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육상 200m 사상 첫 3연패
100·200m 두차례 2관왕도 최초

 

 

 

 

 

 

우사인 볼트(27·자메이카)의 질주는 200m에서도 막을 수 없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 볼트가 18일(한국시각) 러시아 모스크바의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14회 모스크바 세계육상대회 8일째 남자 200m 결승전에서 19초66의 시즌 최고기록으로 금메달을 차지했다. 워런 위어(자메이카)가 19초79, 커티스 미첼(미국)이 20초04로 뒤를 이었다.

볼트는 2009년 베를린, 2011년 대구에 이어 러시아 세계육상대회에서 우승하면서 남자 200m에서 3대회를 제패한 최초의 선수가 됐다. 이전에는 캘빈 스미스(미국)가 1983년 헬싱키 대회와 1987년 로마 대회에서 2연패한 것이 최다 연속 우승 기록이었다.

2009년 베를린 대회에서 100m, 200m, 400m계주 정상에 올랐던 볼트는 세계육상대회 최초로 남자 100m와 200m를 두차례나 동시 우승한 선수가 됐다. 이날 우승으로 세계육상대회에서 7번째 금메달을 목에 건 볼트는 역대 최다관왕인 미국의 칼 루이스(금메달 8개)에게 1개 차이로 다가섰다.

볼트는 이날 다리 상태가 완전하지 않아 자신이 갖고 있던 세계 최고기록인 19초19엔 못미쳤다. 대회 19초 벽을 깨겠다고 공약한 볼트는 자신의 시즌 최고기록(19초73)을 앞당겼지만 역대 기록에서는 19위에 해당한다. 4번 레인에 자리를 잡은 볼트는 결승선을 앞두고는 주위를 돌아보며 오히려 속도를 줄이는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볼트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직선 주로에 진입할 때 다리가 뻐근한 느낌을 받았고 빠른 기록이 나오지 않으리라고 예상했다. 코치도 무리하게 속도를 올리지 말라고 해서 주위를 돌아보고는 속도를 늦췄다”고 밝혔다.

볼트는 “내 목표는 다음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도 타이틀을 지키는 것이다. 이는 아무도 이루지 못한 업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불면증이 67% … 과다수면도 문제
과음·흡연 피하고 적당한 운동을

6년차 직장인 김모(32)씨는 매일 밤 ‘잠과의 전쟁’을 치른다. 오후 11시쯤 잠자리에 들지만 3~4시간 뒤척이다 잠이 든다. 이런 증세가 나타난 지 1년이 넘었다. 자리에 누워 머릿속으로 양을 세기도 하고 침대 위치를 바꿔보기도 했다. 하지만 불면증 증세는 가시지 않았다. 김씨는 “승진 시험에서 떨어진 뒤 잠을 못 자기 시작했다”며 “잠이 부족하니 직장에서 능률도 떨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인간은 평생 3분의 1을 잔다. 깨어서 움직이는 힘을 숙면으로 비축한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현대인은 숙면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다. 18일 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매년 수면장애로 병원을 찾는 환자는 늘고 있다. 2008년 22만7907명이던 것이 지난해엔 31만4169명으로 증가했다. 4년 만에 1.57배로 늘어난 것이다.

 수면장애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불면증이다. 지난해 전체 수면장애 환자의 66.7%(23만7931명)를 차지했다. 밤에 쉽게 잠이 들지 못하거나, 잠이 들었다 자주 깨는 증상이다. 자는 동안 10초 이상 숨을 쉬지 않는 수면무호흡증이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 갑자기 잠이 쏟아지는 기면증(嗜眠症), 계속 자도 피곤한 과다수면도 수면장애에 해당한다.

 수면장애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정신적 스트레스다. 2008년 미국 미시간대 연구팀이 발표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미국 직장인 2300여 명 가운데 절반가량에서 수면장애가 있었다. 이 중 직장 상사나 동료와의 지속적인 갈등을 원인으로 꼽은 사람이 긴 근무시간 등 다른 이유를 든 사람의 1.7배였다. 불면증이 가족력과 관련 있다는 연구 결과(2007년 12월 미국 수면의학회 발행 저널 SLEEP)도 있다. 비만인구의 증가와 나쁜 수면 습관 등도 원인으로 꼽힌다. 수면장애는 스트레스를 풀고 적당한 운동을 하면 예방할 수 있다. 낮잠이나 과음·흡연은 피해야 한다.

불면증이 있다고 무조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낮에도 머리가 아프거나 일상생활에 심각한 지장이 있는 경우엔 치료를 받아야 한다. 일산병원 신수정(신경과) 교수는 “급격한 스트레스로 인한 단기적 불면증은 수면제를 이용한 약물치료가 가능하지만 만성인 경우에는 생활습관 개선이나 심리 치료를 권하고 있다”고 말했다.


 

 

4만 촛불 모인 서울광장 행사, 큰 충돌 없이 마무리
부산·대구·울산·군산·제주 등 전국 곳곳에서 문화제 열려
국정조사 1차 청문회에 “국민 우습게 본다” 실망·분노 표현

 

 

 

4만개의 촛불(경찰추산 9000명)이 광장을 밝혔다. ‘국정원 정치공작 대선개입 규탄 제 8차 범국민 촛불대회’에 모인 시민들은 “국정원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등을 힘차게 외치며 촛불대회가 끝날때까지 광장을 지켰다.

같은 시각 부산 서면 쥬디스 태화 앞, 대구 동성로 한일극장 앞, 울산대공원 동문 앞, 군산 롯데마트 앞, 제주시청 앞 등 전국 곳곳에서 촛불문화제가 열렸다.

이날 촛불대회는 고 장준하 선생의 38주기를 맞아 유신독재에 항거한 고 장준하 선생을 추모하는 순서부터 시작됐다.

촛불대회 참가자들은 △국정원의 대선개입 의혹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박근혜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나설 것△권영세·김무성 국정조사 출석 등을 요구했다.

17일 범국민 촛불대회 사진. 트위터 이용자 910D3B2 제공

시국회의측에서는 장주영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회장이 단상에 올라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관련자들을 색출해서 제대로 처벌하지 않으면 앞으로 이같은 범죄가 계속 될 것이다.이번 기회에 철저하게 처벌하지 않으면 국정원이 국민들을 우습게 볼 것이다”라며 “국정조사를 제대로 못하면 결국 특검으로 갈 수 밖에 없다”며 국정조사를 제대로 진행할 것을 촉구했다.

이날 야당 국회의원들은 단상에 올라 박근혜 대통령의 적극적인 행동을 촉구했다. 양승조 민주당 최고의원은 “박근혜 대통령은 국정원 불법 대선 개입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며 “특검을 도입해 진상을 규명하라”고 주장했다. 심상정 정의당 원내대표는 “정상적인 대통령이라면 마땅히 국기 문란를 엄단하고 다시는 국정원의 정치개입 역사를 끝내겠다 선언해야하는 것 아니냐”며 “이런 국가 중대사를 야당 대표들과 만나서 상의하지 않는 박근혜 대통령은 뭐하고 있는거냐”고 말했다.

17일 범국민 촛불대회 사진. 트위터 이용자 seojuho 제공

청소년들도 목소리를 냈다. 경기도 성남 이우학교에 다닌다는 남학생 2명이 단상에 올라 “이 일이 아무리 봐도 그릇된 일이라는 생각에서 나왔다”고 말했다. 또 “사정상 집회를 못나가지만 촛불을 들고 응원하는 학생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었다.청소년들도 (국정원의 정치개입을 규탄하는)목소리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며 ‘광장에 모인 촛불도 광장에 모이지 못한 수많은 촛불도 모두 함께 입니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직접 제작한 3분가량의 영상을 촛불대회에서 상영했다.

촛불대회에 참석한 시민들은 전날 열린 ‘국가정보원 댓글 의혹 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1차 청문회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표현했다.

17일 범국민 촛불대회 사진. 트위터 이용자 swatchzz 제공

이날 2번째로 집회에 참석했다는 송아무개(32)씨는 선서를 거부하고 혐의를 부인한 원세훈 전 국정원장과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에 대해 “뻔뻔스럽다”고 말했다. 서아무개(28)씨는 “솔직히 (청문회가) 제대로 될 거라고 생각도 안했다”며 국정조사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다. 9살, 5살 두 아들을 데리고 인천에서 온 이로사(39)씨는 “어제 국정감사 청문회는 황당하기 그지없다. 완전히 국민을 우습게 본다”고 말했고 남편과 함께 나온 이아무개(55)씨는 “청문회라면 알권리를 충족시켜줘야지.어제는 엉망이었다. 화가 나서 오늘 처음 나왔다. 민주당도 좀 날카롭게 질문을 던져 줬다면 좋았을 걸”이라며 실망감을 표현했다.

한편 이날 7시30분께 보수단체 자유대학생연합 소속 6명의 회원들이 촛불대회 장소로 접근해 기습 시위를 열어 충돌이 벌어질 뻔 해 경찰이 제지하기도 했다. 같은 시간 시청광장 주변에서 열린 맞불집회에 참여한 보수단체 회원 1700여명과의 충돌을 우려해 경찰 69개 중대 5500여명이 파견됐지만 별다른 충돌없이 문화제가 마무리됐다.

