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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설산을 누비는 청전 스님



<히말라야 도사의 히말라야에서 밤을 맞다>

  

험로를 한달음에 가게 한 “니째 도 키로!”(이 킬로만 더 가요)


‘히말라야 도사’ 청전 스님이 한국에서 온 백수 산사람과 함께 희말라야 산행길을 나섰다. 매상을 올리기 위해 20킬로를 2킬로라고 속인 찻집 주인 말만 믿고 한 산행에서 밤 11시까지 헤매다 목적지에 도착해 먹은 밥 한그릇은 진수성찬보다 꿀맛이었다.

 

“때론 나를 속이고 기만하는 것조차 내가 험고를 넘어설 수 있는 에너지가 될 때가 있다. 찻집 아저씨의 그 말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20킬로가 넘는 길을 한달음에 갈 수 있었을 것인가.”

 

 

 산을 좋아하다가 아예 공무원까지 내던지고, 무작정 히말라야 품안에 살아보겠다고 작심한 분이 다람살라로 찾아온 적이 있다. 자칭 전국백수연합회 회장이라는 이재환씨였다. 그는 한국의 웬만한 산을 다 올랐고, 백두대간 종주도 두 번이나 했다니 산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람살라에 오기 전 네팔의 이름난 트레킹 코스들을 돌고, 티베트의 성산 카일라스를 두 번이나 순례를 해 히말라야에도 이골이 난 사람이다.


 히말라야 산행은 한 구간만 가려고 해도 열흘이 넘는 일정이어서 텐트와 먹을 것 등짐이 많아 고역이다. 그런데도 그때 둘이 죽이 맞아 다람살라 뒷산 트리운드로 올라갈 때 가장 가기 어려울 듯 보이는 지점을 목표로 길을 나섰다. ‘바라방갈’이란 산동네였는데, 이 일대 히말라야에서도 최오지다.


 해외 등반가들이 다니는 유명 루트가 아니니 코스에 대한 정보도 전무하다. 천행으로 사람을 만나면 물어물어 가는 원시적인 산행 외엔 방법이 없는 길을 무작정 떠난 것이다. 


 4340미터 고지인 인드라하라 패스를 넘을 때부터 첫 고비가 닥쳤다. 느닷없이 눈과 우박이 내렸다. 둘은 조그만 바위틈새에 몸을 웅크리고 눈이 그칠 때까지 기다렸다. 그런데 등산로보다 하산로가 훨씬 위험했다. 우박과 눈으로 길이 얼어붙어 버렸다. 아이젠 없이 지팡이 하나에만 의지해야 했기에 급경사에서 미끄러지면 수백미터 벼랑으로 떨어져 주검을 찾을 수도, 천도재도 지낼 필요가 없는 황천행이었다. 콧김이 얼어붙는 날인데도 미끄러운 발끝의 촉감 때문에 생땀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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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드라하라패스에서 청전 스님과 이재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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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의 설산



 

 




 그렇게 산행중에 비박을 하며 이레 만에 도착한 마을이 다라리였다. 처음 목표로 한 바라방갈에 이르기 전 마지막 마을이었다. 다라리 사람들은 자기 마을로 찾아든 외지인을 처음 본 듯이 신기해하며 둘레에 모여들었다. 손짓 발짓으로 배가 고프다는 시늉을 하자 철 이른 사과를 따주었다. 천도복숭아가 그보다 맛이 있을까? 지금도 사과하면 다라리 산골에서 먹은 그 사과향으로 인해 군침이 돈다. 내리 두 개의 사과를 껍질째 우적우적 씹어 삼키고는 인도돈 십 루피를 주었다. 하지만 신인 듯 길손을 맞이하는 산골 동네 사람들이 돈을 받을 리 없다.


 필자는 산골마을에 다닐 때는 언제나 한국의 지인들이 보내주는 진통제와 연고 항생제 등 의약품을 배낭 가득히 담아간다. 그날도 저녁을 물린 뒤 마을 사람들이 아프다는 부위에 따라 상비약을 나눠주었는데, 산 너머에 산다는 50대쯤의 남자가 자기 아내가 많이 아프다면서 이곳에 데려올 테니 가지 말고 꼭 기다려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주일 넘는 산행중 만난 산골 사람들에게 약을 다 나눠줘 버린 뒤였다. 부인이 아파도 의약의 혜택을 받을 길이 없어, 나를 신의처럼 믿고 산 넘고 물 건너 아내를 데려오겠다던 그 오지인의 순박하고 안타까운 말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이튿날 바라방갈까지 거리를 물으니 ‘십 킬로미터’란다. 해 지기 전엔 도착하기 위해 이른 아침 서둘러 길을 나섰다. 그런데 날이 어둑어둑해지는데 이제나저제나 했지만 마을이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산이라면 이골이 난 나나 이재환씨 걸음으로 10시간 이상을 달리다시피 했으니 족히 20킬로 이상은 갔을 성싶은데도 첩첩산중일 뿐이었다. “왜 이 먼길을 10킬로라고 했을까”라고 부아가 치밀었지만, 문명인들의 거리 개념 없이 자기들의 어림짐작으로 쉽게 내뱉는 오지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알아들은 우리가 바보였다. 


 해가 지면서 비까지 내려 옷도 흠뻑 젖어서 추워 떨렸다. 그러니 전등을 켜고라도 기어코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산행 중 산골마을 가게에서 산 건전지가 얼마나 오래됐는지 깜박깜박하더니 채 1분도 안 돼 꺼지는 게 아닌가. 아마 가게에 들여놓은 지 10년도 더 지나 자연 소모된 건전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날이 칠흑처럼 어두워 더 이상 한 발도 더 뗄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진 자리 마른자리 가릴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텐트를 치고 요기를 할 엄두도 못 내고 춥고 배고픈 상태로 지쳐서 잠에 곯아떨어졌다. 다음날 아침이 되어 해가 떠오른 뒤에야 미숫가루로 간신히 연명만 하고 또 길을 재촉했다. 


 그 길엔 태고 적 전나무 숲이 하늘과 땅을 뒤덮고 있었다. 그 숲을 벗어난 순간 도연명이 말하는 별천지 같은 풍경이 나타났다.  너와 지붕으로 엮어진 마을이었다. 수십 년 전 강원도 삼척이나 정선지방 산골 순례 길에서 보았던 것과 다름없었다. 


그 사이 굴뚝에선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해발 2550미터의 깊고 깊은 산골에 이런 마을이 숨어있었다니. 입이다물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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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전 스님과 히말라야의 양치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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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 오지의 소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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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전 스님(뒷쪽 맨왼쪽)과 다라리 마을 주민들



 바로 바라방갈마을이었다. 놀랍게 이곳에도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가 있었다. 그런데 겨울방학이 6개월이라고 했다. 겨울이면 추운 이곳에서 머물러 있을 교사가 없어서였다. 이른 가을에 하산한 교사가 눈이 녹는 5월께 산을 넘어오는 날이 개교 날이었다.


 이 아름다운 마을에서 이틀을 지냈지만 무리한 산행으로 지친 몸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그래서 엿새가 걸리는 5050미터 고개의 타인투 패스를 피해 4700미터 고개인 탐사르 패스를 택해 넘었다. 그 고개에서 예상치 못하게 눈밭에 청정한 호수가 있어서 그야말로 ‘하늘 호수인가’ 몇 번이고 다시 봐야 했다.


 그러나 선경이 주는 기쁨은 잠깐이고 또 한발 한발의 고행길이 이어졌다. 간신히 고개를 넘으니 허름한 찻집이 있다. 여름철에 곡식이나 생필품을 나르는 마부들의 중간 숙박처로 밥과 짜이(밀크티)를 파는 곳이다. 그곳에서 짜이를 한 잔 시켜 마셨다. 그런데 아직도 해가 많이 남아 이곳에서 숙박하기보다는 더 하산하기로 하고 찻집 아저씨에게 “얼마나 더 가야 다음 숙소가 나오느냐”고 물으니 “니째 도 키로(2킬로만 더 가요)”라고 답한다. 2킬로면 잰걸음으로 반 시간이면 족했기에 날 듯이 길을 나섰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2킬로면 나온다던 집은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더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밤하늘에 별이 총총 나있어서 희미하나마 그 별빛을 등불 삼아 한발 한발 내 디뎠다. “이놈의 ‘니째 도 킬로’가 도대체 어찌 된거냐”고 한탄하면서.


 마침내 밤 열 한시가 되어서야 구원의 빛이 저 멀리 눈에 띄었다. “이제 살았네!” 하고 들어가니 그 찻집 아저씨가 말한 바로 그 집이었다. 그때야 모든 게 이해가 되었다. 바로 그 아주머니는 그 아저씨의 아내였다. 우리를 자기 집에서 밥을 먹이고 재워 매상을 올리려고 이십여 킬로를 줄여 이 킬로라고 말했다는 것을. 그날 밤 12시가 되어서야 먹은 밥 한 그릇과 야채 한 그릇은 어느 진수성찬보다 맛이 있었다. 그런 꿀맛이 어디 있을까. 다음날 아침 길을 떠나면서, 다람살라에서 비상음식을 싸오느라 챙겨온 플라스틱통과 잡동사니들을 모두 내주었다. 산골에서 긴요한 세간살이를 얻자 아주머니는 다 빠진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다.


