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물장어의 꿈’

<‘민물장어의 꿈’ 가사 전문>

좁고 좁은 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나를 깎고 잘라서 스스로 작아지는 것뿐

이젠 버릴 것조차 거의 남은 게 없는데

문득 거울을 보니 자존심 하나가 남았네

두고온 고향

보고픈 얼굴

따뜻한 저녁과 웃음소리

고갤 흔들어 지워버리며 소리를 듣네

나를 부르는 쉬지 말고 가라하는

저 강물이 모여드는 곳

성난 파도 아래 깊이

한 번만이라도 이를수 있다면

나 언젠가

심장이 터질 때까지

흐느껴울고 웃다가 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 없이

익숙해 가는 거친 잠자리도

또 다른 안식을 빚어 그 마저 두려울 뿐인데

부끄러운 게으름

자잘한 욕심들아

얼마나 나일 먹어야 마음의 안식을 얻을까

하루 또 하루

무거워지는

고독의 무게를 참는 것은

그보다 힘든

그보다 슬픈

의미도 없이 잊혀지긴 싫은

두려움 때문이지만

저 강들이 모여드는곳

성난 파도 아래 깊이

한 번만이라도 이를수 있다면

나 언젠가

심장이 터질 때까지

흐느껴울고 웃으며 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 없이

아무도 내게 말해 주지 않는

정말로 내가 누군지 알기 위해

삼심양합 (三心兩合)

변방 관리의 딸 여희(麗姬)가 진(晉)나라로 시집가게 되자 슬피 울어 눈이 퉁퉁 부었다. 막상 궁궐로 들어가 왕과 한 침대를 쓰고 맛난 고기로 매 끼니를 먹게 되니 시집올 때 엉엉 울던 일을 근세 중국의 기재(奇才) 서석린(徐錫麟·1873~1907)은 독서에서 삼심양합(三心兩合)의 태도를 중시했다.

먼저 삼심은 독서할 때 지녀야 할 세 가지 마음가짐이다.

전심(專心)과 세심(細心), 항심(恒心)을 꼽았다. 전심은 모든 잡념을 배제하고 마음을 오롯이 모아 책에 몰두하는 것이다.

 

 세심은 말 그대로 꼼꼼히 놓치지 않고 세밀하게 훑는 자세다.

그는 책을 읽다가 중요한 대목이나 좋은 구절과 만나면 표시해두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부친에게 나아가 물어 완전히 안 뒤에야 그만두었다.

 항심은 기복 없는 꾸준한 마음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매일 밥을 먹어야 하고 날마다 책을 읽어야 한다. 하루만 굶으면 배가 고프고 하루만 안 읽으면 머리가 고프다.

" 안중근 의사가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고 한 뜻과 같다.

양합(兩合)은 두 가지 결합과 연계를 말한다.

첫째는 독서와 수신양덕(修身養德)의 결합을 강조했다.

 그는 책상 위에 직접 제갈공명의 '계자서(誡子書)' 중 다음 대목을 써놓았다.

 "군자의 배움은 고요함으로 몸을 닦고 검소함으로 덕을 길러야 한다.

담박함이 아니고는 뜻을 밝게 할 수가 없고, 고요함이 아니고는 먼 데까지 다다를 수가 없다(夫君子之學 靜以修身 儉以養德 非澹泊無以明志, 非寧靜無以致遠).

" 고요함과 검소함으로 자신의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향상시킬 때 독서의 진정한 보람이 있다.

 내면의 성찰 없는 독서는 교만과 독선을 낳기 쉽다.

 머리와 가슴이 따로 놀면 못쓴다.

 

둘째로 그는 독서와 신체 단련의 결합을 중시했다.

공부로 잔뜩 긴장한 머리는 산책과 체조 등의 활동으로 한번씩 풀어주어 독서에 리듬과 탄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 욱여넣기만 하면 효율도 떨어지고 무엇보다 오래 지속할 수가 없다.

그저 읽고 벌로 읽으면 안 읽느니만 못하다.

 성호(星湖) 선생 식으로 말하면, 흑백을 말하면서 희고 검은 것은 모르고 말을 하지만 귀로 들어갔다가 입으로 나오는 데 지나지 않아 실컷 먹고 토하는 것과 같게 된다. 건강을 해치고 뜻마저 사납게 된다.

 

나도 옳고 너도 옳다고 한 원효… 皆是皆非(개시개비· 모든 주장이 다 옳고 또 다 그르다)

 

사진(원효대사의 초상화)

 

[지식 콘서트] 나도 옳고 너도 옳다고 한 원효… 皆是皆非(개시개비· 모든 주장이 다 옳고 또 다 그르다)

 

조성택 고려대 교수의 '경계와 차이를 넘어' (上)

 

스코틀랜드 분리 찬반 투표후

"서로 다른 의견 있었지만 모두 스코틀랜드 사랑한 사람" 英 여왕의 발언 인상적

 

원효의 화쟁론

부처님 말 아닌게 없으니 모든 경전이 최고이고 부처님 얘기 다 못담기에 다 옳은 경전도 없어

 

 

이번 전체 강연 주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그럼 '어떻게'란 뭘까. 사실 굉장히 난감한 질문이다. 무엇을, 언제, 어디서라는 질문은 선택지가 주어진 것이다. 점심때 뭘 먹을까. 짜장면, 짬뽕, 볶음밥…. 이런 식으로 고를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는 다르다.