17일 오후 서울시청 광장에서 시민들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국정원 정치공작 대선개입 진상 및 축소은폐 의혹 규명을 위한 시민사회 시국회의의 제8차 범국민촛불집회‘에서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에 대한 박 대통령의 사과를 촉구하는 대형 현수막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뉴시스

이날 촛불대회는 9시 20분께 끝났다. 다음 ‘제9차 국정원 규탄 범국민촛불대회’는 8월23일에 열릴 예정이다.

최유빈 기자 y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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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했다" 자기 부고 써놓고 떠난 작가

[중앙일보]입력 2013.08.14 01:38 / 수정 2013.08.14 03:49

유머 칼럼 쓰던 61세 미국 여성
"이 글 쓸 시간 있던 게 말기암 장점…길게 쓰면 원고료 많아지니 생략"
신문에 실리자 SNS로 전국 퍼져

 


당신이 숨진 뒤 신문에 부고가 실린다면 누가 쓰는 것이 당신의 삶과 추억을 가장 잘 담을 수 있을까. 가족이나 친구라면 분명 당신이 남기고 싶은 발자취를 잘 기록해 줄 것이다. 하지만 그들조차도 당신이 인생의 반려자를 만났던 운명적 날의 떨림은 알지 못할 것이다. 부고에 이를 제대로 담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서 단 하나 당신 자신뿐이다.

 미국 일간지 시애틀타임스에는 지난달 28일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여성 작가 제인 로터의 부고가 실렸다. 761단어로 구성된 이 부고를 쓴 사람은 바로 로터 자신이었다. 유머 칼럼니스트로 활약했던 로터가 쓴 자신의 부고는 SNS 등을 통해 미 전역에 퍼지며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그리고 그가 원했던 대로 많은 이를 울리고 웃음짓게 했다.

 로터의 부고는 시작부터 그다웠다. “말기 자궁내막암으로 죽어가는 것의 몇 안 되는 장점은 바로 내 부고를 쓸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귀찮게 자외선차단제를 챙겨 바르거나 콜레스테롤 걱정을 할 필요 없는 것도 좋다).”

 로터는 자신이 1952년 시애틀에서 태어났고 워싱턴대에서 역사학으로 학사 학위를 받았다고 했다. 그는 작가협회 콘테스트에서 수상한 자신의 코믹 소설 『베티 데이비스 클럽』을 소개하며 “아마존닷컴에서 구입할 수 있다”는 홍보도 빼놓지 않았다. “내 유머 감각을 보여주기 위해 농담 몇 개를 하고 싶지만 부고 양이 길어지면 시애틀타임스가 지급해야 하는 원고료도 많아지니 이만 생략하겠다”는 농담도 했다.

 그는 결혼 30년째인 남편 로버트 마르츠에 대해 “밥(로버트의 애칭)을 만난 것은 75년 11월 22일 파이어니어광장의 술집이었다. 그날은 정말이지 내 생애 가장 운 좋은 날이었다. 밥, 당신을 하늘만큼 사랑해”라고 사랑을 표현했다. 딸 테사와 아들 라일리에게는 “인생길을 가다 보면 장애물을 만나기 마련이란다. 하지만 그 장애물 자체가 곧 길이라는 것을 잊지 말렴”이라는 조언을 남겼다.

 로터는 죽음의 공포를 이겨낸 긍정적인 사고방식도 소개했다. 로터는 “내가 바꿀 수 없는 일로 슬퍼하는 대신 나의 충만했던 삶에 기뻐하기로 결정했다. 태양, 달, 호숫가의 산책, 내 손을 쥐던 어린아이의 손… 이 신나는 세상으로부터 영원한 휴가를 떠나는 것”이라고 적었다. 로터는 “이 아름다운 날, 여기 있어서 행복했다. 사랑을 담아, 제인”이라고 부고를 끝맺었다. 그는 존엄사를 택했고 지난달 18일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눈을 감았다. 로터의 부고는 이달 초 뉴욕타임스(NYT)·USA투데이 등 유력 매체들이 인용 보도하며 널리 알려졌다. 로터의 남편 마르츠는 NYT에 “제인은 삶을 사랑했기에 부두에 널브러진 생선 같은 모양새로 삶을 끝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에도 창가에 만들어놓은 새집에 벌새가 날아드는 것을 보고 싶다며 콘택트렌즈를 빼지 않겠다고 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NYT는 “로터가 쓴 글의 힘은 그가 무덤에서 독자들에게 이야기한다는 데서 나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호사종마(好事從魔)

“가라지의 비유(마태 13,24~30; 36~43).”

 

 

 

'가라지'라는 게 어떻게 생긴 건지? 중학교 때까지 농사하는 집안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웬만한 건 아는데... 논에는 '피'라는 게 있지요(표준어로는 뭐라는지?) 도시 대학생들의 농촌활동에는 피를 뽑는다고 논에 들어가서 벼를 뽑고 옥수수를 풀로 알고 뽑아버리는 학생들이 늘 있습니다. 잎이 비슷하게 생겨서 헷갈린 거죠.


벼는 대공 마디가 없고 피는 벼보다 키가 크고 꽃도 일찍 피어나니까 성장한 다음에는 다 구분이 되지만, 그 때는 이미 늦어서 뽑는다는 어렵습니다. 농부들 눈에는 구분이 되지요. 피는 거름만 실컷 빨아먹은 기생초입니다. 하여간 가라지건 피건 개망초건 명아주건 농부는 심지도 않았는데 잡초는 왜 그렇게 잘 자라는지? 아마도 인간이 돌보지 않은 것은 하느님께서 돌보기 때문일거라고 생각합니다. '호사종마(好事從魔)', 좋은 일에는 항상 마가 끼게 마련이지요. 지금도 우리 마을 가족들은 잡초와의 전쟁이예요. 예수님께서 농부가 기다리는 곡식(벼)과 잡초(피)의 비유를 드셨습니다. 농부가 애써 심고 가꾸는 곡식은 하늘나라의 이상과 가치이고 이성적 생각과 태도입니다. 마을의 삶으로 볼 때는 좋은 생각, 겸손, 헌신, 마음 열기, 양보, 희생, 용서, 배려심, 솔선수범 같은 덕목들이겠지요.

우리는 매일 생활을 성찰하면서 그런 공동체적 가치들의 성장을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런데 참 알 수 없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좋은 생각을 하고 겸손과 양보와 배려로 희생하려면 꼭 알 수 없는 어떤 속삭임이 있는 겁니다.

'왜 맨날 나만 양보해야 하지?' '이러면 날 호구로 알거야!' '이렇게 희생해주면 그에게 나쁜 버릇이 될거야?' '나도 강하다는 걸 보여줘야 해!' '나도 성깔 있다는 걸 알게 해줘야지!'

이런 속삭임이 일어난단 말이지요. 교오한 마음과 시기와 질투, 욕심과 인색함의 타당한 이유들이 슬그머니 올라오는 거지요. 좋은 생각을 곁에는 슬그머니 어느 새 감정의 한 편에 앉아있고 냄새를 피운다는 말입니다.


그런 나쁜 감정이나 생각은 좋은 생각과 동시에 나타나기도 하고 시간차, 공간차를 두고 나타나기도 해요. 대체적으로는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버젓이 버티고 앉아있는 형국입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악마가 그렇게 한 것이라 합니다. 악마란 좋은 마음 좋은 결심 좋은 생각 바로 뒤에 그림자로 붙어 있고 친구인척 늘 곁에 얼정거린다는 사실을 명심할 일입니다. ‘호사종마(好事從魔)’ 라 하겠지요. ‘좋은 생각엔 늘 욕심도 따른다!’

공동생활에서 내 생활태도에서 칠죄종과 같은 부정적 감정이나 본능이 자주 나타난다는 것은 내 안에 악마가 공존한다는 것입니다. 내 성품에 하늘나라도 있고 악령의 심보가 있다는 말인데,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상대방도 누구나! 이걸 예수님은 마태오 복음에서 '가라지' 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산위의 마을에서는 남자건 여자건 '콩밭매는 아낙네야~' 노래를 수십번 불러야 한 여름을 보냅니다. 김을 매더라도 풀이 작을 때면 대충 뽑기 쉽고 성큼성큼 뽑을 수 있지만 대공이 굵어지면 나무 뽑아내듯 합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예취기를 쓸 때도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가치를 부정하는 가라지의 모습들은 어렸을 때 뽑아버려야 합니다. 어른이 되어서 뽑는다는건 몸시 힘들기 때문에 수도원도 신학교도 공동체도 어린 시절에 선택해 어린 풀을 뽑고 좋은 모종을 정식하는 것이 좋겠지요. 예의염치(禮義廉恥), 인의예지(仁義禮智) 등 기본적 소양과 인성교육은 어른이 되면 이미 늦거나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좋은 것 나쁜 것 가릴 것 없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판단하고 생활을 하더라도 종마(從魔)가 없고 숭고한 덕목들, 하늘나라 자녀, 밀뿐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 게 가능할까요?