 그 후로 이재환씨와 몇 번 산행을 함께했는데, 험한 고개를 넘을 때마다 “니째 도 키로!”를 박자 맞추듯 내뱉으면 웃음이 터지고 없던 힘이 났다.


 고지를 넘는 것과 같은 힘든 과정이 없는 인생이 어디에 있을 것인가. 때론 나를 속이고 기만하는 것조차 내가 험고를 넘어설 수 있는 에너지가 될 때가 있다. 그래서 고통이 곧 행복의 씨앗이 된다. 그때도 찻집 아저씨의 그 말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20킬로가 넘는 길을 한달음에 갈 수 있었을 것인가. 지금도 힘든 여정을 만나면 찻집 아저씨의 말이 저절로 주문처럼 되새겨진다.


 “니째 도 키로!”


  청전 스님





 조현이 히말라야에서 만난 청전  스님

 

 ‘휴심정’ 벗님글방 필자 가운데 청전 스님의 글을 1번으로 택한 것은 청전 스님의 산행기가 결코 남 얘기처럼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신학대학에 다니다가 송광사(전남 순천)로 출가해 25년째 달라이 라마를 스승으로 히말라야에서 수행중인 그를, 사람들은 ‘히말라야 도사’라고 부릅니다. 포터들에게 배낭과 먹을 것까지 양껏 지우고 귀족 산행을 하는 일부 산악인들과 달리 오지인들에게 줄 상비약까지 등에 지고 아무도 가지 않은 산길을 달리는 그를 보면 그런 말이 과언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제가 청전 스님을 우연히 만난 건 11년 전 신문사를 1년 쉬고 인도를 순례하던 중 다람살라에서였습니다. 그때 오지 중의 오지라는 스피티 등을 함께 순례하며 한 달을 함께 보냈지요. 


 3년 전엔 한 달간 라다크를 순례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고개인 싱고라를 함께 넘기도 했습니다. 청전 스님은 이제 60살이니 이팔청춘이 아니지만 산에 가면 여전히 펄펄 납니다. 갈림길에서 앞서 가던 그가 보이지 않아 애타게 부르며 당혹해 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지요. 라다크에선 고산병에 시달리며 지쳐 떨어지자 “설산에 묻어버리고 가겠다”며 제 분기를 자극해 다시 산을 기어오르게 한 분이지요. 


 그러나 병에 걸려도 의약품 구경도 못하는 오지인들의 아픈 곳을 쓰다듬으며 약을 주는 그를 히말라야인들은 ‘산타클로스 스님’이라며 좋아합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앞두면 어김없이 공중파 방송국에서 다큐멘터리 출연을 의뢰하지만 “수행자가 그런 데 얼굴을 내밀면  좋지 않다”며 한 번도 응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 그가 휴심정 독자들에게만 무주상글보시를 해주고 있습니다.


 조현 기자 cho@hani.co.kr


 



    *이 글은 <한겨레> 지면 6월 5일자 25면에 나간 것입니다

 

   제프 다이어의 사진비평서 <지속의 순간들>

 1800년대부터 현재까지 활동한 42명 사진작가들 다뤄

 맹인 누드 모자 등 테마별로 어떻게 왜 찍었는지 분석

 

 

 geoff01.jpg 잘 모르는 어떤 사람을 소개하는 방법으로 유명한 사람의 이름에 기대는 경우가 있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방식이다. 거의 무명에 가까웠던 헬렌 레빗을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주류사진계에 들이밀어 알린 사례를 들 수 있다. 브레송의 명성 때문에 (어떻게든) 헬렌 레빗의 사진을 찾아보게 하였는데 결과적으로는 좋았다. 이는 좋은 사례다. 그렇지 않은 사례도 적지 않지만 그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오늘 소개할 책은 난생처음 듣는 저자의 책인데도 알랭 드 보통의 한 문장짜리 추천사에 끌려 읽게 되었지만 읽다보니 좋았기 때문이다. 좋으면 좋은 것이다.

 제프 다이어의 책 ‘지속의 순간들’을 소개한다. 제프 다이어의 책은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나는 사진가가 아니다. 나는 카메라가 한 대도 없는 사람이다”라는 고백과 경고로 책을 시작한다. 솔직해서 좋다. 그렇지만 책을 보고 나면 제프 다이어가 사진에 대해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는지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비교된다. 저마다 ’인문학과 사진’의 결합이라고 이름붙이는 것이 대유행인 한국 사진계의 상황을 잘 들여다보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다. 

 이 책은 1800년대 초기부터 현재까지 활동한 42명의 사진작가들을 다루고 있다. 그럼 먼저 내가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만든 평들을 소개한다.

 

 

 <뉴요커> “일부러 절충적이고 불완전하게 만든 기묘한 백과사전”
 <선데이 텔레그래프> “사진에 관한 책들 중 가장 우아한 통찰을 보여주는 수작”
 <보스턴 글로브>는 “위대한 이야기꾼이 선사하는 깊은 감동”
 존 버거 “이 책을 읽고 나면 삶이 더 크게 보인다”
 알랭 드 보통 “사진 그리고 삶에 대한 경이로운 명상”


 

 

<뉴요커>같은 신문의 인문서 담당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런가 보다 생각했는데 존 버거와 알랭 드 보통이 저렇게 말을 했다고 하니 솔깃했다. 최소한 저 두 사람은 아무 책이나 좋다고 하진 않을 사람들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읽기 시작했다. 아래는 내가 쓴 소감문이다.
 
 단락을 구분해주거나 소제목으로 나눠주는 이유는 독자들의 편의성을 위함이다. 그런데 이 책은 전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불편했다. 처음엔. 서문에 해당하는 10쪽 정도의 글을 넘어가면 바로 이 책의 제목이자 본문인 ‘지속의 순간들(The on Going Moment)’이 시작된다. 그리고 옮긴이의 글이 나오기 전까지 계속 본문이다. 본문 사이에 아무 구분도 없다. 주절주절 나가다가 사이사이에 글에 해당하는 사진이 나오지 않았다면 읽다가 지치기 딱 좋게 만들었다. 그런데 사실상 사진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다가 지칠 일이 없을 것이다. 이 책의 장점은 쉽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며 언제 어느 쪽을 넘겨서 시작해도 전체를 이해하는데 큰 지장이 없다는 것이다. 가령 57쪽에 케르테츠와 그의 사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252쪽에도 여전히 케르테츠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물론 그 사이에도 숱하게 케르테츠가 언급된다. 워커 에반스, 폴 스트랜드,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등도 두서없이(이것은 처음 생각이었을 뿐이다. 저자는 나름대로 맥락을 갖고 있다) 여러차례 튀어나온다. 아마도 가장 많이 언급된 것은 워커 에반스 같은데 굳이 누구에게 가장 방점을 두고 있는지 세어볼 일은 없다. 이 책은 특정 사진작가에 대한 글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 작가들의 사진에 대한 깊이 있고 통찰력 있는 비평서다. 이 비평서의 결정적인 장점은 사진이야기를 사진을 통해서 풀어간다는 점이다. 책 24쪽 아래에 저자가 쓴 주석이 있다.
 “이 책을 쓰면서 당면한 과제 중 하나는 버거, 손택, 바르트, 발터 벤야민 등을 빈번하게 인용하는 일을 피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책에는 굳이 그들의 것이 아니더라도 인용문들이 많이 실려있다.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한 독자들이라면 주석을 참고하라. (그러나 이 텍스트 자체가 사진에 관한 방대한 주석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24쪽을 넘기면서, 즉 서문의 마지막을 읽으면서 본문을 끝까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므로 서점에서 이 책의 간을 볼 때 반드시 몇쪽 안되는 서문을 읽어보고 판단하시길 바란다. 물론 본문의 아무쪽이나 무작위로 펼쳐들고 두 쪽만 넘어가면 이 책이 마음에 들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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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스트랜드: 눈먼 여인,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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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 위노그란드: 뉴욕,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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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커 에반스: 뉴욕 2월 25일, 1938

 

사회적 테마 혹은 작가별 테마


 이 책의 저자 제프 다이어와는 다르게 나는 중간제목을 달아서 이 책을 소개하려고 한다. 도저히 나의 실력으로는 끊지 않으면서 문장을 이어갈 재간이 없다. 이 책이 좋은 이유 중의 또 한가지는 테마 혹은 대상에 대한 설득력있는 전개와 분석과 이해가 있다는 점이다. 스포일러가 될까봐 본문을 직접 소개하지 못하는 소심함을 버리겠다. 예를 들어 루이스 하인과 폴 스트랜드와 스티글리츠와 에반스가 각각 다른 시공간에서 찍은 별개의 ‘맹인’ 혹은 ‘눈먼 사람’ 사진에 대한 긴 설명은 바로 사회적 테마에 관한 서술이다. 작가들이 어떻게 각자의 방식으로 ‘맹인’을 찍었는지 연구했고 설명한다. 작가들이 어떤 이유로 ‘맹인’을 찍었는지 분석한다.