 

지난 세월 식민지 해방에서 근대 산업화에 민주화,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에게 '어떻게'라는 질문은 잊혀 왔다.

 

그런데 IMF 경제 위기를 겪고 뭔가 다른 게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문제의식이 생겼다. 그러다 지난 4월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어떤 합의가 우리 사회에서 이뤄졌다.

 

황지우 시인의 '마음의 지도 속 별자리'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지금 나에게는 칼도 經도 없다/ 經이 길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길은/ 가면 뒤에 있다'. 길이라면 앞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인생에서는 다르다. 그동안 걸어온 길은 보이나, 앞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마치 사막에서처럼.

 

소크라테스는 훌륭하게 살라고 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훌륭하게 사는 것인가. 고전적 가치로 절제, 겸양, 배려, 관용이 거론된다.

지금 이 시대에 가장 절실한 건 함께 사는 지혜다.

함께 산다는 건 나와 다른 사람과 산다는 걸 전제로 하고 있다.

얼굴색, 키, 성격, 입맛, 이념이 다른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는 차이와 경계를 나와 남을 가르는 기준으로 삼아왔다.

 

자연도 그렇고, 인간 세계도 진선미란 서로 다른 것들이 어울리면서 이뤄지는 것이다.

모두 똑같은 풍경을 두고 아름답다고 하지 않는다. 산과 물은 다르지만 함께 있어 아름답다.

단풍도 빨간색과 노란색이 다투지 않고 함께 어울려 장관을 이룬다.

 

이제 우리는 다양한 사람, 심지어 다양한 인종이 함께 사회를 이뤄가는 길목에 서 있다.

이 다른 것들이 어떻게 함께 어울릴 수 있는가 하는 난제를 극복하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못 나간다.

 

대립으로 얼룩진 광화문광장, 해군 기지 분쟁이 이어지는 제주 강정마을, 송전탑 갈등이 일상인 밀양, 용산 참사, 진도 세월호 사태까지 전국 지명(地名)이 다 갈등을 상징한다.

 

명절 때 가족이 모이면 가급적 정치 얘기 안 하려 한다. 자꾸 싸우기 때문이다.

아시안게임에서 손연재가 금메달을 따자 김연아 팬들이 안티로 나섰다.

김연아를 좋아한다고 손연재를 미워할 이유가 있나.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고려대 대강당을 리노베이션한다니까 문과대 학생회가 "대강당 뺏어가는 놈은 귀싸대기 올려버린다"는 구호를 달더라. 전국 분쟁 현장마다 섬뜩한 구호가 일상화되고 있다.

 

세계 가치관 조사라는 자료를 보면 "자녀의 교육에 있어서 타인에 대한 관용과 존중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그렇다'는 답변이 56개국 중 우리가 최하위다.

나도 옳고 너도 옳다

 

그렇다면 하나의 옳음만 존재하는가.

하나만 옳으냐. 내가 옳으면 네가 그르고, 네가 옳으면 내가 그른가?

 

다른 종교나 가치관, 다른 판단은 인정하고 포용할 수 없는가?

세월호 특검법을 주장하면 법질서를 세울 수가 없고. 법질서를 강조하면 유족의 아픔은 달랠 수 없는가?

 

얼마 전 스코틀랜드 분리 국민투표가 끝나고 엘리자베스 여왕이 "스코틀랜드에 대해서 서로 다른 의견이 있었지만, 모두가 스코틀랜드를 사랑하는 사람이다"고 말했다.

 

정치적 수사이긴 했지만, 정치가 그 정도는 돼야 한다. 오바마가 대통령 선거 출마했을 때 "이라크 전쟁을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고 묻자 그는 "이라크전을 반대하는 사람도 찬성하는 사람도 다 미국을 사랑하는 사람이다"고 답했다. 더 짓궂게 "이라크와 전쟁했을 때 하나님이 미국 편이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까지 들어오자 그는 "질문이 잘못됐다.

하나님이 우리 편에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편에 있는지 물어야 한다"고 받아쳤다.

 

우리는 사회적 합의라고 하면 늘 투표, 혹은 다수결을 많이 생각한다.

민주주의 제도로서 투표나 다수결이 의미가 있는 것은 그 과정이 선하기 때문이다.

결과가 선하기 때문이 아니라 투표에 이르는 그 과정이 선하다.

민주주의는 시민의 지혜를 필요로 한다는 말이 있다. 지금 제도로서 민주주의는 투표에 의한 평화적 정권 교체, 그 이상은 아니다.

생활에서의 민주주의, 일상에서의 민주주의의 가치 실현에 대해서는 취약하다.