그걸 완덕(完德: 아빌라의 데레사)의 상태, 혹은 합일(合一: 십자가의 성요한)이라고 합니다. 공자께서도 “七十而, 從心於欲 不足踰拒(칠십에 이르니, 욕심을 부려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더라).” 하셨습니다. 성현들이 그렇게 말씀하신 걸 보면 충분히 우리에게도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들에게 가장 최선 최고의 경지는 '좋은 습관' 입니다. 습관이란 행동이 스스로를 기억하여 생각이 자동 센서화 된 상태를 말합니다. 생각에는 유혹이 많고 시험에 들기 쉽지만 습관으로 이루어지는 행동은 이미 행위가 이루어져버렸기 때문에 악마도 기회를 놓쳐버리고 어떻게 해보려면 고심해야 하겠지요. 발붙일 기회를 자주 놓칩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이여, 오늘도 좋은 습관! * (2013. 7. 30)

 

 

 

심리치료 전문업체 마인드프리즘의 정혜신 대표는 본연의 자아와 사회적 자아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면 마음이 병든다고 말한다

 

 

 

정신과전문의 정혜신은 지난 8년간 SE(Self-Encounter: 자기조우) 프로그램을 통해 CEO·정치인 등 1000여명에게 자아성찰과 치유의 장을 마련했다. 특히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를 위한 치유 프로그램을 이끌어 관심을 모았다. 그는 최근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과 의기 투합해 ‘직장인 마음 건강 되살리기’에 뜻을 모으고 본격적인 활동에 돌입했다(김 의장은 지난해 초 정혜신 대표가 운영하는 마인드프리즘의 지분을 70.5% 인수했다).

올 한해 판매·서비스·상담 분야 종사자 등 다양한 직업군에서 500여 명을 선정해 마인드프리즘의 심리치유 프로그램 ‘내 마음 보고서’를 무료로 체험하게 하는 것이 골자다. 직업과 성격을 달리하는 많은 사람의 마음속 깊이 감춰놓은 이야기를 접하며 그가 내린 결론은 마음의 여유와 행복은 경제적 상황보다 개인의 성숙도와 관련 있다는 것. “가난한 사람은 행복할 수 있어도 부자들은 행복하기 어렵다”는 역설을 강조하는 정 대표에게 CEO의 행복을 자문했다.

행복이 성숙도와 관련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성숙한 사람은 자신의 사회적·직업적 페르소나(persona, 가면)를 상황에 맞게 바꿔 쓴다. 회사에서는 임원으로 대접받더라도 가정에 돌아오면 아버지와 남편 역할을 충실히한다. 반면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직업적 자아와 자신을 과도하게 동일시하는데 그로 인한 자아상실이 불행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집에서 아내가 남편이 아닌 ‘회장님’이라 부르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TV 드라마 속 기업인의 모습이 그 전형이다.

성공한 경영자는 행복하기 어렵다는 의미인가?

내면으로 들어가면 직원이나 경영자나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본연의 자아와 사회적 자아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면 마음이 병든다. 성공한 기업 경영인은 그 거리가 멀어지기 쉽다는 것이 문제다. 사회적 성공이 어느 정도 자기 억압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옛말에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하는데 그래도 먹고 살만해야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것 아닌가?

오너 회장을 만나 이야기 나누면 ‘사실 나 돈 없어요’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수백억원을 들여 재단을 만들고도 자기보다 돈 많은 사람을 의식하며 부끄러워하는 사람도 봤다. 기업도 경기가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위기의식을 조장해 직원들을 압박한다. 결국 여유와 배려는 경제적 상황이 아닌 사람의 성숙도와 관련 있다.

오너와 경영자의 심리적 건강이 기업에 미치는 영향이 적잖다.

물론이다. 물질중심적인 가치가 팽배한 우리 사회에서 재계 리더의 영향력을 고려하면 국가 전체에 미치는 영향도 상당할 수 있다. 달라이 라마에게 재테크를 자문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기업인으로서의 성공이 인격적인 성숙을 담보하지 않음에도 기업 오너에게 인생의 조언을 구하는 자연스런 모습이 이를 증명한다.

다분히 권위적인 우리 기업문화의 폐해는 없나?

우리 기업문화는 구성원 개개인의 차이에 주목하지 않는다. 회사에 일정 기간을 부분적으로 기여할 수 있지만 결국 ‘나’로 충실히 살기 위해 태어난 건데 말이다. 삶에는 가정·친구 등 여러 영역이 있고 직장도 그 중요한 일부다. 하지만 사람을 고용했다고 노예로 산 것이 아닌데도 과도하게 일을 시키고 희생을 강요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모습을 종종 본다. 회사와 직원들 사이에도 돈과 성공을 위해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암묵적 동조가 이뤄진 듯하다.

그렇다면 치유는 어떤 과정을 통해 이뤄지나?

자신의 맨 얼굴을 보게 해 주는 것이 치유의 시작이다. 어떤 오너 회장은 친구도 소수만 만나고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지만 경영 성과는 좋았다. 너무 내향적이라 기업경영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적극적이고 외향적인 사람을 임원으로 뽑았다. 하지만 성격이 다른 임원과 관계를 형성하는데 에너지 소모가 너무 커져 힘들어 했다. 결국 심리분석을 통해 자신의 콤플렉스가 사실은 장점이라는 것을 깨닫고 편안한 마음으로 업무에 매진하게 됐다.

자신의 본 모습을 발견하는 것만으로 도움이 된다는 말인가?

성찰을 통해 자기 정리가 되면 현실을 합리적이고 담담하게 볼 수 있고 그로 인해 에너지가 축적될 수 밖에 없다. 운전 중 가장 사고가 많이 날 때가 안개 낀 날 아닌가? 대인관계의 안개가 걷히면 자동차 급브레이크 밟는다든지 조바심 내느라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모할 필요가 없어진다.

CEO의 달라진 심리상태가 경영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 예는?

어떤 오너 회장상담을 받고 돌아가서 “50년 넘게 살아오면서 자기 본 모습을 처음 봤다”며 “선생님 살려주세요”라고 문자를 보내왔다. 특별히 아픈 기억이 있지는 않았지만 평생 거울 없이 살다 본연의 모습을 마주 대하고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 후 다시 만나 이야기 했는데 “본인이 구조조정을 많이 했는데 그것을 정책적 결정이라고만 생각했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털어놨다.

자신을 돌아보고 오너가 아닌 한 인간으로 섬세한 감정을 회복하고 나니 직원은 물론 아내와 자식의 감정에 대한 공감이 일순간에 쓰나미처럼 밀려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에는 그 회사의 퇴직 임직원에 대한 배려가 많이 달라졌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구조조정을 하더라도 직접 당사자를 만나, 회사가 처한 상황 때문에 그런 것이지 당신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며 격려한다고 들었다.

‘동업자’ 카카오 김범수 의장과의 인연은?

오래전 NHN 이해진 의장의 심리상담을 진행한 것이 인연이 돼 당시 (NHN의 관계사인) 한게임 대표였던 김 의장과 다른 임원들의 심리상담도 맡았다. 소박하고 좋은 분인데 다 인간관계에 대한 섬세하고 예민한 통찰의 소유자기도 하다. 무엇보다 그 소박함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대단하다.

김범수 의장과 이해진 의장을 비롯한 젊은 오너 기업인은 이전 세대 기업인과 어떤 부분이 다른가?

두 사람과 나성균 네오위즈홀딩스 대표처럼 자기가 가진 부를 사회적으로 어떻게 의미 있게 사용할지 고민하는 CEO가 많다. 정보기술(IT) 사업가뿐만이 아니다. 고무적인 현상이다.

지난 대선 기간 중 문재인 후보의 찬조연설자로 나섰는데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닌가?

오랫 동안 (쌍용차) 해고 노동자의 심리치료를 맡으며 느낀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 나섰을 뿐 정치적인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세상의 길들은 몸속으로 흘러들어온다."

소설가 김훈의 에세이 '자전거 여행'에 나오는 첫 문장이다. 소설가보다 자전거 라이더로 불리기를 더 좋아한다는 김훈 아저씨가 자전거로 미처 경험해보지 못한 게 있으니 바로 자전거 캠핑여행. 세상의 길들 위에 누워 오롯이 야영을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잠시나마 '금속말 탄 유목민'이 된 이채로운 경험과 추억을 남길 수 있다. 더불어 경치까지 좋다면 여행의 즐거움이 배가되기도 한다.

흔히 캠핑이라고 하면 차 안에 캠핑 용품을 싣고 떠나는 오토캠핑을 연상하기 쉽지만, 배낭 하나에 모든 캠핑 도구를 짊어지고 다니는 백패킹(Backpacking)과 자전거에 캠핑 도구를 싣고 떠나는 여행인 자전거 캠핑(Bicycle Camping)도 있다. 이 두가지는 대표적인 미니멀(미니멀리즘: 최소주의) 캠핑으로 불편함을 기꺼이 혹은 즐거이 받아들이고, 여정(여행의 과정)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잘 맞는다.

더운 여름날에도 땀 흘리며 달리는 '쾌감'을 느끼고 싶다. 쏟아지는 비를 맨몸으로 맞아보고 싶다. 정해진 캠핑장이 아닌 야외에서 텐트를 치고 잠을 자고 싶다. 길을 헤매거나 찾아갈 땐 GPS보다는 JPS(주민 대화형 시스템)이 좋다. 때론 배고픔과 목마름에만 충실한 단순하고 원초적인 삶을 경험해 보고 싶다…. 여기에 해당되는 사항이 많으면 많을수록 당신은 자전거 캠핑족의 유전자를 지니고 있을 확률이 높다.

