 그 영향이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명백하다.

 

개인의 노력과 사회제도의 개혁은 결코 배타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사람들이 모두 성자가 아닌 이상, 아니 성자라 해도, 사회제도와 시스템 자체가 불합리한 경우에는 도덕적으로 살기 어렵고 위선을 피하기 어렵게 된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사회의 고질적 병인 부동산 투기가 기승을 부렸다.

 투기로 이익을 보는 사회에서는 투기하지 않으면 상대적으로 손해 볼 수밖에 없다.

아무리 부동산투기가 망국병이라 외쳐대도 투기하지 않을 사람은 할 수 없는 사람을 빼놓고는 극소수일 것이다.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자기가 하는 것은 투자이고 남이 하는 것은 투기라고 궤변을 부리면서 한다.

결국 손해를 보는 사람은 투자할 여력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시기를 놓치고 막차를 탄 사람들뿐이다.

 평화는 나부터 시작해야 하고, 공부도 먼저 나 자신을 위해 해야 한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겠지만, 내가 도덕적 인간이 된다 해서 사회가 도덕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요즘처럼 사회가 복잡다단해지고 국제화된 시대에는 인문학 못지않게 사회과학적 위인지학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제도개혁을 위해서는 사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날카로운 분석과 투명한 인식을 줄 수 있는 현대적 위인지학이 필요하다.

그러나 학문만으로는 부족하다.

 평화를 만들기 위한 운동 없이는 사회가 좀처럼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사회적 관심을 아예 접고서 나 혼자 평화롭게 살기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굳이 어려운 명상이나 오랜 수행이 필요가 없을는지도 모른다. 몸에 큰 병 없고 먹고살만한 최소한의 수입, 그리고 어리석은 욕망을 자제할만한 최소한의 지혜와 외롭지 않을 정도의 사회성만 있으면, 누구나 행복하게 살 수 있다.

굳이 남의 행복까지 걱정하면서 스스로를 괴롭힐 이유가 없다. 텔레비전은 재미있는 프로그램만 골라 보고 뉴스는 되도록 보지 않고 사는 것도 한 방법이다.

실제로 이렇게 사는 사람이 많다. 더욱이 한 때는 사회 운동에 몸을 던졌다가 쓴맛단맛 다 보고서 인간에 대해, 사회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시골로 내려가 텃밭이나 가꾸며 사는 사람도 제법 있다.

 

사회가 잘되어야 나도 잘된다는 것은 평범한 진리다. 그래서 사회를 걱정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우리가 도덕적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로서 ‘현명한 이기주의’에 호소하는 사람이 많다. 간단히 말해, 나와 내 가족만을 생각하는 이기주의는 사회에 해를 끼치고 이것이 부메랑이 되어 결국 나 자신에게도 해가 된다는 논리다.

그러나 아무리 ‘현명한’ 이기심이라 한들, 이렇게 이기심에 호소하는 타산적 도덕성이 과연 사람을 얼마나 변화시킬 수 있을지 의문이다.

 사회가 망가지는 것은 나중 일이고 내가 당장 이득을 보는 마당에 그런 논리가 얼마나 통할까? 그래서 유교 윤리는 의(義)와 인간의 본성적 덕성에 호소할지언정 이익(利)에 호소하지는 않으며, 의무의 윤리를 강조하는 칸트 같은 철학자도 그런 얄팍한 계산에 인간의 도덕적 삶을 걸지는 않는다.


불교는 지혜와 자비는 불가분적이고 반드시 같이 가야만 한다고 가르친다. 어리석음으로 나와 남을 가르면서 아집에 사로잡혀 있는 한 우리에게 남을 위한 관심과 동체대비는 생기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무지를 깨우쳐 주는 일과 사람들의 고통을 제거해주는 구체적인 자비의 실천은 구별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지혜는 앎의 문제이지만 사랑과 자비는 의지와 감정의 차원에 속하기 때문이다.

 지혜와 의지, 앎과 행동이 완전히 따로 노는 것은 아니지만, 지혜가 훈련이 필요하듯이 자비행도 결단과 실천적 훈련이 필요하다.