 

미국은 1955년 과학기술을 국가 경쟁력으로 확보하기 위해서 국가과학재단(NSF)을 만들었다.

뒤이어 1965년 국립인문진흥재단이란 단체를 만들기에 이른다. 다인종, 다문화가 섞여 있는 나라에서 어떻게 통합된 미국을 만들 것인지 고민 끝에 나온 산물이다.

 

그들은 국민을 통합하기 위해 인문학이 필요하다고 봤다. 민주주의는 시민의 지혜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만 갖고는 안 된다는 것이다. 1997년 창조적인 미국 건설을 위한 위원회가 결성되어 보고서를 냈는데 거기에는 "예술과 인문학이 명백한 공공재"라는 구절이 들어 있다.

 

1945년 해방될 때 우리는 1인당 국민소득이 860달러였다.

가나는 1190달러. 지금은 2만5000달러와 1800달러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 개발 독재, 국가 주도 발전 등등 많은 얘기가 나온다. 하지만 인문학적인 두께의 차이에 주목하고 싶다.

 

우리는 왕의 언행을 500년간 매일 기록한 왕조실록을 가지고 있는 나라다. 우리글도 있다.

 

화엄사상의 핵심은'개시개비(皆是皆非)'

 

지금부터 말하려는 화엄사상도 우리가 가진 찬란한 유산 중 하나다. 7~8세기 동아시아 사상 주류는 화엄사상이다.

이 사상을 한국적인 사유 속에서 녹여냈던 게 원효다.

 

원효의 화쟁론(和諍論)은 그런 맥락이다.

원효가 살았던 7세기 한국은 동아시아 전체로 보면 변방이다.

불교 사상 역시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파된 걸 수입한 것이다. 그래서 많은 스님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지금 한국 대학 실정과 흡사하다. 그런데 원효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학을 못 갔다. 유학 갔다 오면 배우는 게 뭔가. 전체를 배워오는 게 아니라 유학 간 학교 일부 학풍을 배워서 온다. 원효는 유학을 가지 않으면서 동아시아 변방에 앉아 중국에서 벌어지는 불교의 다양한 학설을 스스로 소화했다.

 

'화쟁'이란 말이 처음 등장한 건 '열반경종요'이다. '統衆典之部分/ 歸萬流之一味/ 開佛意之至公/ 和百家之異諍'. 부분적인 여러 경전을 통섭하여서 여러 갈래 흐름, 다양한 담론이나 이론을 한 맛으로 돌이키며 부처의 지극한 뜻, 올바른 뜻을 열어 여러 학파의 쟁론을 화통한다. 이게 화쟁의 핵심이다.

 

무슨 말이냐면 A란 경전, B란 경전, C란 경전 이 모든 게 부분적으로 옳다는 것이다.

어느 한 경전도 부처님 말이 아닌 게 없다. 그러나 어느 한 경전도 다 옳은 건 아니다. 왜? 부처님의 얘기를 다 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원효는 경전을 해석할 때마다 그 경전이 최고라고 칭송한다. 처음에 원효 경전을 보면 이상하다. 보는 것마다 최고라 한다. 그 이야기는 아무것도 최고가 아니라는 얘기다. 자기 생각이 없는 사람인가 여겼다가 다시 찬찬히 보면 '아, 그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모두가 최고라는 것이다. 어느 한 부분에 대한 해석으로선 최고라는 거다.

 

여러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고 있다. 코를 만진 어떤 이는 '길다'고 한다. 배를 만진 사람은 '벽과 같다'고 하고, 다리를 만진 이는 '기둥 같다'고 한다. 틀린 건가? 그렇지 않다. 맞다. 그래서 원효는 "모두 옳다(개시·皆是)"고 한다.

 

그런데 다들 맞는 얘길 하고 있긴 하지만 코끼리의 전모(全貌)는 모른다.

 

그래서 원효는 "모두 틀렸다(개비·皆非)"고도 한다.

원효는 우리 모두 이 장님들처럼 부분적 진리만을 알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개시개비(皆是皆非)'. 모든 주장이 다 옳다. 그러나 모든 주장은 다 틀리다. 내가 옳으면 네가 그르고, 네가 그르면 내가 옳다는 이분법적인 것이 아니라,

 

내가 옳으면 너도 옳고, 네가 그르면 나도 그르다는 생각을 가질 때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문제의식이다.

 

장님들이 와글와글 떠드는 과정이 논쟁이라면, 입을 닫고 귀를 여는 과정은 대화다.