금속말 탄 유목민 되기, 패니어와 트레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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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에 짐가방(패니어)을 장착하고 그 속에 캠핑장비를 수납한 자전거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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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용 트레일러는 보다 많은 짐을 싣고 캠핑여행을 할 수 있다.
ⓒ 박주하

 


캠핑의 또 다른 진미를 맛볼 수 있는 자전거 캠핑, 저도 참 좋아하는데요 (이영돈 PD 성대모사). 자전거에 집 한 채를 실어야 하는 특성상 초경량, 울트라 라이트, 미니멀리즘을 지향하며 짐을 줄이는 것이 중요하다. 기본적으로 들어가며 자전거 캠핑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텐트, 침낭, 매트, 코펠 등은 모두 1~2인용의 작고 가벼운 장비들을 사용하면 된다 (매트는 공기 주입식 베개가 붙어있는 에어매트가 편리하고 수납에 좋다). 여기에 자전거 바퀴에 펑크가 날 것을 대비해, 예비용 튜브와 비상용 수리기구는 잊지 말고 필히 휴대해야 한다.

준비된 캠핑장비들을 자전거에 수납하기만 하면 되는데 보통 두 가지 방법이 쓰이고 있다. 자전거에 부착하는 짐 가방(패니어, pannier)이나 자전거용 트레일러를 이용한다. 패니어는 위 사진처럼 캠핑장비들이 모두 수납이 되며, 비가 내릴 때를 대비해 방수기능까지 갖추고 있다. 기차나 고속버스로 여행지 부근까지 이동할 때도 편해 대부분의 자전거 캠핑족들이 패니어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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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호 기차 카페칸에 생겨난 자전거 거치대.
ⓒ 김종성

 

참고로 무궁화호 기차의 카페 칸에 자전거 거치대가 있어 접이식 자전거가 아닌 일반 자전거도 기차에 실을 수 있게 되었다. 철도청 홈페이지에서 기차표 예약 시 자전거 거치대 예약도 같이 할 수 있으며 따로 이용료는 없다.

트레일러는 자전거 뒷바퀴에 연결하는 일종의 짐수레로, 자전거용 제품이 따로 있다. 무게 중심이 낮아 안정적이고 많은 짐을 수납할 수 있다. 기차나 고속버스를 이용하기 힘들어 중거리 여행에 적합하다 (서울로 치면 춘천, 대부도, 강화도 여행 등). 트레일러에 포함된 짐 가방도 방수기능이 있는 천이다.

마침내 금속말 탄 유목민이 되었다면 다음은 자전거 캠핑 여행지 선택. 다행히 어디로 갈 것 인지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한 번 캠핑을 나서보면 '우리나라에 이렇게 캠핑장이 많았구나'라고 실감하게 된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지도 메뉴에서 가고 싶은 '동네 지명+캠핑장'을 치면 지도상에 해당 캠핑장들이 이름과 함께 우수수 나온다. 최근 캠핑 붐을 타고 전국에 400여 곳의 오토캠핑장이 생겨났다고 한다. 자가용을 위한 오토캠핑장이지만 자전거 여행자도 사용할 수 있다.

 


나만의 소울 플레이스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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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정자에 텐트를 칠 땐 마을회관에 가서 양해를 구하는 것이 좋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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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형지물을 이용 좁은 자리에서도 캠핑을 할 수 있는 자전거 캠핑.
ⓒ 박주하

 


자전거 캠핑 여행의 장점은 여유롭고 자유롭게 구석구석을 돌아보는 재미가 남다르다는 점이다. 버스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차비를 준비할 필요도 없다. 가고 싶은 곳까지 두 바퀴를 굴려서 이동하면 그만이다. 야영장비와 취사도구가 있으니 잠자리와 식사에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도를 닦듯 반복적으로 페달을 돌리다보면 온갖 잡념이 날아가고, 길들이 몸속으로 들어오며 아름다운 풍경과 내가 하나가 되는 신묘한 경험까지 할 수 있다.

이렇게 여정이 풍성한 자전거 캠핑 여행족은 어느 마을의 오래된 느티나무 밑 평상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더위를 식혀줄 바람과 그늘이 있는 마을 정자는 자전거 여행자에게 천국이 되기도 하고, 물마시며 휴식도 취할 겸 잠시 누워 즐기는 낮잠은 꿀같이 달콤한 추억으로 남기 때문이다. 굳이 속도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자전거 유람'이다.

안내 책까지 나올 정도로 전국에 오토캠핑장이 생겨나고 있지만 자전거 캠핑족에겐 따로 정해진 야영장은 없다. 강변, 해변가, 마을, 들판, 나무 밑…. 세상의 모든 곳이 나만의 캠핑장이다. 여행을 가려는 지역에 캠핑장이나 야영 데크가 있는 자연 휴양림이 있으면 좋겠지만 예약이 꽉 찼거나 없어도 상관이 없다. 자전거는 전천후 캠핑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마을마다 한두 개 씩은 꼭 있는 정자, 마을회관 앞, 동네 체육공원, 심지어 교회 안마당도 이용가능하다(기차역 주변은 피하자, 새벽에도 기차들이 쇳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마을 정자를 이용할 땐 마을회관에 가서 주민들에게 정중히 부탁해 양해를 얻는 것이 좋으며, 화장실이 가까운 곳이 세수나 세탁, 전자기기 긴급 충전 등 여러모로 유리하다. 외지인이지만 사람의 경계심을 풀어주게 하는 자전거 덕분에 지역 주민들은 대부분 야영을 허락해 주고, 운이 좋으면 마을회관에서 쉬거나 식사를 권하기까지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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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소울 플레이스를 만나러 가는 자전거 캠핑여행.
ⓒ 김종성

 


멋지고 시설 좋은 자연 휴양림이나 오토캠핑장은 아니지만 계획 없이 우연히 야영한 곳에서 '죽어도 좋을 만큼 기억 속에 오래 남는 내 인생의 마지막 한 곳'이랄 수 있는 소울 플레이스(Soul Place)를 만나기도 한다. 돌돌돌~ 강물소리가 자장가처럼 아득하게 들려오는 전북 임실 섬진강변의 구담마을 정자, 정다운 모래강 내성천이 흐르는 경북 예천 회룡포 마을 무료 야영장, 용천수 노천탕이 있는 작고 아담한 바닷가 제주 애월읍의 곽지과물해변가 등이 그런 곳이었다. 자신의 나머지 인생을 후회 없이 숨 쉬게 해줄 수 있는 소울 플레이스를 간직했으니, 여름날의 자전거 캠핑여행은 비록 무모했으되 무용(無用)하지는 않았던 셈이다.

종종 그런 풍경은 자전거 여행자의 운명을 바꿔 놓기도 한다. 욕망의 바벨탑으로 이루어진 이 첨단의 자본주의 세상에서 성공의 논리와 승리의 질서를 따르지 않을 수 없고, 이 세상이 온통 생존과 성공을 위한 싸움터라고만 여겨왔던 한 사람은 어느 한가롭고 허허롭고 그윽한 들판에서 비로소 자신이 오래도록 속고 살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풍경 앞에서 그는 싸움터를 등진 채 이전과는 다른 삶을 향해 뚜벅뚜벅 걸음을 옮긴다. 단지 아름답고 멋진 경치를 넘어 풍경이 운명을 바꿔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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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정이 풍요로운 자전거 캠핑족은 이런 나무 밑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 김종성

 


그리 크지 않은 땅덩이지만 때론 몇 시간을 달려도 사람을 만날 수 없을 때도 있다. 하지만, 외롭거나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무도 아무것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지만, 그 빈 공간과 멈춰버린 시간은 이름 붙일 수 없는 무언가로 가득 차 있다는 걸 자전거 페달을 부지런히 돌리다 문득 깨닫게 된다.

자전거 캠핑여행은 새로운 것을 보고 사람을 만나고 자연과 스치며 긍정적인 힘을 얻는 시간이기도 하지만, 여정 속을 달리며 나와 만날 수 있는 의미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좋다. 도시의 삶은 나 자신과 마주할 시간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다. '먹고 사느라' 바쁜 일상의 삶에 매몰되고 방치되었던 내 안의 나와 오롯이 마주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있다는 것, 자전거 캠핑여행의 또 다른 매력이 아닐까 싶다.

일찍 일어나 하루를 계획하고 부지런히 달리며 정신을 집중하기, 소박하게 먹고 가진 것을 줄이기, 여행 중 받은 친절에 감사하고 이방인으로서 겸손해하기, 모든 것을 새롭게 보기…. 집에 돌아온 후에도 자전거 여행자의 마음으로 일상을 살면 더욱 좋겠다.


 

 

 
구문소를 살펴 본 우리들은 인근 동점동에 위치한 '태백고생대자연사박물관'으로 이동했다. 지난 2003년부터 2010년까지 200억 원을 들여 건립한 이 박물관은 고생대를 주제로 한 전문박물관으로 경상도에서 태백으로 진입하는 관문에 위치하고 있어 누구나 학습과 체험을 위해 찾고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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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백고생대자연사박물관 박물관 내부
ⓒ 김수종

 


사실 이곳 박물관 내부는 이미 박제된 기념물을 전시하고 있는 공간일 뿐이다. 그러나 외부는 실재로 지금도 살아있는 고생태 지층으로 자연사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야외전시장이다.