 
 “대부분의 사진가들은 도로테아 랭이 ‘투명 망토(cloak of invisibility)‘라 부른 옷을 입기를 바랐던 반면, 위노그랜드는 자신의 존재를 거슬릴 정도로 고압적으로 드러냈다” 책 37쪽에서

 이런 테마에 대한 고찰이 이어진다. 손, 누드, 벤치, 모자…. 그러므로 현재 자신의 사진작업이 고착상태에 빠진 사람이라면 바로 이 책, ‘지속의 순간들’이 딱 필요한 것이다. 공부를 위한 책인데도 골치 아프지 않게 술술 넘어간다. 게다가 그 누구도 이 책의 내용을 허술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자신이 그동안 찍어놓은 사진들 중에서 어떤 맥락을 잡아서 전시를 하거나 혹은 전시같은 것은 꿈꾸기 어렵더라도 최소한 정리라도 하고 싶은 사람을 위한 가이드북의 역할을 아주 잘하고 있다. 한 사진이 다른 사진과 어떻게 이어질 수 있는지, 이어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사진을 찍는 것보다는 다른 작가들의 사진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 책은 큰 도움이 된다. 이를 위해 저자는 작가의 생애와 에피소드와 대상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조사를 많이 했고 그 보따리를 술술 잘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마디로 ‘스카이콩콩’을 타고 뛰어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스카이콩콩을 타본 사람이라면 이게 무슨 느낌인지 알 것이다. 이 놀이기구는 정확한 방향의 운동을 보장하지 않으므로 어디로 튈지 예측하기가 힘들다. 그렇지만 그렇게 위험한 기구는 아니다. 왜냐하면 넘어지려는 순간에 언제든지 발을 딛고 일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발을 딛는 아무곳이든 그곳에서 다시 놀이를 시작할 수 있다.

 

 

 

 

"쟁기와 칼은 손의 확장이다. 그러나 책은 그 이상이다. 책은 기억의 확장이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장석주의 <취서만필>은 여러 날 전에 읽었지만 읽고 싶은 책이 많아 두 권의 책을 더 읽고 난 후에야 노트 정리를 하였다. 도서관에서 빌려 보는 책은 여러 가지로 제약을 받는다. 무엇보다도 마음대로 밑줄을 칠 수도 없고 깨알 같은 글씨고 그때그때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어넣지도 못한다. 어쩌다가 연필로 밑줄을 표시 하고 보면 책을 돌려 줄 때가 되면 지우개로 지우느라 애를 먹는다. 역시 책은 사 봐야 한다. 그런데도 다 사볼 수 없으니 여전히 빌려본다. <취서만필>은 먼저 빌려 읽고 다시 구입했다.

 

 

 

시인이며 비평가요 2만 권의 장서가요 독서광인 장석주의 <취서만필>(부제: 책에 취해 마음 가는 대로 쓰다)은 독서편력기다.

제1부 '책, 사소함에 취하다'에서부터 제4부, '책 예술에 취하다'까지 수많은 작가들과 책을 장석주의 잘 요리한 안내로 만날 수 있다. 그의 글은 한편 한편에서 동·서양을 아우르는 방대한 지식과 깊은 사유 속에서 건져 올린 지성과 감성으로 엮은 글들에 깊이 빠져든다.

그는 한 해에 수백 권의 책을 사서 읽는 독서광인가 하면 또한 한 해에 다섯 권 안팎의 책을 집필하는 왕성한 창작열을 내뿜는다. 그가 어떤 책을 읽어왔는지, 얼마나 책을 좋아하는지 그가 읽은 책을 어떻게 소화시키고 글을 써왔는지를 장석주의 독서일기를 통해 대략 짐작할 수 있다. 저자가 소개한 책들은 모두 읽고 싶은 생각이 들 만큼 결코 가볍지 않은 책 읽기와 사유의 깊이와 글에 장석주의 글은 매료되고 만다. 그의 글맛을 한 번 보면 자꾸만 그의 저서를 찾아 읽고 싶게끔 만든다.

저자의 다른 책 <고독의 권유>에서 "나는 침묵, 견고한 책상, 펜과 백지, 나만의 시간, 무서운 집중력들을 꿈꾼다. 인류에게 유익한 그 무언가 경이로운 것은 거의 모두 정금과도 같은 순도 높은 자기만의 시간에서 탄생한다"고 했듯이 그런 가운데 태어난 글들이리라.

역시 같은 책에서 그는 "나의 혈관을 흐르는 피와 근육들은 책의 자양분에 의해 형성된 것들이다. 책은 나의 유일한 학교였다. 그것은 획일화된 규율과 책임을 강요하지 않는 학교다. 사람이 저마다 타고난 인격, 개성, 자유의지를 존중하고, 어떤 억압도 정당화시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탁월한 학교였다"라고 썼다.

이 책에서 장석주가 소개한 작가와 저작들 중에 유독 관심을 끈 것은 책에 미친 사람들이었다. 보르헤스, 알베르토 망구엘, 조선 후기의 북학파 실학자인 이덕무, 다치바나 다카시…. 쉰여덟 번째의 생일을 보낸 뒤 완전히 실명했다. 그러나 실명이 그의 '책을 향한 열망'을 꺾지는 못했다. 눈이 먼 보르헤스는 책을 읽어 줄 사람을 구했고, 서점에서 소년 알베르토 망구엘이 발탁되었다. 뒷날 망구엘은 이렇게 썼다.

"보르헤스에게 현실의 정수는 책 속에 있었다. 책을 읽고, 책을 쓰고, 책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그 알멩이였다. 그는 수천 년 전에 시작돼서 한 번도 끝난 적이 없는 대화를 이어가고 있음을 본능적으로 인식했다." ('보르헤스에게로 가는 길' 중)

조선시대 후기 북학파 실학자 중의 한 사람인 이덕무는 21세가 될 때까지 하루도 선인들의 책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온갖 서적을 두루 구해 읽었는데 평생 읽은 책이 2만 권이고 손수 베낀 책이 수백 권이다.

집은 비바람을 채 가리지 못할 정도였고, 끼니조차 자주 거를 정도로 이덕무는 가난했다. 오죽하면 한겨울에 자다가 일어나 이불 위에 <한서> 한 질을 덮고 <논어>를 매서운 바람이 들어오는 곳에 병풍처럼 세워 주위를 막았을까. 그런 가난 속에서도 책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은 이덕무는 마침내 나이 39세가 되던 해 규장각 초대 검서관에 임명되었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일본에서 명실공히 최고의 지식인으로 꼽히는 사람이다. 그는 명문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에 들어갔지만 3년 만에 짐을 싸들고 나온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점점 산더미처럼 쌓인 책들을 읽어치우지 못하게 되었다… 읽고 싶은데 읽지 못하는 책들이 책장 가득히 꽂혀 있는 것을 매일 바라보기만 한다는 것은 심한 고통이었다"라고 했다. 장석주 역시 독서광이다. 그의 본격적인 독서편력은 20세 때 시작되었다고 '나의 독서편력기'에서 쓴다.

"나는 시립도서관에서 전가통의 세계를 꿈꾸고, 동과 서, 옛것과 새것들을 두루 찾아 읽으며 그것을 향해 한 발 한 발 내딛는 청년시절을 보냈다. 어깨너머로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던 시립도서관의 참고 열람실에서 이루어진 책읽기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희망 없는 내일과 궁핍이 의식을 옥죄었지만 날마다 책들을 읽는 것으로 그 고통을 견뎌냈다.

20대후반부터 30대 후반까지 생업에 전력투구하던 시절은 아주 암울하고 빈곤한 시절이다. 반가통의 독서로 겨우 연명하고, 늘 알 수 없는 결핍감과 불행한 느낌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생업에서 풀려 나온 뒤로 나의 독서편력은 다시 활력을 찾고 풍요로워졌다. 특히 지난 10년 동안에는 책에 온전히 몰입해서 수천 권의 책들을 읽고 수십 권의 책을 썼다. 나는 날마다 책 한 권 읽기를 실천하는 원칙을 따르려고 애쓴다."(p378)

그에게 있어 책 읽기는 '하루도 쉬지 않고 책을 한 권이나 두 권씩 읽어치우는 것은 책 읽기에서 찾는 즐거움'이라고 말한다. '나는 읽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저자는 또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부지런히 책을 구해 읽었으니, 이것은 책으로 유폐하는 것이요, 책으로 망명하는 것이고, 책 속의 위리안치였다. 나는 기꺼움으로 그 운명을 받아들인다. 하루에 여섯 시간, 때로는 그보다 많은 시간을 책 읽는 데 바친다. 어느 날은 세끼를 먹는 시간도 아까워 두 끼만 먹고 종일 책을 붙들고 읽는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정한, 급하게 처리해야 할 아무 업무도 없는 그런 오롯한 자유, 손발을 부지런히 움직여 나를 조각조각 쪼개 분주함 속에 흩뿌리지 않아도 되는 오직 나만을 위해 쓸 수 있는 집중력 속에서 책을 읽는 게 행복했다. 그 행복이 덧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다른 무엇과 바꾸고 싶지 않았다."