 

 

조성택 고려대 교수의 '경계와 차이를 넘어'()

 

 

[지식 콘서트] 나를 비우고 경청하라論爭 대신 對話를 하면 갈등이 풀린다

 

 

경청은 곧 공감 - 나의 옳음과 너의 옳음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게 화쟁대화가 가능하다면 갈등은 문제가 아닌 기회

인문학의 역할 - 사회의 가장 아픈 곳이 인문학이 있을 자리지역·계층·좌우서로 다른 것을 이어줘야

 

 

대화란 얼마나 중요한가. 지난해 5월 영국 런던에서 휴가 나온 군인을 살해한 흑인 청년에게 다가가 자수를 설득한 주부 이야기를 다시 떠올려보자. 이 주부는 "무섭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범인이 흥분했지만 술이나 약물에 취해 있지 않아서 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섭지 않았다"고 답했다.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진다면 무서울 게 없다. 길에서 개나 호랑이를 만나면 무서울 수 있다. 술 취한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대화가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화가 된다면 우리는 상대방이 무섭지 않다. 원효의 화쟁(和諍)은 바로 대화의 철학이다.

 

 

 

논쟁은 내가 옳고 네가 그르다는 것을 입증하는 과정이다. 반면 대화는 저 사람의 옳음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저 사람 얘기에 공감하면서 저 사람 눈에 비친 나를 보는 것이다. 논쟁이 필요 없다는 게 아니라 문제 해결을 위해서라면 논쟁은 반드시 대화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의견이 다르더라도 주장만 하지 말고 대화하면서 상대 관점에서 자기를 성찰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을 놓고 환경이냐 안보냐 티격태격하는데 어느 한쪽을 무조건 희생해야 하는 건 아닐 것이다. 안보와 환경, 둘 다 중요한 가치다. 그런데 왜 양극단에서 양자택일 논쟁만 할까. 이 사회가 민주화 시대를 관통하면서 중요하게 여긴 가치 중 하나는 사회적 정의다. 그런데 정의란 정의 그 자체뿐 아니라 해결과 화해의 과정에서 의미가 커진다.

 

최근 국민대통합위원회 콘퍼런스에 갔는데 제주 4·3사건에 대한 발표 부분에서 보수 단체 인사들이 진행을 제지했다. 처음엔 언짢았는데 30분 정도 얘길 들었더니 경청할 내용이 있더라. 4·3사건 정의를 세우는 과정에서 또 다른 아픔을 유발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만델라가 진실화해위원회를 만든 것도 그런 취지다. 화해하기 전 진실 규명이 먼저라고 얘기하지만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누는 진실 규명이 아니라 화해가 전제된 진실이라면 좀 더 승화된 화해·진실이 가능하지 않을까.

 

 

 

 

앞서 얘기한 원효의 화쟁, 개시개비(皆是皆非)는 양비론이 아니다. 의견이 다르고 논쟁하더라도 상대를 미워하지는 말자. 내가 옳으면 네가 그르고, 네가 옳다고 인정하면 내가 틀린다고 생각하는 이분법을 지양하자. 각자 주장은 나름대로 옳음이 있다. '나의 옳음''너의 옳음'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게 화쟁이고, 민주 시민의 지혜다.

 

경청은 화쟁적 대화의 과정이다. 경청은 귀 기울여 듣는 것이다. 그냥 듣는 게 아니다.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좋은 음악을 들을 때 마음을 비우고 듣지 않으면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경청도 그렇다. 상대방 얘기의 약점을 찾기 위해 경청하는 건 의미가 없다. 경청은 자기를 비우고 상대방의 옳음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즉 공감하는 것이다.

 

요즘은 공감을 심리학에서 많이 쓰지만 원래는 시 창작 이론에서 나왔다. 꽃에 대한 시를 쓸 때 꽃을 바라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스스로 꽃이 되어볼 때 시가 나온다. 공감이란 '바라보기'에서 '되어보기'로 전환하는 과정이다.

 

이것만으로 물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출발점은 여기가 되어야 한다. 사회적 갈등과 분쟁을 중재하거나 해결하는 데 참여했던 사람들 얘길 들어보면 한결같이 경청하는 데서 합의의 실마리가 잡힌다고 한다.

 

미국 미주리주에서 낙태 문제를 놓고 대립이 벌어졌다. 낙태 시술 병원에 방화가 발생하는 등 격렬한 논란 끝에 낙태를 불법화했다. 그리고 낙태 반대론을 이끌었던 주민이 지역 신문에 기고해 "낙태를 하지 못해 태어난 한 부모 가정 아이들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자"고 제안했다. 다음엔 낙태 찬성론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함께 찾자고 요청했다. 낙태를 찬성하건 반대하건 둘 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는 열망은 비슷하다. 방법이 다를 뿐이었다.

 

경청과 공감이 사랑의 에너지

 

대화가 가능할 때 갈등과 분쟁은 문제 상황이 아니다. 사실 갈등과 분쟁이 없는 단일 의견만 존재하는 사회는 전체주의다. 간디는 "갈등과 분쟁은 진리를 드러내는 에너지이고 기회"라고 말했다. 우리 사회 갈등과 분쟁은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대화를 통해 발전의 기회와 에너지로 만들지 못하는 행태가 문제다.