고생대 퇴적침식지형과 삼엽충·완족류 등 다양한 산출을 보이는 직운산층 등이 산재해 있어 그야말로 살아 있는 현장체험 학습장으로 인기가 높다. 전시물의 선캄브리아기 20%, 고생대 60%, 중·신생대 20%로 구성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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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백고생대자연사박물관 공룡의 뼈
ⓒ 김수종

 


우리가 방문한 당일에는 '생물의 독(毒)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동물·식물·미생물의 몸속에서 생성되는 독과 산·들·바다에서 자라는 독을 품은 생물, 독을 이용한 의약품의 개발 등 독의 효능과 기능을 공부하는 멋진 학습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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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백고생대자연사박물관 생물의 독 특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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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을 전부 둘러 본 우리들은 다시 차를 타고 황지동에 위치한 '송이닭갈비'집으로 이동하여 태백의 명물 중에 하나인 '물 닭갈비'를 먹으러 갔다. 춘천 닭갈비는 통상 채소와 닭고기를 볶아서 먹는 형식인데, 태백은 독특하게도 채소와 닭고기에 육수를 부은 다음 당면·라면사리·고구마·떡·냉이를 넣어서 전골처럼 끓여먹는 게 특징이다.

여기에 마지막으로 약간의 나물과 밥을 볶아서 먹는 맛도 남다르다. 태백시에서는 지역 특산품으로 상표등록을 하고 싶기는 한데, 현재 태백에 닭을 잡는 도계장이 없는 관계로 상표등록이 쉽지 않다고 한다. 상표등록을 위해서는 현지에서 생산된 닭을 현지에서 잡고, 현지에서 생산된 푸성귀 등을 이용해 만든 음식이라는 조건이 있는가 보다.

태백 닭갈비, 참 특이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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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백시 물 닭갈비
ⓒ 김수종

 


우리는 태백에서도 3대째 물 닭갈비 장사를 하고 있다는 '송이닭갈비'집에서 3대를 잇고 있는 아들이 운영하는 가게에서 깨끗하고 깔끔한 맛의 물 닭갈비를 맛있게 먹었다. 개인적으로는 태백에서는 감자 수제비·곤드래 밥(산채 비빔밥)·물 닭갈비가 최고의 음식인 것 같다.

식사를 마친 우리들은 '삼수령(三水嶺)'을 넘어서 한강의 발원지인 '검룡소(儉龍沼)'로 행했다. 삼수령을 넘기 전까지는 사실 나는 왜, 태백에 한강과 낙동강의 발원지가 모두 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삼수령을 넘으면서 지도를 살펴보니 태백시의 대부분은 사실 백두대간의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고, 북쪽의 일부인 삼수동 지역만 백두대간을 넘어서 한강수계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신동일 해설사의 설명에 따르면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태백은 백두대간을 중심에 두고 구분하는 현재의 영서·영동의 구별법으로 보자면 영동이 아니라 영남지방이다. 지도를 보니 태백은 강원도에서 유일한 영남지방으로 낙동강 수계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쪽의 삼수동 지역만 백두대간을 넘어서 한강 수계에 위치하고 있어 영서지방이라고 할 수 있는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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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룡소 가는 길 물푸레 나무
ⓒ 김수종

 


따라서 태백에서 한강과 낙동강이 시작되는 것이다. 신 해설사는 "백두대간 선상에 있는 삼수령은 봉우리를 중심으로 북쪽에 내리는 비는 한강으로 흘러가고, 남쪽에 내리는 비는 낙동강으로, 동쪽에 내리는 비는 오십천으로 흘러간다"고 설명했다.

삼수령은 천의봉과 덕항산을 잇는 고개로 삼척지방 사람들이 난리를 피해 이상향(理想鄕)으로 알려진 황지로 가기 위해 이곳을 넘었기 때문에 '피해 오는 고개'라는 뜻으로 '피재'라고도 한다.

정상에는 전망대 구실을 하는 삼수정이라는 정자각과 조형물이 있고 주변은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해발 고도 920m 정도 되는 곳이라, '푄 현상'으로 눈비가 많은 곳이라고 한다. 실재로 삼수령에 올라 물길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한강과 낙동강으로 흘러가는 물길뿐이다. 오십천으로 가는 물길은 수맥으로 흘러 삼척에서 가서야 물길을 드러낸다.

삼수령을 넘으면 매봉산의 고랭지 배추단지와 풍력발전단지, 귀네미골의 배추단지와 풍력발전단지 등을 볼 수 있다. 특히 귀네미골에서는 동해바다를 눈으로 볼 수 있는 풍경이 연출되기도 한다.

 

 

 


다시 차를 타고 금대봉 아래에 있는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73호인 검룡소로 행한다. 사실 불과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한강의 발원지는 '오대산 우통수'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때부터 몇 차례의 실측 결과 오대산보다 30km 이상 멀리 자리 잡고 있는 검룡소가 지난 1987년 국립지리원에 의해 최장 발원지로 공식 인정됐다.

금대봉의 왼쪽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검룡소는 서해에 살던 이무기가 용이 되려고 강줄기를 거슬러 올라와 이곳에서 머무르고 있다는 전설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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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룡소 가는 길 한강의 발원지
ⓒ 김수종

 


금대봉 기슭에 있는 작은 샘들인 제당굼샘과 고목나무샘, 물골의 물구녕 석간수와 예터굼에서 솟아나는 물이 지하로 스며들어 이곳에서 다시 솟아난다.

둘레 약 20m이고, 깊이는 알 수 없으며 사계절 9℃의 지하수가 흘러나오는 냉천(冷泉)으로 하루 2,000~3,000 톤씩 석회암반을 뚫고 솟아 폭포를 이루며 쏟아진다.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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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룡소 안내문 태백시
ⓒ 김수종

 


오랜 세월 동안 흐른 물줄기 때문에 깊이 1∼1.5m, 너비 1∼2m, 길이 20m 이상의 암반이 구불구불하게 폭포를 이루며 패여 있어 마치 용틀임을 하는 것처럼 보여 신기감이 더하다. 소의 이름은 물이 솟아 나오는 굴속에 검룡이 살고 있다 해서 붙여졌다.

물은 정선의 골지천과 조양강, 영월의 동강을 거쳐 단양·충주·여주로 흘러 경기도 양수리에서 한강에 흘러든 뒤 서울을 거쳐서 김포에서 임진강과 마지막으로 만난 뒤 서해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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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룡소 시작은 작지만 끝은 창대하다
ⓒ 김수종

 


금대봉 일대는 환경부가 정한 자연생태계보호구역으로 국내 최고의 야생화 단지로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동시에 간직한 들꽃들을 관찰하기 위해 카메라를 든 탐방객들이 희귀 동식물을 보기 위해 많이 오는 곳이다.

아울러 이곳은 물놀이나 취사·야영 등이 금지돼 있다. 매년 8월 첫째 주 일요일에 태백문화원 주최로 한강대제가 열린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우리들은 왕복 5km 정도 되는 물길을 따라 올랐다.

신 해설사는 산책로를 오르면서 계속해서 나무와 풀·꽃들에 대한 설명과 함께 검룡소와 한강의 물줄기에 대한 개략적인 해설도 해줬다. 물푸레나무·돌배나무·박달나무·산뽕나무·자작나무·굴참나무 등 이름만 알지 실제로는 전혀 구분이 되지 않던 나무의 구별법은 무척 재미가 있었다.

약초와 풀 등도 설명을 해줬는데,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름 공부가 많이 된 것 같다. 검룡소를 오르면서 "자연학습과 산책로로 이 길을 더 멋지게 개발하면 좋을 것 같다"고 했더니 신 해설사는 "이곳에서부터 황지까지를 연결하는 한강과 낙동강 발원지 답사 코스는 거의 길 개척이 완료됐다"고 했다. 언제 한 번 날을 잡아 이곳을 걸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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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룡소 폭포물이 시작된다
ⓒ 김수종

 


30분 정도 길을 오르니 검룡소가 보인다. 더운 여름날에는 시원한 바람이 막 불어올 것처럼 깨끗하고 청량감이 넘치는 맑은 물이다. 주변의 녹색과 어우러진 풍광이 절로 감탄이 나온다. 이곳이 말로만 듣던 한강의 시작점이구나! 잠시 기도를 한 다음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이제까지 본 것과는 전혀 새로운 느낌의 시작과 출발을 알리는 작지만 장대함으로 끝나는 한강의 발원지에서 숙연함을 느낄 수 있었다. 너무 기쁘고 감격적이었다. 부모님이 주신 건강한 두 다리에 멋진 경치를 볼 수 있는 두 눈이 있어 무척 행복했다.

잠시 쉬었다가 다시 길을 돌아 주차장으로 왔다. 비가 조심씩 오고 다시 본격적으로 장마가 시작되려나 보다. 이제 서둘러 서울로 가자. 길은 멀지만, 그리고 행복한 이틀 동안의 태백여행이었다. 즐거웠다.