"나는 책을 읽는 사람이다. 쉬지 않고 읽는다. 읽음으로써, 나는 존재한다. 나는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책을 먹고 산다. 책의 성분 요소들인 질료들과 날짜와 속도들을 먹고 산다. 그렇게 함으로써 책이라는 다양체를 내화한다. 나는 하나의 이성, 하나의 주체가 아니라 다양한 이성, 여러 개의 주체다. 차라리 흩뿌려진 점들, 차이의 유목민들이다. 책은 하나의 점이며, 점들로 이루어진 선이다. 나는 그 점과 점들을 잇는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또 한 번 책에 미친 사람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 독서광 즉 책에 미친 사람은 많고 많다는 것을 알았고 책을 어떻게 깊이 읽고 어떻게 내재화시켜서 자기 것으로 만들고 풀어내는지 새롭게 발견하는 시간이었다. 독서일기나 서평쓰기 등 작가마다 다양하게 접근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는 좋은 한 예였다.

책에 미친 사람들은 많고도 많아 나는 감히 그 축에 낀다고 말도 못할 정도다. 책에 미친 사람들의 독서편력기는 흥미진진하다. 그들은 어떻게 책을 읽어왔고 어떤 책을 읽고 있는지, 그들에게 책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문자를 해독하게 된 이후로 끊임없이 책을 읽어왔지만 지난 10년은 특히 책읽기 시간이 더 늘고 집중은 더 높아졌던 세월이 분명하다.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가택연금을 선택했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유폐된 상태에서 그저 책만 읽었다. 카프카는 말한다. "만약 우리가 읽고 있는 책이 정수리를 내려치는 타격으로 우리를 깨우지 않는다면, 그걸 무엇 때문에 읽어야 하겠어?" 그렇다. "우리 내부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는 책"만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나는 부지런히 책을 구해 읽었으니 이것은 책으로 유폐하는 것이요 책으로 망명하는 것이고, 책 속의 위리안치였다. 나는 기꺼움으로 그 운명을 받아들인다. 하루에 여섯 시간, 때로는 그보다 많은 시간을 책 읽는 데 바친다."(p38~)

아무도 간섭하지 않고 간섭받지 않는 칩거 속에서 오롯한 시간을 독서에 바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장석주의 책읽기의 뜨겁고도 차가운 열정을 맛보는 시간이었다. "나는 책을 읽는 사람이다. 쉬지 않고 읽는다. 읽음으로써, 나는 존재한다." "세계는 거대한 사막이고 책은 오아시스다. 나는 오아시스를 찾아 사막을 횡단하는 여행자다" 나도 책을 먹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1일1식…"꼬르륵 소리 나면 건강"

SBS스페셜, '1일1식' 실천 신혼부부 소개

 
1일1식(내 몸을 살리는 52일 공복 프로젝트).ⓒ News1

하루에 한 끼만 먹는 '1일 1식' 식사법이 소개됐다.

10일 방송된 'SBS 스페셜 - 끼니 반란 Stay hungry. stay healthy' 1편에서는 일본의 나구모 요시노리 박사가 전파해 유명해진 '1일 1식'을 지키는 사람들의 일상을 공개했다.

5개월째 1일 1식 식사법을 따르고 있는 심승규(35), 김은아(31) 부부의 일상은 남들과 달랐다.

이들은 아침에 일어나 물 한잔을 마시고, 점심 시간에는 회사 도서관에 가 책을 읽거나 차 한잔만 마셨다.

 
이들의 유일한 식사시간은 저녁. 한끼에 부족한 영양을 보충해야 해 밥과 반찬의 영양 균형에 신경을 쓴다는 게 이들의 원칙이다.

푸드스타일리스트인 김씨는 "평소 소식 습관을 지켜오던 남편 심씨의 식습관을 따라하게 된 게 1일 1식의 계기가 됐다"며 "실천하길 잘한 것 같다"고 말했다.

김씨는 하루 한 끼 식사와 적당한 간식 섭취, 공복을 생활화하며 되도록 완전식품을 먹고 골든타임(밤 10시~새벽 2시) 수면을 지키라고 제안했다.

하루 세 끼가 아닌 하루 한 끼 식사가 오히려 건강을 지켜준다는 '1일 1식'은 공복일 때 장수 유전자인 시르투인 유전자가 활동하면서 건강해지고 수명이 늘어난다고 주창해 화제를 모았다.

'1일 1식'의 저자인 나구모 요시노리 의학 박사는 "영양을 계속 섭취해야 건강하다는 생각은 낡은 사고방식"이라고 단언하며 "공복 상태에서 '꼬르륵' 하고 소리가 나면 몸이 젊어지는 효과가 있다"고 주장했다.

[우먼 동아일보 컬처]이지현의 아주 쉬운 예술이야기 “피카소, 그 녀석이 다 해 먹어서 할 게 없어” 반항아의 상징 잭슨 폴록의 ‘넘버 5’ 들여다보기! 잭슨 폴록 ‘넘버 5’
기사입력 2013-03-05 11:27:48


“모든 인간에게는 일생 쓰고 죽어야 하는 ‘지랄’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
경북대 김두식 교수의 저서 ‘불편해도 괜찮아’에 소개된 이 말을 들었을 때, 너무 공감이 돼 속이 다 후련해졌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춘기에, 그 시기를 그냥 지나간 사람은 늦바람이 나서, 또 어떤 사람은 총량이 커서 평생 주어진 지랄을 쓰면서 산다는 것이죠.
이상과 현실, 마음과 몸이 따로 놀아 세상을 향해 반항한 작가, 잭슨 폴록. 그의 유명한 작품 ‘넘버 5’입니다. 물감을 뿌리고 튀기는 기법을 처음 시도했는데 당시 평론가들조차 “머리카락 뭉치, 카타르시스의 분열”이라며 난해해했던 작품이죠.
지금은 ‘넘버 5’가 최고의 경매가를 기록할 만큼 비싼 그림이지요.
잭슨 폴록이 이름을 알리기까지는 방황과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 가출해 어머니가 다섯 아들을 어렵게 키웠습니다. 미술학교를 중퇴한 후 형들과 무작정 뉴욕에 갔지만 경제 공황기였던지라 매우 가난하게 지내야만 했죠.

 


온몸을 움직여 캔버스에 물감을 뿌리는 ‘액션 페인팅’ 작업
폴록은 누구 못지 않게 미술에 대한 열정이 있었지만, 스스로 “기교도 뒤떨어지고 드로잉도 할 줄 모르는 작가”라고 자학했습니다. 또, “피카소, 그 녀석이 다 해 먹어서 할 게 없다”며 열등감을 표현하기도 했죠.
잭슨 폴록은 알코올 중독, 정신 질환, 동성애 성향으로 구설수에 자주 오르내렸습니다. 파티에서 식탁을 뒤엎는가 하면 친구 전시에서 그림을 찢으며 난동을 부리기도 했죠. 개인전이 성공을 거뒀지만, 정신질환에 시달려 화가이자 자신을 보살펴준 아내도 떠나갔습니다. 결국 만취 상태에서 교통사고로 44세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쯤 되면 캔버스에 물감을 끼얹고 뿌리며 작업한 그의 작업방식, 붓이 아니라 몸을 움직여 그리는 ‘액션 페인팅’이 그냥 나온 기법은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그의 아내는 “폴록이 물감을 흩뿌리는 작업은 괴로워서 내는 신음소리와 같았다”고 했는데, 아마도 상처를 치유하는 자기만의 방식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림을 사심 없이 보면 기분이 좋을 텐데, 사람들은 일부러 복잡한 것을 즐기나보다” 라고 한 잭슨 폴록의 말에서 세상을 향한 괴리감을 짐작해 봅니다.
짧은 생애를 반항적으로 살았던 폴록은 그에게 주어진 지랄 총량을 다 썼을까요? 누군가에게 지랄은 규정된 선을 뛰어넘는 시도이자 자신의 욕망을 들여다보는 귀한 시간일 겁니다.
억눌린 욕망의 에너지. 여러분은 어디에 어떻게 숨겨놓고 있나요?

글·이지현(‘예술에 주술을 걸다’ 저자 mimicello@naver.com)


 


 

 

 

 

중앙일보//‘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말을 새삼 되새기게 되는 연말이다. 새해 달력을 챙기고, 내년치 수첩도 새로 구해 식구들 생일이나 각종 아이디·비밀번호, 은행 계좌번호 따위를 틈틈이 옮겨 적고 있다. 나는 과연 생각하는 대로 살아왔는가. 아니면 사는 대로 생각해왔는가. 연초부터 지금까지 온갖 메모로 빽빽해진 올해 수첩을 보면 그저 휘둘리며 살았을 뿐 나 스스로의 생각대로 신선하게 지낸 날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다.

 대학시절 성경을 읽다가 눈에 꽂혀 자계(自戒)의 문구로 삼은 구절이 있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어리석은 자는 그 어리석은 짓을 거듭 행하느니라’(잠언 26장 11절). 무언가 목표를 세워도 대부분 작심삼일(作心三日)로 끝나고, 나쁜 습관은 반대로 고칠 줄을 모르는 자신에 대한 경계였다. 그러나 수십 년 세월이 흘렀어도 ‘토한 것을 도로 먹는’ 한심한 행태는 개선될 기미가 없다. 이제는 성경 구절의 효용이 자계인지 자조(自嘲)에 있는지 헷갈릴 지경이다. 흡연 습관만 해도 그렇다. 매년 1월 1일 금연 결심을 했다가 곧 무너지고, 이어서 설날, 내 생일, 무슨 기념일 하는 식으로 퇴각만 거듭하다 한 해가 저문다. 어쩌다 석 달간 금연한 적이 있지만 100일을 못 채우고 동굴에서 뛰쳐나간 의지 약한 호랑이 꼬락서니이긴 마찬가지다.