 

대화는 영어로 'dialogue'. 둘 간(dia)의 논리(logue)라는 말이다. 둘 다 말이 되는 논리라는 의미다. 그리스 비극에서 안티고네는 국왕인 삼촌 명령을 거역하고 반역을 저지른 오빠 장례를 강행한다. 왕은 국법을 어긴 반역자는 적절한 장례를 허용할 수 없다는 통치 논리를, 안티고네는 가족의 윤리를 얘기하고 있었다. 화해할 수 없는 비극에서 안티고네는 "우리는 서로 미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말을 남긴다. 성경도, 불경도 결국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이게 인문 정신의 본질이다. 오규원 시인의 '무법'이란 시에는 '사랑에는 길만 있고 법은 없네'라는 구절이 나온다. 사랑하는 데 무슨 방법이 따로 있겠는가. 사랑하는 길만 있다.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한 경청과 공감은 결국 사랑의 에너지다. 예컨대 '세월호특별법'을 둘러싼 갈등에서 법률적 완결성과 합법성이 쟁점이 되긴 했지만, 사실 여기서 결여된 건 '사랑'이었다. 법 논리가 중요하지 않거나 틀린 게 아니라 아이 잃은 부모 심정을 그 논리와 법이 담지 못한다는 게 문제다.

 

체념은 포기가 아니라 희망

 

체념(諦念)도 중요하다. 체념은 포기하는 게 아니다. ()는 사실 진리 ''자다. 불교의 사성제(四聖諦), 네 가지 진리 할 때 그 글자다. 국어사전에도 희망을 버리고 단념함과 더불어, 두 번째는 도리를 깨닫는 마음이란 뜻이 나와 있다.

 

대화에 있어서나 민주사회를 살아가는 시민 입장에서 체념은 중요한 덕목이다. 주관을 단념하고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게 체념이다. 포기하는 마음이 아니라 '희망을 만들어 가는' 적극적 마음이다. 체념하지 못하는 마음은 '희망'이 아니라 미련일 뿐이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 교수는 "글이란 글 밖에 있는 걸 글 안에 담고자 하는 것"이라면서 사물을 온전하게 객관적으로 그린다는 게 가능한가라는 문제 제기를 한다. 저기 있는 나무는 자기 공간을 점하고 있고, 나는 내 공간이 있다. 내 인식의 공간을 뜻한다. 내 의식이란 캔버스는 이미 그 자체로 주관적 세계를 창조하고 있기 때문에 온전하게 저기 있는 그대로 그려낸다는 게 얼마나 가능한가. 결국 글쓰기라고 하는 건 주관의 체념이다. 주관을 체념할 때 전체를 온전하게 그려내는 글쓰기가 완성된다.

 

사회적 갈등과 분쟁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경청과 대화를 통해 해결을 위한 작은 합의, 공통의 분모가 만들어지려면 자기주장을 체념하는 게 중요하며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태도다. 합의의 결과가 선해야 하는 게 아니라 그 과정이 선해야 한다.

 

기원전 3세기 인도의 아소카왕은 불교에 귀의했지만, 통치자로서 다른 종교를 인정하고 포용하는 교시를 남겼다. "종교마다 기본 교리는 다를 수 있으며, 자기 종교는 사랑하고 남의 종교를 비판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 자기 종교를 선전하느라 남의 종교를 비난하는 것은 어떤 의도에서든 오히려 더 큰 해악을 가져다줄 뿐이다. 다른 사람의 가르침에도 귀 기울이고 존경해야 한다. 그리하면 자신의 종교도 발전하게 되고 진리도 더욱 빛나게 될 것이다."

 

인문학에서 세계의 중심은 아픔이 있는 곳

 

인문학에서 바라본 세계의 중심은 어딜까. 우리 몸의 중심은 어딘가. 가슴? 마음? 아니다. 발가락이 아프면 발가락이 중심이 된다. 귀가 아프면 귀가 중심이다. 인문학에서 바라보는 세계의 중심은 이 세상의 아픈 곳이다.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고, 또 지금 우리 사회가 앓는 분쟁과 갈등의 현장이다. 인문학은 사회 가장 아픈 곳의 중심에 서 있어야 한다.

 

또 인문학은 세상을 '이어준다'. 서로 다른 사람, 지역, 계층 그리고 왼쪽과 오른쪽, 위아래, 남과 북, 서로 다른 모든 것을 이어주는 게 인문학이다. 흔히 좌우, 진보 보수, 왼쪽 오른쪽을 다르다고 한다. 다르기도 하고 서로 구분된다. 그러나 이들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왼손과 오른손은 구분되지만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태극의 음양도 구분되지만 분리되어 있지 않다.

 

분쟁과 갈등을 문제 상황으로 바라볼 게 아니라 분쟁과 갈등을 바라보는 눈을 바꾸자. 그게 진리를 드러내는 더 큰 공동선을 만들어 가는 에너지가 되게 하자.

조홍근 원장.지구상에 사는 모든 생물은 태양의 주기에 따라 생체리듬을 조절해 왔습니다.

 

해가 뜨면 활동하고 해가 지면 자는 삶을 엄청난 시간 동안 되풀이하면서 우리 몸에는 빛을 인식하는 세포가 생겼지요. 더 나아가 빛과 어둠에 따라 작동하는 생체시계(master clock)가 발생했습니다. 이 생체시계와 우리 몸의 모든 세포는 서로 소통합니다.