 

트레킹을 준비하면서부터 시작된 고민은 해발 5416m 쏘롱라를 넘는 것이었습니다. 해발 5000m 높이는 경험해 보지 못했기에 기대와 두려움이 교차되었습니다. 우려와는 달리 어제 무사히 쏘롱라를 넘었습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높은 곳을 경험한 것이지요. 자고나서도 흥분이 가시지 않습니다. 이제 세상 어떤 어려운 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깁니다.

힌두교와 불교가 어우러진 '묵티나트'

어젯밤에는 함께 고생한 가이드와 포터를 위한 잔치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도움이 없었으면 쏘롱라를 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랜만에 여유를 가지고 고용한 자와 고용된 자의 관계가 아닌 오랜 시간을 함께한 형과 아우의 마음으로 술과 안주를 주고받았습니다.

아침에 마을을 산책하였습니다. 해발 3800m에 자리 잡은 묵티나트는 티베트 불교와 힌두교의 흔적이 마을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마을과 계곡 곳곳에는 룽다와 타르초가 나부끼고 까마득한 절벽 아래에는 사원이 있습니다. 종교 간 반목 없이 어우러져 공존하는 모습이 보기 아름답습니다.


묵티나트를 출발하였습니다. 오늘은 좀솜(2720m)까지 갈 생각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가이드북에는 묵티나트에서 좀솜까지의 트레일이 안나푸르나 라운딩 중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고 합니다. 안나푸르나(8091m)와 다울라기리(8167m) 사이에 있는  세상에서 가장 깊은 칼리간다키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것입니다.

마을에는 새로 집을 짓는 모습이 많이 보입니다. 마을 끝자락에는 지프차 정류장이 있구요. 지프차는 좀솜까지 운행된다고 합니다. 나날이 증가하는 순례자와 여행자의 편의를 위한 것 같습니다. 순간적으로 지프차의 유혹이 왔지만 포기하였습니다. 트레킹은 자신의 두 발로 걷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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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작로와 트레일 묵티나트를 벗어나면 서로 다른 길이 있음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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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식의 '희망을 만나다'

마을을 벗어나자 도로와 트레일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삼십 분 쯤 내려오자 황량한 다울라기리를 배경으로 자르코트(3550m)가 있습니다. 마을은 황무지 사이에 섬처럼 떠 있습니다.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보입니다. 마을 위쪽에는 사원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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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르코트 히말라야 바랍이 머무는 곳의 배경 '자르코트' 모습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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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르코트는 2009년 최민식 주연의 <히말라야, 바람이 머무는 곳>의 배경이 된 곳입니다. 이 영화는 우연히 동생의 공장에서 네팔 청년 도르지의 장례식을 보다가 그의 유해를 고향에 전달해달라는 부탁을 받으면서 일어나는 일을 담고 있습니다. 유해를 전달하기 위해 도착한 자르코드에서 도르지가 죽었다는 이야기는 전달하지 못 하고 그간 남기 돈만 건넨 채 며칠을 마을에 머물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이 영화는 삶의 의욕을 읽은 남자가 세상의 끝에서 희망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영상에는 안나푸르나의 거대한 설원, 바람이 휘몰아치는 칼리간다키 강 그리고 퇴락한 성채 같은 자르코트의 모습을 통해 자연만이 줄 수 있는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영화에서 최민식은 현지 사전 답사에 참여하지 않고 촬영에 임했다고 합니다. 그가 산을 오르며 숨을 헐떡이고 구토를 하며 괴로워하는 모습은 연기가 아닌 실제의 모습이라고 합니다. 이런 어려움을 겪고 난 후 그는 이야기합니다.

"여기에서 나는 희망을 만난다."

같은 곳을 걷고 있는 그와 저의 바람이 서로 다른 것은 아니겠지요.

무스탕 왕국의 관물 '카그베니'

자르코트를 지나면 카그베니(2740M)가 나옵니다. 마을 주변에는 보리가 푸른색을 띄며 자라고 있습니다. 기나긴 겨울을 견딘 어린 싹들이 세상을 구경하기 위해 목을 내민 모습에서 자연의 신비로움이 느껴집니다. 물과 빛이 있으면 모진 추위와 척박한 토양에서도 싹을 틔우는 것이 생명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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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그베니 모습 무스탕 왕국의 관문 '카그베니'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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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그베니는 은둔의 왕국 '무스탕'에 들어가는 관문입니다. 무스탕 왕국은 칼리간다키 강이 발원하는 곳으로 히말라야 중부 산악 지대에 있는 가장 오래된 왕국입니다. 지금은 명맥만 유지하고 있으며 이곳을 여행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허가서와 많은 비용을 지급해야 합니다.

카그베니에서 점식을 먹었습니다. 저는 볶음밥을 주문하였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점점 식욕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몇 번의 트레킹 경험이 있음에도 네팔 음식에는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습니다. 식사 때만 되면 무엇을 먹을까 하는 것이 가장 큰 걱정입니다. 여행을 잘하는 방법은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것인데 먹는 것이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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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리간다키 강 안나푸르나와 다울라기기 사이의 계곡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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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솜까지는 칼리간다키강을 따라 내려가야 합니다. 바람이 점점 거칠어지며 흙먼지 때문에 눈을 뜰 수 없습니다. 아침에는 잠잠했던 바람이 오후가 될수록 더 심해집니다. 공항이 있는 좀솜에서는 바람 때문에 비행기도 오전 11시가 넘으면 이착륙이 금지됩니다.

좀솜(2720m)에 도착하였습니다. 공항, 관공서, 군부대, 경찰서 등이 상주하는 좀솜은 안나푸르나 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마을입니다. 갑자기 만난 도심 모습에 적응이 되지 않습니다. 이곳에서는 버스나 비행기를 이용하여 트레킹의 종착지인 포카라로 이동할 수도 있습니다. 안나푸르나 라운딩이 점점 편리해지고 기간 또한 짧아지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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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항 좀솜 공항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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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은 "As you like it"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트레킹에서 이동과 숙소의 결정은 가이드에게 맡기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경험 많은 가이드는 난이도와 트레커의 상태를 감안하여 일정을 결정합니다. 가이드가 내일을 생각해서 다음 마을인 마르파(2670m)까지 가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합니다.

네팔 사과의 수도 '마르파'

좀솜에서 마르파가는 길은 트레커와 주민이 함께합니다. 개발이 진행되면서 버스와 지프차가 가끔 왕래합니다. 먼지 날리는 신작로를 걷는 것은 먼지 때문에 무척 힘듭니다. 버스의 유혹이 있지만 두 시간을 걸어 마르파에 도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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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파 마르파 이정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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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은 나무 한 그루 자라지 못하는 까막득한 절벽을 등지고 칼리간다키강을 바라보는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마을 주위에는 과수원이 보입니다. 지금을 철이 지나 을씨년스럽지만 마르파는 사과의 고장입니다. 마을 규모는 크지 않지만 매서운 추위를 막을 수 있는 단아한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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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 정경 마르파 마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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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수원과 들판 마르파 주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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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트레킹 거리는 21km입니다. 트레킹을 시작한 후 가장 많이 걸었습니다. 해발도 3800m에서 2670m 로 내렸습니다. 바람 때문에 힘들었지만 내리막길이 계속되어 가능했습니다.

사과 브랜디로 저녁을 대신하였습니다. 주민들이 직접 만든 브랜디는 알콜 농도가 25도 이상으로만 표기되어 있습니다. 애플 브랜디는 히말라야의 빛과 물이 빚어낸 사과로 만들었습니다.

브랜디 한 잔에 몸과 마음 모두가 이완되며 편안한 저녁을 맞습니다.

 

히마라야 설산을 누비는 청전스님-.jpg

히말라야 설산을 누비는 청전 스님



<히말라야 도사의 히말라야에서 밤을 맞다>

  

험로를 한달음에 가게 한 “니째 도 키로!”(이 킬로만 더 가요)


‘히말라야 도사’ 청전 스님이 한국에서 온 백수 산사람과 함께 희말라야 산행길을 나섰다. 매상을 올리기 위해 20킬로를 2킬로라고 속인 찻집 주인 말만 믿고 한 산행에서 밤 11시까지 헤매다 목적지에 도착해 먹은 밥 한그릇은 진수성찬보다 꿀맛이었다.

 

“때론 나를 속이고 기만하는 것조차 내가 험고를 넘어설 수 있는 에너지가 될 때가 있다. 찻집 아저씨의 그 말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20킬로가 넘는 길을 한달음에 갈 수 있었을 것인가.”

 

 

 산을 좋아하다가 아예 공무원까지 내던지고, 무작정 히말라야 품안에 살아보겠다고 작심한 분이 다람살라로 찾아온 적이 있다. 자칭 전국백수연합회 회장이라는 이재환씨였다. 그는 한국의 웬만한 산을 다 올랐고, 백두대간 종주도 두 번이나 했다니 산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람살라에 오기 전 네팔의 이름난 트레킹 코스들을 돌고, 티베트의 성산 카일라스를 두 번이나 순례를 해 히말라야에도 이골이 난 사람이다.