 사실 습관은 뇌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려는 본능에 따른 것이다. 미로 끝에 먹이를 두고 쥐에게 길을 찾아가게 하면 처음엔 뇌 활동이 매우 활발하다. 그러나 길 찾는 데 익숙해지면 뇌의 움직임도 줄어든다. 굳이 에너지를 낭비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일련의 행동이 기계적인 습관으로 바뀌는 과정을 학자들은 청킹(chunking·덩이 짓기)이라 부른다고 한다. 우리 일상생활은 대부분 신호-반복행동-보상의 3단계를 거쳐 형성된 행동 덩어리, 즉 습관이 지배하고 있다(찰스 두히그, 『습관의 힘』).

 문제는 뇌가 좋은 습관과 나쁜 습관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공기를, 물고기가 물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듯 습관에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기 일쑤다. 행동만 그럴까. 생각에도 습관이 스며든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생각하던 대로 생각하면 머리가 편하다. 편한 데 익숙해지면 세상과 사물의 본질을 파헤치는 수고로움을 점차 꺼리게 된다. 생각이 다른 사람의 얘기는 듣기조차 싫어진다. 사서 피곤해질 이유가 없으니 말이다. 올 한 해 우리 사회를 지배한 집단사고 간의 격렬한 대립의 배경에도 생각을 습관에 맡겨버리는 몰(沒)지성, 몰성찰이 깔려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다투는 주제마다 합의점을 찾기는커녕 지루한 동어반복 싸움만 되풀이됐을 리 없다.

 

 

식도락가도 빠져드는 '1일 1식' 열풍
다이어트와 건강 모두 챙기자는 것
세 끼 식사하는 건 의외로 짧은 전통
한 세기 전 산업화와 함께 정착해…
몇 끼 먹느냐 노심초사하기보다는
약간 모자란 듯 규칙적 小食·절제를

극(極)과 극은 통하는 걸까. 식도락(食道樂)을 즐기는 이들 사이에서도 ‘1일1식(一日一食)’이 화제다. ‘공복(空腹) 상태일 때 생명력이 솟구친다’고 주장하는 일본 의사 나구모 요시노리가 쓴 책이 출간되면서, 한국에서도 하루에 한 끼만 먹어 다이어트와 건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자는 열풍이 불고 있다. 하지만 많은 이가 ‘하루 세 끼라는 전통 식사법에서 벗어나도 과연 괜찮을까’ 의심하고 걱정한 것도 사실이다. 하루 세 끼를 먹는 것이 과연 전통적인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인류의 식사 시간을 조사해봤다.

결론적으로 하루 세 끼는 그리 긴 전통이 아니었다. 비교적 최근에 정착된 식습관이다. 고대 로마에서는 보통 하루에 한 끼만 먹었다. 로마인들은 소화가 잘 돼야 건강하다고 봤다. 하루에 두 끼 이상 먹으면 해롭다고 생각했다. 흔히 ‘저녁 식사(dinner)’로 번역되는 ‘세나(cena)’를 푸짐하게 먹고 나머지 두 끼는 먹지 않거나 빵 조각 따위로 간단히 때웠다. 저녁 식사라지만 지금처럼 오후 늦게 먹지 않고 정오쯤에 먹었다. 한 끼로 절제하는 건 귀족 등 부유층에 해당하는 이야기였고, 절대다수였던 평민은 아마 한 끼밖에 먹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식습관이 그대로 이어졌는지, 이탈리아에서는 지금도 아침 식사를 에스프레소 커피 한 잔과 비스킷 또는 빵 한 조각으로 가볍게 때운다. “아침 식사를 거하게 하는 건 건강에 좋지 않다”고 믿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19세기까지 대개 조석(朝夕)으로 하루 두 끼 식사가 일반적이었다. 먹을 게 부족했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상 너무 먹어서 비만을 고민한 시기보다 먹거리가 부족해 기아에 허덕였던 시기가 훨씬 길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식사 시간은 다른 생활 습관과 마찬가지로 태양에 의해 정해졌다. 전기가 없던 시절이니 해가 지기 전 모든 일을 처리해야 했다. 등잔불을 밝히려면 값비싼 기름이 필요할 뿐 아니라, 등잔불을 켜더라도 그리 밝지 않아 햇빛이 훨씬 나았다. 해가 뜨면 일어나 간단히 요기하거나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로 밭에 나가 일했다. 저녁은 해지기 전에 먹었다.

 

조선시대 농부들은 새벽 일찍 아침을 먹고 해질 무렵 저녁을 먹었다. 보리밥에 묽은 된장국, 나물 따위가 식사 내용이었다. 노동량이 많은 농번기에나 새참을 낮에 먹었다. 점심은 ‘마음(心)에 가볍게 점을 찍는다(點)’는 본뜻처럼 먹을 수도, 먹지 않을 수도 있는 가벼운 식사 또는 간식이었다. 하루 두 끼 식사는 왕이나 양반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의 왕들이 하루 다섯 번 먹었다지만, 정식 수라는 오전 10시경 아침 수라와 오후 5시경 저녁 수라 두 번이었다. 두 끼 식사는 최근까지도 계속됐다. 일부에선 하루 세 끼를 먹을 수 있게 된 건 보릿고개가 사라진 1970년대 이후라고 말한다.

유럽의 사정도 그리 낫지 않았다. 중세 농부들은 아침에 일어나 거의 먹지 않고 밭에 나가 대여섯 시간 일하다 오전 10~11시쯤 집에 돌아와 식사했다. 가장 풍성하게 먹은 게 이때였다. 그러곤 다시 일하다 오후 4~5시쯤 대충 먹고 일찍 잠을 청했다. 홍차에 과자나 샌드위치 따위 스낵을 곁들여 먹는 영국의 티타임(teatime)도 두 끼만 먹었기에 탄생했다. 아침과 저녁 사이에 허기를 참지 못한 베드포드(Bedford) 공작 부인이 1840년쯤 시작했다는 게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아랍 문화권도 식사 시간은 비슷했다. 다만 과학이 발달했던 지역답게 인간에게 가장 이상적인 식사 시간을 연구했고, 그 결과 ‘2일3식’ 즉 이틀에 세 끼를 먹거나 16시간마다 조금씩 먹는 것이 건강에 이롭다고 주장하는 의학자들도 있었다.

하루 세 끼 식사가 보편화한 건 19세기부터였다.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식사 시간은 자연이 아닌 ‘공장’에 의해 규정되었다. 노동자들은 아침에 출근해 저녁에 퇴근하는 생활을 하게 됐다. 온종일 일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했다. 아침 일찍 식사하고 출근해 일하다가 점심을 간단히 먹고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는 식사 시간이 정착됐다. 가장 여유 있는 저녁 식사가 자연스럽게 가장 중요해지고 풍성해졌다.

하루 세 끼 식사가 절대적으로 옳거나 이롭거나 지켜야 하는 건 아닌 듯하다. 미국 예일대의 음식 사학자 폴 프리드먼은 “인간이 반드시 하루 세 끼를 먹어야 할 생물학적 근거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1식’ 또는 ‘2식’이란 숫자에 집착하면 위험하다. 짧다 해도 수십 년 이상 하루 세 끼 식습관에 익숙해진 몸을 다이어트를 위해 갑자기 한 끼, 두 끼로 줄이면 폭식·과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 번만 먹더라도 열량만 높고 영양이 고르지 못한 패스트푸드 따위를 먹는다면 오히려 해로울 수도 있다. 1일1식 유행의 주인공 나구모씨도 “소식(小食)하는 게 중요하지 하루 한 번만 먹으란 게 아니다”고 강조한다. 외할머니는 과식하는 손자에게 “모자란 듯싶게 먹으라”며 절제를 강조하셨다. 옛 어른들의 지혜는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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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는 발걸음을 함부로 어지러이 걷지마라.

 

 

오늘 아침 나의 발자국은 뒤에 오는 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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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 <1일1식> 열풍 전부터 결식의 철학 실천해온
유영모, 김석희, 김영민, 박세환 등 이야기

두 끼를 버리면 온전한 한 끼를 얻고, 욕망의 무게도 덜어지며, 상차리기가 귀한 노동이 된다

 

 

먹고사는 일이 무거운 당신에게 굶기를 권한다. 지난 9월7일 출간된 <1일1식>이 11월1일까지 6만 부 넘게 팔렸다. 하루 한 끼를 먹으라는 이 책에 이어 10월25일에는 <하루 한 끼 공복의 힘>이라는 책이 나왔다. 두 책은 모두 일본의 의학박사들이 쓴 책이며, 장수 비결은 굶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건강을 위해 하루 한 끼를 다짐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카페 ‘1일1식’ 회원이 1800명을 넘었다. 건강하게 살려고 차라리 숟가락을 놓는 사람들이다.

 

배고픔의 힘, ‘공복력’을 강조하는 주장은 체온 건강법이나 해독 프로그램처럼 입증되기 어려운 수다한 건강 이론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끼니 열풍이 곧 식는다 하더라도 ‘사람은 하루 세 끼를 먹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은 진작부터 금이 가고 있었다. 사람은 밥을 만들고 밥은 사람을 만든다. 오랫동안 하루 한 끼니를 실천해온 사람들이 있다. 하루 세 끼가 만든 생활에서 벗어나려는 이들이다.