 

뇌에 있는 생체시계(master clock)는 빛과 어둠에 따라 작동하고 간, 지방, 근육, 췌장 등에 있는 말초기관의 생체시계는 온도와 영양분에 따라 작동합니다. 예를 들어 간은 밥이 들어오거나 체온이 높으면 '아 지금 낮이구나' 생각하고 낮에 하는 활동을 합니다. 그래서 늦은 밤에 식사를 하면 내 몸은 자도 장기들은 낮으로 잘못 생각해서 쓸데 없는 에너지 낭비를 하게 됩니다. 잘 때 너무 온도가 높아도 장기들이 밤을 낮으로 착각해서 열심히 일하게 되는데, 그래서 열대야가 되면 잠을 자도 잔 것 같지 않아 피곤합니다.

 

뇌에 있는 생체시계는 시차 적응을 잘하지만 말초에 있는 시계는 적응이 더딥니다. 그래서 외국에 갈 때 시차부적응이 발생합니다. 빨리 적응하려면 말초시계를 신속하게 바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밥을 현지 시간에 맞게 먹으라고 권합니다. 밥 들어오는 것으로 낮과 밤을 구별하거든요. 낮과 밤을 바꾸어 생활하는 교대근무자(shift worker)들도 이 방법을 사용합니다.

 

이렇게 낮과 밤에 따라 신체의 모든 조직이 규칙적으로 on-off를 되풀이하는데 이런 리듬을 일주기성(circadian rhythm)이라고 합니다.

 

일주기성의 가장 대표적인 예는 혈압과 호흡, 체온입니다. 낮에 활동할 때는 혈압도 높고 호흡도 빠르고 체온도 높습니다. 그러나 쉬어야 하는 밤에는 저절로 혈압도 낮아지고 호흡도 천천히 깊게 바뀌고 체온도 1~2도 떨어집니다. 신기합니다. 이뿐 아니라 혈당, 인슐린, 콜레스테롤, 통증 민감도도 낮과 밤에 따라 많이 달라집니다.

 

교대 근무자처럼 낮과 밤이 자주 바뀌면 이런 일주기성이 교란되어 깨지기 쉽습니다. 그로 인해 혈압, 혈당, 스트레스 조절 등의 문제가 생겨 당뇨병, 심장병의 위험이 많이 증가하는데 이는 현대의학이 직면한 어려운 문제입니다. 미국의 통계에 의하면 전체 근로자 중 교대근로자의 비율이 가까운 장래에 약 20퍼센트 정도를 차지할 것이라고 하는데, 공중 보건학 측면에서 장차 심각한 문제로 떠오를 듯합니다.

 

이런 일주기성을 정리한 표가 있어 소개합니다.

 

 

 

 

/출처= Drug interaction, P111, 대한임상약리학회, 대한약학회 (이 표에 대한 참고문헌은 아쉽게도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이 표를 살펴보면 운동은 오후에 하는 것이 좋고, 뭘 빨리 외워서 써 먹으려면 아침 10시에 해야겠고, 무슨 일을 도모하려면 저녁 7시에 만나 밥을 먹으면서 하면 잘되겠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습니다. 통증이 왜 주로 밤에 많이 오고 아픈지, 층간 소음 문제가 왜 유독 밤에 심한지도 알 수 있습니다. 밤 10시 이후에는 잘 자야 하는 이유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건강의 첫 번째 비결은 몸과 자연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와 같이 사람이 인공적으로 만든 환경에서는 그러기가 쉽지 않지만, 따를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따르면서 사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윤희영의 News English

인생을 바꾸고 싶으면(transform your life) 습관을 바꿔야(tweak your habits)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찍이 서기 전 300년 "우리의 존재는 우리가 반복해 하는 행위의 모습이다.

'탁월함(excellence)'이란 단일한 행위가 아니라 습관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했다.

미국에서 출간된 '1%의 원리'라는 책은 1%씩 습관을 바꿔나가면 인생에 커다란 차이를 가져온다는(bring about a big difference) '원리'를 담고 있다. 아주 작은 변화들(tiny changes)이 성공 가능성을 엄청나게 높여준다는(massively increase the chances of success) 내용이다. 저자인 톰 오닐은 "그런데 우리는 삶의 틀에 박혀(be in a rut of life) 매일 매일의 일상만 그럭저럭 하면서(muddle through) 그저 행운을 빌고(cross our fingers) 잘되기만 바란다(hope for the best)"고 지적한다. 요지는 이렇다.

습관을 바꾸려면 작은 목표들을 세우고 하나씩 실행에 옮겨보라(put them into practice). 하루 24시간의 1%인 14분 동안만 어떤 1%를 바꿔야 할지 생각해보라. 어떤 옷, 무슨 차를 살까는 그리 많은 시간 고민하면서 왜 자기 인생에 대해선 하루의 1%도 투자하지 않는가.