 히말라야 산행은 한 구간만 가려고 해도 열흘이 넘는 일정이어서 텐트와 먹을 것 등짐이 많아 고역이다. 그런데도 그때 둘이 죽이 맞아 다람살라 뒷산 트리운드로 올라갈 때 가장 가기 어려울 듯 보이는 지점을 목표로 길을 나섰다. ‘바라방갈’이란 산동네였는데, 이 일대 히말라야에서도 최오지다.


 해외 등반가들이 다니는 유명 루트가 아니니 코스에 대한 정보도 전무하다. 천행으로 사람을 만나면 물어물어 가는 원시적인 산행 외엔 방법이 없는 길을 무작정 떠난 것이다. 


 4340미터 고지인 인드라하라 패스를 넘을 때부터 첫 고비가 닥쳤다. 느닷없이 눈과 우박이 내렸다. 둘은 조그만 바위틈새에 몸을 웅크리고 눈이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 그런데 등산로보다 하산로가 훨씬 위험했다. 우박과 눈으로 길이 얼어붙어 버렸다. 아이젠 없이 지팡이 하나에만 의지해야 했기에 급경사에서 미끄러지면 수백미터 벼랑으로 떨어져 주검을 찾을 수도, 천도재도 지낼 필요가 없는 황천행이었다. 콧김이 얼어붙는 날인데도 미끄러운 발끝의 촉감 때문에 생땀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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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드라하라패스에서 청전 스님과 이재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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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의 설산



 

 




 그렇게 산행중에 비박을 하며 이레 만에 도착한 마을이 다라리였다. 처음 목표로 한 바라방갈에 이르기 전 마지막 마을이었다. 다라리 사람들은 자기 마을로 찾아든 외지인을 처음 본 듯이 신기해하며 둘레에 모여들었다. 손짓 발짓으로 배가 고프다는 시늉을 하자 철 이른 사과를 따주었다. 천도복숭아가 그보다 맛이 있을까? 지금도 사과하면 다라리 산골에서 먹은 그 사과향으로 인해 군침이 돈다. 내리 두 개의 사과를 껍질째 우적우적 씹어 삼키고는 인도돈 십 루피를 주었다. 하지만 신인 듯 길손을 맞이하는 산골 동네 사람들이 돈을 받을 리 없다.


 필자는 산골마을에 다닐 때는 언제나 한국의 지인들이 보내주는 진통제와 연고 항생제 등 의약품을 배낭 가득히 담아간다. 그날도 저녁을 물린 뒤 마을 사람들이 아프다는 부위에 따라 상비약을 나눠주었는데, 산 너머에 산다는 50대쯤의 남자가 자기 아내가 많이 아프다면서 이곳에 데려올 테니 가지 말고 꼭 기다려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주일 넘는 산행중 만난 산골 사람들에게 약을 다 나눠줘 버린 뒤였다. 부인이 아파도 의약의 혜택을 받을 길이 없어, 나를 신의처럼 믿고 산 넘고 물 건너 아내를 데려오겠다던 그 오지인의 순박하고 안타까운 말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이튿날 바라방갈까지 거리를 물으니 ‘십 킬로미터’란다. 해 지기 전엔 도착하기 위해 이른 아침 서둘러 길을 나섰다. 그런데 날이 어둑어둑해지는데 이제나저제나 했지만 마을이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산이라면 이골이 난 나나 이재환씨 걸음으로 10시간 이상을 달리다시피 했으니 족히 20킬로 이상은 갔을 성싶은데도 첩첩산중일 뿐이었다. “왜 이 먼길을 10킬로라고 했을까”라고 부아가 치밀었지만, 문명인들의 거리 개념 없이 자기들의 어림짐작으로 쉽게 내뱉는 오지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알아들은 우리가 바보였다. 


 해가 지면서 비까지 내려 옷도 흠뻑 젖어서 추워 떨렸다. 그러니 전등을 켜고라도 기어코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산행 중 산골마을 가게에서 산 건전지가 얼마나 오래됐는지 깜박깜박하더니 채 1분도 안 돼 꺼지는 게 아닌가. 아마 가게에 들여놓은 지 10년도 더 지나 자연 소모된 건전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날이 칠흑처럼 어두워 더 이상 한 발도 더 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진 자리 마른자리 가릴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텐트를 치고 요기를 할 엄두도 못 내고 춥고 배고픈 상태로 지쳐서 잠에 곯아떨어졌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 해가 떠오른 뒤에야 미숫가루로 간신히 연명만 하고 또 길을 재촉했다. 


 그 길엔 태고 적 전나무 숲이 하늘과 땅을 뒤덮고 있었다. 그 숲을 벗어난 순간 도연명이 말하는 별천지 같은 풍경이 나타났다.  너와 지붕으로 엮어진 마을이었다. 수십 년 전 강원도 삼척이나 정선지방 산골 순례 길에서 보았던 것과 다름없었다. 


그 사이 굴뚝에선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해발 2550미터의 깊고 깊은 산골에 이런 마을이 숨어있었다니. 입이다물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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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전 스님과 히말라야의 양치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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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오지의 소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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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전 스님(뒷쪽 맨왼쪽)과 다라리 마을 주민들



 바로 바라방갈마을이었다. 놀랍게 이곳에도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가 있었다. 그런데 겨울방학이 6개월이라고 했다. 겨울이면 추운 이곳에서 머물러 있을 교사가 없어서였다. 이른 가을에 하산한 교사가 눈이 녹는 5월께 산을 넘어오는 날이 개교 날이었다.


 이 아름다운 마을에서 이틀을 지냈지만 무리한 산행으로 지친 몸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그래서 엿새가 걸리는 5050미터 고개의 타인투 패스를 피해 4700미터 고개인 탐사르 패스를 택해 넘었다. 그 고개에서 예상치 못하게 눈밭에 청정한 호수가 있어서 그야말로 ‘하늘 호수인가’ 몇 번이고 다시 봐야 했다.


 그러나 선경이 주는 기쁨은 잠깐이고 또 한발 한발의 고행길이 이어졌다. 간신히 고개를 넘으니 허름한 찻집이 있다. 여름철에 곡식이나 생필품을 나르는 마부들의 중간 숙박처로 밥과 짜이(밀크티)를 파는 곳이다. 그곳에서 짜이를 한 잔 시켜 마셨다. 그런데 아직도 해가 많이 남아 이곳에서 숙박하기보다는 더 하산하기로 하고 찻집 아저씨에게 “얼마나 더 가야 다음 숙소가 나오느냐”고 물으니 “니째 도 키로(2킬로만 더 가요)”라고 답한다. 2킬로면 잰걸음으로 반 시간이면 족했기에 날 듯이 길을 나섰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2킬로면 나온다던 집은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더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밤하늘에 별이 총총 나있어서 희미하나마 그 별빛을 등불 삼아 한발 한발 내 디뎠다. “이놈의 ‘니째 도 킬로’가 도대체 어찌 된거냐”고 한탄하면서.


 마침내 밤 열 한시가 되어서야 구원의 빛이 저 멀리 눈에 띄었다. “이제 살았네!” 하고 들어가니 그 찻집 아저씨가 말한 바로 그 집이었다. 그때야 모든 게 이해가 되었다. 바로 그 아주머니는 그 아저씨의 아내였다. 우리를 자기 집에서 밥을 먹이고 재워 매상을 올리려고 이십여 킬로를 줄여 이 킬로라고 말했다는 것을. 그날 밤 12시가 되어서야 먹은 밥 한 그릇과 야채 한 그릇은 어느 진수성찬보다 맛이 있었다. 그런 꿀맛이 어디 있을까. 다음날 아침 길을 떠나면서, 다람살라에서 비상음식을 싸오느라 챙겨온 플라스틱통과 잡동사니들을 모두 내주었다. 산골에서 긴요한 세간살이를 얻자 아주머니는 다 빠진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다.


 그 후로 이재환씨와 몇 번 산행을 함께했는데, 험한 고개를 넘을 때마다 “니째 도 키로!”를 박자 맞추듯 내뱉으면 웃음이 터지고 없던 힘이 났다.


 고지를 넘는 것과 같은 힘든 과정이 없는 인생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때론 나를 속이고 기만하는 것조차 내가 험고를 넘어설 수 있는 에너지가 될 때가 있다. 그래서 고통이 곧 행복의 씨앗이 된다. 그때도 찻집 아저씨의 그 말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20킬로가 넘는 길을 한달음에 갈 수 있었을 것인가. 지금도 힘든 여정을 만나면 찻집 아저씨의 말이 저절로 주문처럼 되새겨진다.


 “니째 도 키로!”


  청전 스님





 조현이 히말라야에서 만난 청전  스님

 

 ‘휴심정’ 벗님글방 필자 가운데 청전 스님의 글을 1번으로 택한 것은 청전 스님의 산행기가 결코 남 얘기처럼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신학대학에 다니다가 송광사(전남 순천)로 출가해 25년째 달라이 라마를 스승으로 히말라야에서 수행중인 그를, 사람들은 ‘히말라야 도사’라고 부릅니다. 포터들에게 배낭과 먹을 것까지 양껏 지우고 귀족 산행을 하는 일부 산악인들과 달리 오지인들에게 줄 상비약까지 등에 지고 아무도 가지 않은 산길을 달리는 그를 보면 그런 말이 과언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제가 청전 스님을 우연히 만난 건 11년 전 신문사를 1년 쉬고 인도를 순례하던 중 다람살라에서였습니다. 그때 오지 중의 오지라는 스피티 등을 함께 순례하며 한 달을 함께 보냈지요. 