 

“책상물림에게 하루 세 끼는 과분하다”

 

 

한국모바일캐스트 박세환(48) 대표는 2년 전부터 하루 한 끼만 먹어왔다. 어느 날 문득 93kg인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건강을 걱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가 혈압, 당뇨가 있는 걸로 봐서 그도 물려받을 가능성이 있었다. 우선 탄수화물부터 멀리 했고, 먹는 양이 줄자 점심 없는 점심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점심 금단현상을 겪었다”고 말한다. 오후 2시쯤 되면 어지럼증을 느끼고 말할 기운도 없었다. 당뇨병 환자들이 겪는 저혈당 증세처럼 손발이 저리고 정신이 몽롱해질 때도 있었다. 그러나 100년 넘게 내려온 삼시세끼의 습관은 빨리 잊혔다. 일주일이 지나자 오히려 점심을 먹으면 정신이 흐릿해지고 속이 답답해 몸과 마음이 터질 듯한 상태에 시달려야 했다. 2년 전에 비해 10kg이 줄어든 몸무게는 기대한 만큼은 아니었다. 그러나 다시 세끼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끼니를 줄이자마자 몸은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의 음식이 들어오는 것을 거북해했다. 과하게 먹으면 몸이 비명을 지르는 것이 예민하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명경지수라고 해야 하나요. 굳이 참선이나 묵상을 하지 않아도 정신이 맑아지고 가벼워집니다. 웬만한 일에는 동요하지 않을 만큼 마음이 항시 평안하지요.”

 

박 대표의 이력은 독특하다. 그는 2005년 침례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지만 교회를 맡지 않고 기관 목사로 활동해왔다. 2008년부터 모바일 회사를 차려 교회나 마을 커뮤니티, 학교를 위해 공동체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하는 일을 해왔다. 그가 하루 한 끼를 통해 얻은 묵상의 내용은 이렇다. “식탐도 탐욕인 것이고 탐욕을 줄여야 한다는 생각, 결국 육체 노동하지 않고 책상물림으로 앉아 있는 이들에게 하루 세끼는 과분하다는 생각, 소비하지도 못하면서 과하게 섭취하는 일은 장기적인 자살이라는 느낌이지요.” 한국 사람들은 하루에 평균 1505g의 음식을 먹고, 2050kcal 열량을 얻는다.(<2010년 국민건강통계>) 일년새 하루 150g 넘게 먹는 양을 늘렸다. 영양 부족은 빠르게 줄어들고 있지만 영양과잉 상태인 사람들은 2010년을 기준으로 20%가 넘는다. 박 대표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내가 활동하는 양만큼만 몸에 채워넣는 것이고, 그건 내 삶의 다른 측면도 다 마찬가지인 것 같다”며 “불요불급하지 않다면 쌓아놓거나 과잉소비할 이유가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고 한다.

 

 

“끼니를 줄이면 욕심이 줄어든다.” 진작부터 1일1식을 해온 사람들의 공통된 경험담이다. 하루 한 끼를 실천하는 모바일 회사를 운영하는 박세환씨와 번역가 김석희, 출판사 문학동네 강태형 대표(사진 왼쪽부터/한겨레 김명진·신소영·윤경진 기자).
짐승의 끼니, 신선의 식사

 

제주도에 사는 번역가 김석희(62)씨도 20년 전 단식을 마치고 나서 하루 한 끼를 시작했다. 위장 질환으로 고생하던 그는 ‘속을 비워서 새살이 돋게 하는 게 좋겠다’는 권유에 따라 단식을 했고, 보식 기간을 거쳐 내친 김에 끼니를 줄였다. 속을 비울수록 속이 편해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끼니 때마다 챙겨 먹는 수고를 덜어낸 생활의 맛을 보았기 때문이다. ‘요리’라는 말은 먹는 준비를 위한 번거로운 노동을 기술적으로 섭취하는 말과 다름없다. 번역이란 같은 일을 하는 부인 조혜경씨와 살며 부부를 위해 생활 습관을 간편하고 소박하게 단장할 이유도 있었다. 밤새워 일하고 새벽 4~5시에 잠드는 그는 정오쯤 일어나서 오후 4시쯤 식사를 한다. 한 시간쯤 산책을 하고 책상 앞에 앉으면 속이 훤하고 머리가 맑아진다. ‘가뜩이나 육지 사람에게는 궁금한 먹을거리들이 많은 제주에서 살면서 끼니를 줄이는 게 어렵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사람이 세끼를 다 먹는다고 해서 모두 즐겁게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답한다. 한 끼만 먹기 때문에 둘만의 식사에 성의를 다한다. 어제 저녁은 제철을 맞은 갈치와 고등어에 김치, 멸치볶음, 오이지를 차려 먹었다. 하루 단 한 끼뿐이기 때문에 상차리는 것도 번거롭기보다는 귀하고 즐거운 노동이 되었다.

 

하루 한 끼만 먹는다면 두 끼는 잃는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거꾸로 두 끼를 버리고 온전한 한 끼를 얻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종교사상가 유영모씨는 세끼를 합쳐서 저녁을 먹는다는 뜻에서 호를 ‘다석(多夕·많은 저녁)’이라고 정했다. 그는 “하루 세끼 음식을 먹는 것은 짐승의 식사법이요, 두 끼는 사람의 식사, 한 끼 음식이 신선의 식사법”이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1941년 2월17일부터 하늘로 돌아간 1981년 2월3일까지 40년 동안 한 끼니를 지켰다고 한다. 그의 제자인 함석헌·김흥호도 평생토록 1일1식을 실천한 것을 보면 한 끼니의 뿌리는 꽤 깊은 셈이다. 다석에게 하루 한 끼만 먹는 일은 마음의 욕심을 줄여 한 점으로 만드는 일이다. 밥이 귀한 줄 몰라서가 아니다. 욕심으로 먹는 것은 “먹고사는 것이 아니라 먹고 죽는 것”이기 때문이다.(<다석 유영모>, 박재순) 현대의 ‘한끼주의자’들은 “사람은 생존의 필요와 몸의 요구를 넘어서 너무 많은 생명을 잡아먹는다”는 그의 말을 알게 모르게 따르고 있는 셈이다.

 

 

때로 비밀이 되는 그들의 한 끼

 

하루 한 끼니를 결심했다면, 배고픔을 견디는 것보다 더 어려운 문제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밥을 먹는다는 것은 시간과 관계를 공유하는 일, 곧 사교를 하는 것이다. 박세환 대표가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은 그가 1일1식을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별나다 생각하고 거리를 둘까 봐” 말을 하지 않는다. 점심 때 약속이 잡히면 먹지는 않으면서 젓가락만 대는 극소식을 한다. 입술만 축이는 셈인데 함께 밥 먹는 이가 아주 예민한 사람이 아니면 잘 눈치채지 못한다. 대신 저녁은 사람들과 어울려서 잘 먹는다. 그러고보면 우리 주위에도 말하지 않는 한끼주의자들이 꽤 있을지도 모른다.

 

저녁 때 하루 한 끼만 먹은 지 13년째. 문학동네 강태형(55) 대표는 어지간히 단련됐지만 “아직도 점심 때 만나자고 하면 그 전날부터 몸이 긴장될 정도로 싫다”고 했다. 점심 식사를 거절하지 못했다면 저녁은 과일과 채소로 때운다. 그마저도 안 먹었으면 하는데 저녁 때 먹는 습관 때문이다. 그가 ‘하루 한 끼’를 시작한 것은 2000년 1월부터다. 욕심을 줄이고 싶어서 식사를 줄였단다. “음식이 덜 들어가면 욕심이 덜 생기는 게 맞아요. 기본적으로 욕심이 많은 사람인데다가 출판사를 경영하며 무슨 일이든 전면에 나서서 휘두르는 것을 좋아했다. 밥을 줄이니 남에게 덜 바라게 되고, 내가 객관화되고, 사람이 좀 순해지더군요.”

 

권투선수 출신인 강 대표는 하루 한 끼를 먹지만 아직도 저녁엔 밥 두 공기를 먹는다. 그런 그도 2007년쯤엔 힘이 모자라고 건강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 끼니를 늘리려 했다. 술과 담배에 과로까지. 아침과 점심만 거르다뿐이지 몸에 안 좋은 생활습관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점도 두려웠다. 그런데 건강검진을 받아보니 의사가 나이에 비해 장내 상태가 아주 좋다는 판정을 내렸다. “알고보니 내가 속이 깨끗한 남자더라”며 좋아하는 그는 에너지 과잉을 경계하는 이 생활을 계속해나갈 것이다.