알람시계를 15분 일찍 울리게 하라. 30분 일찍 잠자리에 들라. 많은 게 달라진다. 탄산음료나 술을 마시지 않고 일주일을 보내본다(go for a week without fizzy drinks or alcohol).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물건은 필요한 사람에게 준다. 덕을 베풀면서 집안과 삶을 정돈할(set your house in order and declutter your life) 수도 있으니 도랑 치고 가재 잡기다.

현재 하는 일의 좋은 점 3가지를 꼽아본다. 그리고 10년 후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 적어본다. 그 꿈을 이루기(make the dream come true) 위해 지금 해야 할 것 하나를 정한다.

 책상 서랍을 하루에 하나씩 정리 정돈한다(tidy one drawer a day).

지난 12개월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take time to reflect on the past 12 months).

좋았던 때와 나빴던 때(highs and lows), 성공과 실패(successes and failures)를 가려본다.

정말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feel really alive) 때는 언제였는지, 그런 느낌을 다시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되짚어본다.

 

사소한 일에 격하지(get excited over trifles) 말고 무시하는 법을 배워라(learn to ignore them). 작은 것들에도 웃고, 실수와 실패도 즐기는 법을 배워라.

 완벽주의자(perfectionist)가 되지 말라.

도달할 수 없는 것을 찾아(in search of the unattainable) 헤매게 해 고단하게 한다.

 목표를 향해 다음의 1%를 내딛는 것에만 집중하라(focus on taking the next 1 percent step towards your destiny).

안 될 것이라는 모든 이유는 잊어버리고, 될 것이라는 이유 하나만 믿어라.

인생은 자동차 핸들과 같아서(be like a steering wheel) 살짝만 움직여도 방향이 완전히 바뀐다(change the entire direction).

 여기서 1%만 틀어도 저 끝에 가서는 천양지차다.

다만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해야 한다. 어디로 갈지 모르는데 어떻게 가야 할지 어찌 알겠나.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영화기획] 이 가을, 꼭 봐야 할 로맨스영화

<오마이스타>는 스타는 물론 예능, 드라마 등 각종 프로그램에 대한 리뷰, 주장, 반론 그리고 인터뷰 등 시민기자들의 취재 기사까지도 폭넓게 싣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노크'하세요. <오마이스타>는 시민기자들에게 항상 활짝 열려 있습니다. 편집자 말

오스트리아의 대표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가을날>이란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쓰고 저주라 읽는)다.

"지금 집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지금 홀로 있는 사람은 오래오래 그러할 것입니다."

천고마비의 책 읽는 계절은 무슨. 산책을 부르는 가을만큼 사랑하기 좋은 계절이 또 어디 있으랴. 릴케의 저주 마냥 지금 홀로 있는 자, 유죄일지 모른다. 아마도 25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비긴 어게인>의 이례적인 흥행 역시 가을로 접어들며 탄력을 받은 결과이리라. 존 카니 감독의 전작 <원스> 역시 2006년 9월 개봉했으니 가을 로맨스 영화 흥행 공식은 당분간 불패의 신화로 남게 될 것 같다.

그 로맨스의 계절 가을에 집이 없든 있든, 데이트용이든 교본용이든 상관없이 기어코 꺼내 보게 하는 영화가 있다. 가을을 맞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영화, 커플이 관계를 돌아보게 하고, 싱글에게는 연애 DNA나 구 남친, 구 여친의 기억을 되살려 주는 2000년대 고전(?) 영화가 여기 있다. 부디, 이 영화를 다시 보며 (혼자든 둘이든) 오래오래 그러하시기를.

<만추>, 기묘한 안개만큼이나 운명적인 3일 간의 사랑




▲ 영화 <만추>의 포스터
ⓒ CJ엔터테인먼트 관련사진보기


이제는 '탕웨이의 남자'가 된 김태용 감독과 '중국인 한국 며느리'가 된 배우 탕웨이를 사랑에 빠지게 한 운명의 영화 <만추>. 이만희 감독의 고전을 리메이크한 이 작품은 3일간 귀휴한 애나와 그에게 차비를 빌린 훈, 어색했던 두 사람이 가을밤 한적한 놀이동산에서 마음을 열게 되는 판타지 장면만으로 로맨스 영화의 반열에 오르기에 충분하다.

인물의 미묘한 감정을 화려하기보다 내밀한 영화 언어로 포착하는 김태용 감독 특유의 색채는 <만추>의 배경인 시애틀의 안개와 화학 작용을 일으키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극대화한다. 그 분위기 속에서 3일 만에 묘한 감정을 느끼는 애나와 훈의 그 미묘하면서도 마법 같은 심리를 꼭 대리 체험하시라는 것. 혹시 아는가. 이 가을, 은은한 미소로 누군가를 기다리는 애나처럼 운명의 상대를 만나(거나 지금 상대의 진가를 알아 보)게 될지.