개인의 변화도 갑작스러운 깨달음(頓悟)만으로는 안 되고 점차적으로 닦아나가는 부단한 노력(漸修)이 필요한데, 하물며 사회를 변화시키는 일이야 말할 것 있겠는가?

 중생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일과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눈물을 닦아 주는 평화 만들기는 아무래도 별개의 문제일 것 같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절에서 생활하시는 스님들로부터 흔히 듣는 말, 나 자신의 문제도 급한데 사회에 나가 남을 돌볼 자격이나 여유가 어디 있겠는가 하면서 선 자기완성/후 자비행을 옹호하는 논리 또한 쉽게 수용하기 어렵다.

지혜와 자비 모두 훈련이 필요하며 선후를 확연히 구분 짓기 어렵기 때문이다.


평화 되기와 평화 만들기가 함께 갈 수밖에 없는 이유는 평화 되기 자체가 사랑과 별개의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각고의 수행을 통해 내적 평화를 이루었다는 사람이 남에 대한 사랑이 없거나 남의 고통을 외면한다면, 나는 솔직히 말해 그런 평화는 준다 해도 사양하고 싶다.

가짜 수행, 거짓 평화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자기도 변하고 세상도 변하게 하는 힘은 사랑과 자비 외에 아무 것도 없다.

수행을 해도 자기만족에 머물게 하고 자기를 탈피해서 남을 위해 헌신하려는 사랑의 마음과 실천의 의지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그런 수행을 해서 무엇 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제아무리 심오한 진리를 깨달았다 해도, 그야말로 온 우주만물과 하나가 되고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렀다 해도, 배고픔에 눈물마저 말라버린 한 어린아이에게 빵 한 조각이라도 준 일이 없다면, 누가 그런 사람을 존경하겠는가?


문제는 우리가 사랑을 너무 개인적 차원으로 생각하는 데 있다. 사랑이 개인적 차원에만 머문다면 평화 만들기는 소극적이 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흔히 사랑과 정의가 상충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사랑은 따뜻하고 정의는 차갑다고 생각하며, 사랑은 감싸는 것이지만 정의는 투쟁하는 것이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정의란 다수를 위한 사랑이다. 오히려 진짜 사랑,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하는 순수한 사랑, 불교에서 말하듯 베풀음이 없는 베풀음(無住相布施)은 사회정의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누가 주었는지 모르기에 받는 자가 자존심 상하는 일 없고, 주는 자 역시 자기도 모르게 주었기에 우월감 같은 것이 생길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평화 되기와 평화 만들기가 둘 다 필요하지만 동시에 추구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게 느껴질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만 선택하려는 유혹에 빠진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워도 둘은 같이 가야만 한다.

사회정의를 외면한 영성은 도피적 영성이 되고 또 다른 형태의 이기적 삶으로 변하고 만다. 자기성찰의 지혜와 겸손 없이 사회를 위한답시고 함부로 날뛰는 사람도 문제지만, 뻔히 남의 도움으로 살고 있으면서도 세상을 등지고 홀로 깨끗이 산다고 착각하는 사람도 곤란하다.


사람은 아무리 혼자 있어도 사회성을 벗어날 수 없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렇고, 홀로 묵언수행을 해도 생각 자체를 하지 않고 산다면 모르지만 자신과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살기 때문에 언어 속에 깃든 사회성은 피할 길이 없다.

 또 설사 혼자서 아무리 깊은 체험을 하고 심오한 진리를 깨달았다 한들, 남에게 전할 수 없는 것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불교에서는 그런 사람을 독각승(獨覺乘)이라 해서 보살승보다 훨씬 낮게 여긴다.

반면에 도덕성을 겸비하지 못한 사회운동가는 운동 자체에 누가 되기 십상이고 자기도 쉽게 지치고 심성이 피폐하게 된다.

 마음이 순수하지 못하고 야심으로 가득 찬 사람이 아무리 사회를 위해 좋은 일을 한다 한들 일이 제대로 될 리 만무하다.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만 자기성찰과 성숙한 인격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수신제가’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자식을 키워 본 사람들은 마음이 뜨끔 한다.