 

2011년 11월 철학자 김영민(54) 전 한신대 교수는 <한겨레21>에 기고한 글에서 “음식을 먹지 않는 자는 없지만 그 맛을 아는 자는 드물고, 비록 그 맛을 알더라도 그 경험 속에서 자신과 이웃 세상을 바꾸는 계기를 얻으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며 1일1식의 정치학을 소개했다. “음식을 먹는 일에 나름의 분별을 지켜 자신의 삶의 성격과 성질을 요량할 수 있는 낌새로 삼고, 그것이 버릇과 생활, 세속의 체제와 관련되는 방식을 탐색하는 것은 다만 수행자들의 몫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끝없이 먹어치우는 매끼의 음식도, 음식의 문화도, 그 산업과 체계도 엄연한 정치의 길”(<한겨레21> 880호)이라는 것이다. 경남 밀양에 사는 그는 전화 통화에서 “자본주의적인 삶이라는 것이 세끼 먹는 식사와 연동되어 있으니까 다른 생활방식을 얻는 한 가지가 1일1식이다. 다른 이데올로기를 얻기 위한 방식이며 철저하게 생활정치화를 위한 조건”이라고 설명했다.

 

 

‘세 끼의 정치’에 반기를 들다

 

8년 가까이 오후 5~6시쯤 저녁만 먹는 1일1식을 지켜온 그는 “사람의 탐욕은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먹는 욕심을 버리면 다른 욕심도 대개가 줄어든다”고 했다. 그가 한 끼니를 통해 얻어낸 생활방식은 이렇다. “제일 중요한 것은 친구를 다 잃는다. 밥친구나 술친구가 없어진다. 그래서 오히려 다른 생활을 하기 편하고, 다른 관계를 맺기 편하다. 제일 좋은 것은 공부하기 좋다.”

 

물론 욕심을 줄이고 생활을 소박하게 가꾸려고 모두가 그처럼 한 끼니로 돌아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김영민 교수도 “혼자 사는 사람이나 공동체 운동 속에서 하루 한 끼니를 지키는 것은 좋은데, 육체노동을 하거나 아이들을 키우는 집에서는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다석 강의를 한 후 하루 한 끼 먹기를 10개월쯤 했던 박재순 전 씨알재단 이사는 “체력이 약한 탓인지 몸무게가 너무 줄어 접었다”며 “다석 유영모도 모두에게 1일1식하기를 권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1일1식은 상징적인 어떤 행동과 다름없다. 김영민 교수는 “한 끼, 두 끼를 따지는 것은 위험한 현시가 되기 쉽다. 중요한 것은 밥의 양이 아니고 생활양식이다. 조금 나은 생활을 하기 위한 필요한 조건으로 끼니를 맞추는 것”이라고 했다.

미국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는 진정한 친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제가 유명하다 보니 제 리무진 함께 타려는(ride with me in the limo) 사람은 엄청 많아요. 하지만 리무진이 고장 났을(break down) 때 저랑 같이 버스를 타겠다는(take a bus with me) 사람은 친구뿐이죠."

친구는 당신을 속속들이 다 알면서(know you inside out), 그래도 당신을 좋아해주는(still like you) 사람이다. 당신을 위해 자기 일정표에서 시간을 내주는(find time on his calendar) 사람이 아니라 아예 일정표를 들여다보지도 않고(do not consult his calendar) 당신 시간부터 물어보는 사람이다.

미국의 인생상담 전문가(a life coach) 도미니크 베르톨루치는 이런 친구들이 있어야 든든하다고 말한다. 첫째, 당신보다 세상물정과 유행에 더 밝은(be better at keeping up with what's hip) 친구. 이런 친구는 당신 눈을 뜨게 도와준다. 빠져버리기 쉬운 틀에 박힌 생활에서 벗어나게(unstick yourself from the rut that's easy to get bogged in)해준다. 그냥 지나쳐 갔을 수도 있는(may have passed you by) 것들을 알게 해 당신 인생을 살지게(enrich your life) 한다.

둘째, 언제든 주저하지 않고 전화를 걸(call at the drop of a hat) 수 있는 친구. 그리고 예고 없이 갑자기 계획을 바꿔도(change plans at short notice) 아무 군소리 없이(without any ifs and buts) 받아주는 친구가 있어야 한다.

 

 

셋째, 당신이 본받고 싶은 친구(a friend who you aspire to be). 최상의 당신이 되도록 도전 의식을 북돋우고(challenge you to be the best version of yourself) 모범이 돼준다. 당신의 강점과 약점에 모두(on both your strengths and weaknesses) 보탬이 된다.

넷째, 대단히 솔직한 친구. 듣고 싶은 이야기만 하지 않는, 적어도 달콤하게 꾸며(sugarcoat things at the very least) 말하지 않는, 곧이곧대로 말해주는(tell it to you straight)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 당신이 책임져야 할 위기에 봉착했거나(get a crisis on your hands) 긴급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찾아갈 수 있는 사람(your go-to)이어야 한다.

다섯째, 당신보다 당신을 더 잘 아는(know you better than you know yourself) 친구. 여드름이 난 얼굴에 벙거지 머리를 하고(have pimples and a bowl cut) 돌아다니던 시절 친구가 필요하다. 자신 있는 척 허세를 부릴(put on a brave face) 필요가 없는 친구, 당신 집처럼 무조건 당신을 받아주는(accept you unconditionally) 오랜 친구가 있어야 행복하다.

"내가 바뀌면 따라 바뀌고, 고개를 끄덕이면 같이 끄덕이는 친구는 필요 없다. 그건 내 그림자가 훨씬 더 잘한다"(플루타르크·그리스 철학자).

"친구란 다른 사람들은 다 가버리는데(walk out) 거꾸로 나를 향해 들어오는 사람이다"(월터 윈첼·미국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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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욕심에서, 내 이기심에서 벗어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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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 안 해도 좋아질 환자를 수술대에… ‘획기적인’ 시술법이란 詐欺다”

“사실은 내 허리가 안 좋아 30분만 서 있으면 못 견뎌 내가 내 허리 수술하는 꿈꿔”

“레이저·로봇·내시경 수술…
요즘엔 ‘신경성형술’이 大유행 길면 3년 짧으면 1년 만에 사라져”

절개된 살의 단면(斷面)은 두껍고 질겨보였다. 파인 살 속에 끈적한 피가 고여 있었다. 허옇게 드러난 척추는 생각보다 가늘었다. 수술대 옆에는 칼, 가위, 송곳, 고리, 망치 등 '목공' 연장이 놓여 있었다. 내가 아침부터 사람 피를 보고 있구나, 그제야 메스꺼움이 느껴졌다.

서울아산병원 3층 수술실. 이춘성(56) 정형외과 교수는 조각하는 것처럼 살을 째고 파고 벌리고 깎는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그는 '척추 명의(名醫)'로 소문이 나 있다. 그에게 수술을 받으려면 1년 넘게 기다려야 한다.

그런 그가 최근 출간한 '독수리의 눈, 사자의 마음, 그리고 여자의 손'이라는 책에서 의료계의 '장삿속' 수술에 대해 내부 고발을 했다.

"척추 수술을 많이 하고 성공률이 어떻다고 자랑하는 병원은 일단 의심하면 된다. 허리디스크의 8할은 감기처럼 자연적으로 낳는다. 수술 안 해도 좋아질 환자에게 돈벌이를 위해 수술을 권하는 것이다. '획기적인 새로운 시술법'치고 검증된 게 없다. 보험 적용도 안 된다. 결국 환자 입장에서는 돈은 돈대로 버리고, 몸은 몸대로 망가진다."

이춘성 교수는 “나이 들면 허리가 아프게 마련이고 대부분 수술 없이 자연 치유된다”고 말했다. /성형주 기자 foru82@chosun.com

―구체적으로 무엇을 두고 그렇게 참지 못하는가?

"척추 수술만 예로 들면, 한동안 '레이저 디스크 수술'이 유행했다. 레이저 고열로 디스크를 녹인다는 것이다. 그걸로 좋아질 증상이라면 가만 놔둬도 좋아진다. 오히려 시술 시 발생하는 고열로 주변의 뼈나 신경이 화상을 입을 수 있다. 로봇 수술, 몸에 흉터를 안 남긴다는 내시경 수술, 5~10분 만에 디스크를 제거한다는 수핵성형술 등이 나왔다가 사라졌다. 주현미의 노래 제목처럼 '길면 3년 짧으면 1년' 딱 이거다. 요즘에는 '신경성형술'이 획기적인 치료법인 양 퍼지고 있다."

―시장에서 수요가 있다는 것은 그런 수술을 받아본 환자들이 효과를 봤기 때문이 아닌가?

"신경성형술은 가느다란 관(管)을 몸에 집어넣는데 그 비용만 200만원이 넘는다. 검증된 적 없는 이런 시술에 왜 고비용을 물어야 하나. 이는 우리나라만의 현상이다. 좀 좋아진 기분이 느껴졌다면 시술 전에 맞은 '스테로이드' 주사 효과일 뿐이다."

―그들도 같은 전공 의사로서 나름대로 판단이 있지 않을까?

"처음에는 양심을 속이고 한다. 그렇게 세 번쯤 반복하면 자신도 그런 시술이 정말 옳다고 믿는다. 사람은 합리적인 게 아니라 자기 합리화를 하는 존재라고 하지 않나."

―그쪽 의사들의 반발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하느냐? 한때 한 척추 전문 병원이 소송을 제기했다가 취소한 것으로 안다.