 3년 전엔 한 달간 라다크를 순례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고개인 싱고라를 함께 넘기도 했습니다. 청전 스님은 이제 60살이니 이팔청춘이 아니지만 산에 가면 여전히 펄펄 납니다. 갈림길에서 앞서 가던 그가 보이지 않아 애타게 부르며 당혹해 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지요. 라다크에선 고산병에 시달리며 지쳐 떨어지자 “설산에 묻어버리고 가겠다”며 제 분기를 자극해 다시 산을 기어오르게 한 분이지요. 


 그러나 병에 걸려도 의약품 구경도 못하는 오지인들의 아픈 곳을 쓰다듬으며 약을 주는 그를 히말라야인들은 ‘산타클로스 스님’이라며 좋아합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면 어김없이 공중파 방송국에서 다큐멘터리 출연을 의뢰하지만 “수행자가 그런 데 얼굴을 내밀면  좋지 않다”며 한 번도 응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그가 휴심정 독자들에게만 무주상글보시를 해주고 있습니다.


 조현 기자 cho@hani.co.kr


 



    *이 글은 <한겨레> 지면 6월 5일자 25면에 나간 것입니다

 

   제프 다이어의 사진비평서 <지속의 순간들>

 1800년대부터 현재까지 활동한 42명 사진작가들 다뤄

 맹인 누드 모자 등 테마별로 어떻게 왜 찍었는지 분석

 

 

 geoff01.jpg 잘 모르는 어떤 사람을 소개하는 방법으로 유명한 사람의 이름에 기대는 경우가 있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방식이다. 거의 무명에 가까웠던 헬렌 레빗을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주류사진계에 들이밀어 알린 사례를 들 수 있다. 브레송의 명성 때문에 (어떻게든) 헬렌 레빗의 사진을 찾아보게 하였는데 결과적으로는 좋았다. 이는 좋은 사례다. 그렇지 않은 사례도 적지 않지만 그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오늘 소개할 책은 난생처음 듣는 저자의 책인데도 알랭 드 보통의 한 문장짜리 추천사에 끌려 읽게 되었지만 읽다보니 좋았기 때문이다. 좋으면 좋은 것이다.

 제프 다이어의 책 ‘지속의 순간들’을 소개한다. 제프 다이어의 책은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나는 사진가가 아니다. 나는 카메라가 한 대도 없는 사람이다”라는 고백과 경고로 책을 시작한다. 솔직해서 좋다. 그렇지만 책을 보고 나면 제프 다이어가 사진에 대해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비교된다. 저마다 ’인문학과 사진’의 결합이라고 이름붙이는 것이 대유행인 한국 사진계의 상황을 잘 들여다보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다. 

 이 책은 1800년대 초기부터 현재까지 활동한 42명의 사진작가들을 다루고 있다. 그럼 먼저 내가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만든 평들을 소개한다.

 

 

 <뉴요커> “일부러 절충적이고 불완전하게 만든 기묘한 백과사전”
 <선데이 텔레그래프> “사진에 관한 책들 중 가장 우아한 통찰을 보여주는 수작”
 <보스턴 글로브>는 “위대한 이야기꾼이 선사하는 깊은 감동”
 존 버거 “이 책을 읽고 나면 삶이 더 크게 보인다”
 알랭 드 보통 “사진 그리고 삶에 대한 경이로운 명상”


 

 

<뉴요커>같은 신문의 인문서 담당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런가 보다 생각했는데 존 버거와 알랭 드 보통이 저렇게 말을 했다고 하니 솔깃했다. 최소한 저 두 사람은 아무 책이나 좋다고 하진 않을 사람들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읽기 시작했다. 아래는 내가 쓴 소감문이다.
 
 단락을 구분해주거나 소제목으로 나눠주는 이유는 독자들의 편의성을 위함이다. 그런데 이 책은 전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불편했다. 처음엔. 서문에 해당하는 10쪽 정도의 글을 넘어가면 바로 이 책의 제목이자 본문인 ‘지속의 순간들(The on Going Moment)’이 시작된다. 그리고 옮긴이의 글이 나오기 전까지 계속 본문이다. 본문 사이에 아무 구분도 없다. 주절주절 나가다가 사이사이에 글에 해당하는 사진이 나오지 않았다면 읽다가 지치기 딱 좋게 만들었다. 그런데 사실상 사진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다가 지칠 일이 없을 것이다. 이 책의 장점은 쉽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며 언제 어느 쪽을 넘겨서 시작해도 전체를 이해하는데 큰 지장이 없다는 것이다. 가령 57쪽에 케르테츠와 그의 사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252쪽에도 여전히 케르테츠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물론 그 사이에도 숱하게 케르테츠가 언급된다. 워커 에반스, 폴 스트랜드,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등도 두서없이(이것은 처음 생각이었을 뿐이다. 저자는 나름대로 맥락을 갖고 있다) 여러차례 튀어나온다. 아마도 가장 많이 언급된 것은 워커 에반스 같은데 굳이 누구에게 가장 방점을 두고 있는지 세어볼 일은 없다. 이 책은 특정 사진작가에 대한 글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작가들의 사진에 대한 깊이 있고 통찰력 있는 비평서다. 이 비평서의 결정적인 장점은 사진이야기를 사진을 통해서 풀어간다는 점이다. 책 24쪽 아래에 저자가 쓴 주석이 있다.
 “이 책을 쓰면서 당면한 과제 중 하나는 버거, 손택, 바르트, 발터 벤야민 등을 빈번하게 인용하는 일을 피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책에는 굳이 그들의 것이 아니더라도 인용문들이 많이 실려있다.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한 독자들이라면 주석을 참고하라. (그러나 이 텍스트 자체가 사진에 관한 방대한 주석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24쪽을 넘기면서, 즉 서문의 마지막을 읽으면서 본문을 끝까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므로 서점에서 이 책의 간을 볼 때 반드시 몇쪽 안되는 서문을 읽어보고 판단하시길 바란다. 물론 본문의 아무쪽이나 무작위로 펼쳐들고 두 쪽만 넘어가면 이 책이 마음에 들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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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스트랜드: 눈먼 여인,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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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 위노그란드: 뉴욕,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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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커 에반스: 뉴욕 2월 25일, 1938

 

사회적 테마 혹은 작가별 테마


 이 책의 저자 제프 다이어와는 다르게 나는 중간제목을 달아서 이 책을 소개하려고 한다. 도저히 나의 실력으로는 끊지 않으면서 문장을 이어갈 재간이 없다. 이 책이 좋은 이유 중의 또 한가지는 테마 혹은 대상에 대한 설득력있는 전개와 분석과 이해가 있다는 점이다. 스포일러가 될까봐 본문을 직접 소개하지 못하는 소심함을 버리겠다. 예를 들어 루이스 하인과 폴 스트랜드와 스티글리츠와 에반스가 각각 다른 시공간에서 찍은 별개의 ‘맹인’ 혹은 ‘눈먼 사람’ 사진에 대한 긴 설명은 바로 사회적 테마에 관한 서술이다. 작가들이 어떻게 각자의 방식으로 ‘맹인’을 찍었는지 연구했고 설명한다. 작가들이 어떤 이유로 ‘맹인’을 찍었는지 분석한다.

 
 “대부분의 사진가들은 도로테아 랭이 ‘투명 망토(cloak of invisibility)‘라 부른 옷을 입기를 바랐던 반면, 위노그랜드는 자신의 존재를 거슬릴 정도로 고압적으로 드러냈다” 책 37쪽에서

 이런 테마에 대한 고찰이 이어진다. 손, 누드, 벤치, 모자…. 그러므로 현재 자신의 사진작업이 고착상태에 빠진 사람이라면 바로 이 책, ‘지속의 순간들’이 딱 필요한 것이다. 공부를 위한 책인데도 골치 아프지 않게 술술 넘어간다. 게다가 그 누구도 이 책의 내용을 허술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자신이 그동안 찍어놓은 사진들 중에서 어떤 맥락을 잡아서 전시를 하거나 혹은 전시같은 것은 꿈꾸기 어렵더라도 최소한 정리라도 하고 싶은 사람을 위한 가이드북의 역할을 아주 잘하고 있다. 한 사진이 다른 사진과 어떻게 이어질 수 있는지, 이어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사진을 찍는 것보다는 다른 작가들의 사진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 책은 큰 도움이 된다. 이를 위해 저자는 작가의 생애와 에피소드와 대상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조사를 많이 했고 그 보따리를 술술 잘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마디로 ‘스카이콩콩’을 타고 뛰어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스카이콩콩을 타본 사람이라면 이게 무슨 느낌인지 알 것이다. 이 놀이기구는 정확한 방향의 운동을 보장하지 않으므로 어디로 튈지 예측하기가 힘들다. 그렇지만 그렇게 위험한 기구는 아니다. 왜냐하면 넘어지려는 순간에 언제든지 발을 딛고 일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발을 딛는 아무곳이든 그곳에서 다시 놀이를 시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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