부모 노릇 제대로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한 가정을 평화롭게 하는 일도 그렇게 어려운데, 하물며 사회운동이야 말할 것 있겠는가?

또 항시 좋은 얘기 많이 하는 종교지도자들이나 성직자들은 어떤가?


자기 비움 없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일은 매우 위험하며, 진정으로 세간을 포기할 마음 없이 출가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을 위해서나 승가를 위해서나 불행한 일이다.

두 경우 모두 종교가 개인적 한풀이나 출세와 야망의 수단으로 화할 가능성이 다분히 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나라 종교계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한겨레신문 웹진 <휴심정>을 좋아해서 부족한 글이나마 꾸준히 기고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휴심정의 필자나 독자 모두 평화 되기와 평화 만들기를 배타적 선택의 문제로 보지 않는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도피적 영성도 아니고 맹목적 행동주의도 아닌 제3의 성숙한 길을 찾아야 한다는 데 모두가 공감하고 있는 것 같다.


마음의 치유 뿐 아니라 사회의 치유를 바라는 마음이 함께 느껴지며, 세상의 아픔을 온몸으로 안고 평화를 위해 고민하는 소리도 들린다.

세상에 살 되 세상에 속하지 않고 산중에 있지만 세간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길, 악을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길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성자들에게는 자신을 위한 분노는 없겠지만 남을 위한 분노는 없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성자들의 눈에는 악은 보이지만 악인은 보이지 않을 것 같다.


평화 되기와 평화 만들기의 일치를 몸소 실천하면서 악은 미워했지만 사람은 미워하지 않았던 현대 성자의 모습을 우리는 마하트마 간디에서 본다.

 그는 인도 독립을 위해 영국의 제국주의에 맞서 끈질기게 비폭력 저항을 전개했지만 결코 영국인들을 미워하지는 않았다.

그는 제국주의라는 외부의 적 못지않게 증오라는 내면의 적과도 항시 치열하게 싸웠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위대한 영혼’(maha-atma)으로 부르게 만든 것이며, 이 ‘반쯤 벌거벗은 탁발승’(처칠의 표현)으로 하여금 전 세계를 움직이게 만든 것이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크고 작은 간디들이 외부의 적과 내면의 적을 상대로 거룩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가 그들과 함께 하기를.     

"어제 나는 없다. 오늘의 나만 있다."

어제 버림은 주저없이 버리고 오늘의 시작은 망설임없는 진정한 자신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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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큰 거울?’

한 온라인 커뮤니티 게시판에 이 같은 제목으로 올라온 사진 몇 장이 화제다. 은빛 지평선과 푸른 하늘이 마음의 평온을 주는 듯한 모습이다.

이 사진은 남미 볼리비아의 ‘우유니 소금사막’ 사진으로 알려졌다. 지각변동으로 솟아 올랐던 바다가 빙하기를 거쳐 거대한 호수가 됐고 건조한 기후로 인해 물이 모두 증발돼 소금 결정만 남아 현재의 모습이 형성되었다.

우유니 소금사막은 국내 여행자들도 남미를 찾는 비중이 늘면서 점차 인기있는 방문지가 되고 있다. 네티즌들은 "한 번쯤 꼭 가보고 싶다", "스트레스가 다 날아간다" 는 등의 반응이다.

온라인 중앙일보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하늘은 깊게 깊게 내려 앉아 마음 깊은 그쯤에 함께 자리잡았다.

어제의 여름은 흔적도 없이 이미 자리를 비웠다.

한참 이곳 저곳을 정리하고 어제와 또 다른 모습으로 거울속에 자리한 익숙한 모습을 나름 정리해본다

이마속의 굵은 주름을 이마 앞으로 머리카락을 내리지만 가린다는 그 행위가 오히려 안스럽다.

나이듦은 그대로 나이듦을 바라봐야지 가리고 더 진한 화장으로 어울리지 않은 옷으로 뭘 어떻게 할 수 있는것은 아니다

누군가 담대해지자고 했지........

오늘은 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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