"그런 새로운 시술법을 팔아먹는 쪽에서는 내게 '당신이 해봤느냐. 안 해보고서 왜 떠드느냐'고 한다. 도둑질이 나쁘다는 것은 초등학교 때부터 배워서 아는 것이지, 꼭 직접 해봐야 나쁜 줄 아는가. 이런 시술은 보험 적용 대상이 되는 순간부터 횟수가 뚝 떨어진다. 요즘 무릎관절 치료에서 자기 피를 뽑아 주사하는 'PRP 주사'가 난리다. 내 전공은 아니나 대학병원의 전공의사들과 얘기해보면 이 역시 전혀 검증이 안 됐다."

―새로운 시술법을 부정하면 고전적인 방법이 늘 옳은가?

"의료 행위는 인체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과학적인 검증 과정이 몹시 중요하다. 어떤 치료법이 행여 몇몇 환자에게 효과가 있다고 전체 환자에게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위험하다. 척추 수술은 현미경을 보면서 손으로 하는 것이다. 획기적인 방법으로 좋아질 환자라면 당초 수술을 하지 않아도 좋아질 환자다. 다시 말해 그건 불필요한 수술이고, 차라리 안 하는 게 맞는다."

―허리 디스크 대부분은 수술을 안 받는 게 맞는다는 뜻인가?

"척추 수술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다. 상업적인 의사는 환자에게 늘 얻는 것만 말한다. 수술을 했다면 목에 굴레가 씌워진 것과 같다. 어떤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다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렇게 재발해 또 수술을 받으면 결과는 더욱 나빠진다."

―선생은 어떤 경우 수술을 결정하나?

"수술받아야 할 환자는 꼭 받아야 한다. 가령 척추관협착증이나 척추측만증이 심한 환자는 수술이 아니고는 방법이 없다. 하지만 노인이 '허리 아프다'며 수술해달라고 하면, '감기 걸렸는데 폐를 잘라내나요' 하고 달랜다. 나이가 들면 허리가 아프게 마련이다. 이를 노화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운동하면 된다. 어떤 분들은 '다른 대학병원에서도 그랬는데 여기서도 똑같은 말만 한다'며 역정을 낸다."

―이번 책에서 '광고를 많이 하는 의사, 실적 홍보가 심한 의사, 운동선수나 유명 인사를 치료했다고 떠벌리는 의사는 일단 의심하라'고 했다.

"흙탕물을 흐리는 미꾸라지는 극소수 의사다. 문제는 그런 의사들이 돈을 잘 벌고 번성하고 젊은 의사들의 모델이 된다. 이 때문에 의료 행위가 왜곡되는 것이다."

 

 

―그런 의사들의 경력을 보면 대부분 외국 명문대에서 연수해 선진 의료를 배운 걸로 되어있는데도.

"외국 명문대 병원에서 일주일쯤 어깨너머로 슬쩍 들여다보고 와서는 이력서에 '어느 대학 연수'라고 쓴다. 특정 수술법 세미나에 참가비를 내고 하루이틀 참석하고도 '수술법 연수 과정 수료'라고 한다. '교환교수'니 '초빙교수'도 하나같이 사기다. 외국 명문대 병원에서 그런 제도를 운영하지 않는다. 드물게 특정 분야의 대가라면 몰라도. 그런 타이틀을 앞세우고 방송에 자주 출연하면 우리 사회에서 스타 의사로 대접받는다."

―선생도 '스타 의사'로 분류되지 않는가.

"나도 한때 유명해지려고 했겠지만, 그건 정말 젊었을 때 잠깐으로 그쳐야지. 인생 살면서 그런 게 다 부질없는 것 같았다. 돼지는 먼저 도살될까봐 살찌는 것을 두려워하듯, 사람도 추락하지 않으려면 유명해지는 걸 두려워해야 한다(人�Q出名 猪�Q壯·인파출명 저파장)고 했다. 정말 실력 있는 의사 중에는 매스컴을 거부하는 의사도 많다."

―선생의 수술 일정은 1년 뒤까지 꽉 차 있다고 들었다.

"나는 학생들 척추측만증이 관심사다. 여름·겨울방학에는 그 수술에만 집중한다. 1년에 150명쯤 한다. 어른 환자는 1년 넘게 기다려야 한다."

그는 스마트폰으로 찍은 '110도가 휜 S자형 척추' 사진을 보여줬다.

"열다섯 살 여자아이인데, 어제 수술실에 아침 9시 15분에 들어가 오후 2시 반에 나왔다. 수술 도중 아이의 오른쪽 발 신경 기능 수치가 떨어졌다. 순간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곧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이 수술을 앞두고 수류탄을 투척하는 꿈을 꾸는데 내가 잘못 던지는 꿈까지 꿨을 정도로 스트레스가 심했다. 이렇게 수술이 잘되면 2~3일은 기분이 정말 좋다. 소풍 가는 날 아침처럼 오늘 4시 반에 깼다."

―수술 잘하는 비결이 있나?

"전문 분야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무모한 담력, 뛰어난 수술 기술이다. 이번 책 제목으로 '독수리의 눈, 사자의 마음, 여자의 손'이라고 한 것과 같다. 신경을 덮은 뼈가 1㎜ 두께라도 나는 망치로 칠 수 있다. 전혀 신경에 손상이 안 가게 하고. 그럴 때면 '이건 보기 좋은 예술이야' 하는 생각도 든다."

―척추 수술에서 가장 신경 쓰이는 부분은?

"신경을 다쳐 하반신 마비 같은 합병증이 오는 것이다. 나는 1년에 250명쯤 척추 수술을 해오지만 그런 마비가 없었다. 다만 환자 사망을 딱 한 번 경험했다. 140도 측만증의 뇌성마비 환자였다. 수술 과정에서 심장 문제로 숨졌다. 다시 경험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경우에 일부 의사는 "나처럼 잘하는 사람이 수술했는데도 문제가 생겼다면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라고 하지 않나?

"그런 사건을 겪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곧 다시 수술하거나 아랫사람한테 '이건 네 책임이야' 하고 미루는 의사들도 있다. 병적인 자기도취의 성격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의사들 모습이 그렇지 않은가?

"훌륭한 수술 의사가 되려면 그런 성향이 필요할 수도 있다. 수술 도중 환자가 사망하면 차라리 담담해진다. 보호자들에게 멱살 잡히고 화끈하게 며칠 당하면 된다. 환자에게 마비 합병증이 생기면 그때부터 견디지 못한다. 나도 과거에 한 노인분을 수술한 뒤 발목 마비가 와서 정말 괴로웠다. 심약한 의사들은 이런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기도 한다. 한 보고서를 보니 산부인과 의사 자살률이 5%가 넘었다. 출산한 아기가 뇌성마비이거나 어떤 문제가 있으면 감당해낼 수 없다."

―의료 사고를 걱정해 어려운 수술은 아예 피하지 않는가?

"어려운 수술이라고 해서 수당을 많이 받는 게 아니다. 하지만 진정한 의사라면 8000m 히말라야를 오르는 산악인이 북한산에 만족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더 어려운 수술에 도전해보고 싶은 것이다. 물론 막대한 손해배상과 형사 책임을 떠올리면 무모하게 할 수는 없다. 미국 병원에선 수술 후 환자에게 합병증이 나타나는 사례가 거듭되면 해당 의사의 칼을 뺏는다."

―선생은 외래 환자를 볼 때 한 명당 1분도 안 걸리는 것 같았다.

"수요일 하루, 금요일 오후에 외래 환자를 본다. 나도 많이 알려져 외래 진료 스케줄이 2년치가 차 있다. 연결된 진료실 4개 방을 왔다 갔다 하면서 본다. 진료를 받는 환자들은 나와 인간적으로 대화하고 싶어 한다. 환자는 밀려있고 이들과 눈 맞추고 인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줄 아는가. 대부분 수술해야 할 환자가 아니다. 내 수술이 필요한 환자에게만 시간을 많이 쓴다."

―선생을 보면 허리가 좀 불편하더라도 병원을 찾지 않는 것이 현명한 것 같다.

"사실은 내가 허리가 안 좋다(그의 연구실에는 스트레칭 매트, 윗몸일으키기 기구가 놓여 있었다). 30분만 서 있으면 못 견딘다. 서점에서 책을 읽을 때도 바닥에 쪼그리고 앉는다. '내 허리 수술을 형(한 살 위인 서울대병원의 이춘기 교수로 척추 분야 전공)한테 맡길까. 하지만 너무 터프해' 이런 생각을 하다가, 내가 내 허리를 수술하는 꿈도 꿔봤다."

―그 허리 상태로 환자들 허리를 본다는 게 역설적이다.

"오늘도 수술 전에 윗몸일으키기를 70회쯤 하고 들어갔다. 수술대에 기대면 몇 시간 서서 수술해도 괜찮다."

―MRI는 찍어봤나?

"안 찍어봤다. 그 결과로 수술해야 된다면 굉장히 의기소침해질 것이다. 내 의사적 소견으로는 지금 증상으로는 수술 안 해도 되지 않을까. 암이라면 모르겠지만 허리 병을 빨리 안들 무슨 도움이 되겠나 하는 생각을 한다."

그는 과거 정기 검진에서 혈압이 아주 높게 나오자 그 뒤 십몇 년 동안 검진을 아예 안 받았다. 당시 너무 놀랐고 의사로서 창피했다고 한다. 그를 봐도 훌륭한 직업인이 꼭 상식적인 인간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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