<500일의 썸머>, 세상의 모든 톰들이여 '가을양'을 영접하라




▲ 영화 <500일의 썸머>의 한 장면
ⓒ 이십세기폭스코리아 관련사진보기


<500일의 썸머>를 추천하는 이유는 살짝 엉뚱하다. 영화의 말미, 톰이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여성의 이름이 '가을(autumn)'이라서만은 아니다. 뜨거웠(다고 생각했)던 썸머(조이 드샤넬 분)와의 연애에서 한 뼘 더 성장한 톰(조셉 고든 레빗 분)은 운명의 상대를 알아보고 말을 건넨다. 얼핏 로맨스 영화의 흔하디흔한 엔딩이라고 평가절하하면 곤란하다.

시간대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썸머와의 연애를 기억하고 추적하는 <500일의 썸머>는 어쩌면 지금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거대한 환상이 실제로는 본인들의 착각일지 모른다는 진실을 재기 발랄하게 그려낸다. 그 달고 쓰고 아팠던 500일을 견뎌낸 세상의 모든 톰과 썸머에게 바치는 헌사인 셈이다. 각자의 썸머를 잊지 못한 분들이라면 더더욱, 운명의 '가을양'을 만나게 되기를.

<시월애>, 전지현과 이정재, 그리고 김현철의 음악




▲ 영화 <시월애>의 스틸컷
ⓒ 싸이더스 관련사진보기


과거 '엽기녀'에서 지금은 '천송이'로 거듭난 전지현과 만년 청춘스타에서 <신세계>의 이자성과 <관상>의 수양대군으로 전성기 시절의 인기를 회복한 이정재. 둘의 14년 전 앳된 얼굴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즐거운 영화가 바로 <시월애>다. 실제 내용은 현대인의 고독,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실연의 상처 등을 감각적인 화면에 담고 있지만 말이다. 시간을 초월한 사랑이라는 설정으로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됐다지만, 지금이라면 시도하기 힘든 파격(두 남녀 주인공이 실제로 결말에야 만나는)보다 긴 여운을 남긴 건 가수이자 작곡자 김현철의 음악이다.

'천재 뮤지션'이라 불리던 총각 시절의 감성을 간직한 그의 음악은 주제곡 'You Must Say Goodbye(유 머스트 세이 굿바이)'를 바탕으로 다채로운 재즈선율로 편곡한 OST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지금과 달리 한국영화 OST의 인기가 시들하지 않았던 때다. 누구는 청승으로, 누구는 감미로움이라 받아들일 영화 속 음악은 쓸쓸하면서도 감성에 젖기 마련인 가을과 무척 잘 어울린다.

<클로저>, 가까워지면 멀어지는 당신 "Hello Stranger"




▲ 영화 <클로저>의 한 장면
ⓒ 소니픽쳐스코리아 관련사진보기


"Hello Stranger(헬로 스트레인저)"란 명대사를 남긴 <클로저>를 꼽은 이유는 사실 역설에 가깝다. 동명의 연극을 노장 마이클 니콜스 감독이 연출한 이 작품은 만남과 헤어짐, 버림과 매달림을 반복하는 네 남녀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간결한 구성과 사실적(이어서 거부감이 들 정도)인 대사로 승화시킨 블랙 멜로라 할 만하다. 주드 로와 클라이브 오웬의 지질한 망가짐과 나탈리 포트만의 처절함, 줄리아 로버트의 원숙함이 빛나는 연기는 꽤 능숙하게 조율돼 있다.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고, 떠나간 뒤에야 그 사랑이 진짜였음을 깨닫는 극 중 댄의 후회, 일견 육체적인 사랑을 중시하는 듯한 래리, 현재와 과거의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안나 가운데 오로지 한 사람에게만 집중했던 (가장 어린) 안나야말로 이 복잡하고 지저분한 관계의 승자다. <클로저>는 그렇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관계, 그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는 이들의 어리석음에 대해 폭로한다. 커플들이라면, <클로저>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쓰디쓴 교훈이 한둘이 아니리라.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가을에 만난 사랑 부디 이듬해 봄까지...




▲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포스터
ⓒ 스폰지 관련사진보기


이누도 잇신 감독이 연출하고 츠마부키 사토시, 이케와키 치즈루, 우에노 주리가 출연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2004년 10월 개봉해 국내 관객에게 일본 영화의 감성을 알린 작품이다.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 조제와 사랑에 빠지는 청년 츠네오의 이야기는 사랑에 서툰 이들이나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이들, 일상에 변화를 준 이들이 공감할 만한 구석이 크다.

예컨대 뭔가 색다른 상대, 이질적이지만 매력적인 대상에 끌렸던 이들이 종국엔 자기 처지를 돌아보고 거부하고 싶던 현실로 돌아오며 느끼는 씁쓸한 자괴감 등이다. 사실 이 작품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겨울 바닷가를 찾은 조제와 츠네오의 여행과 모텔 시퀀스다. 그렇지만 가장 슬픈 장면은 가을 즈음에 만나 계절이 두 번 바뀌고 이듬해 봄에 조제와 헤어지며 길바닥에서 꺼이꺼이 우는 츠네오의 오열이 아닐런지. 그러니 부디, 올가을에 사랑을 시작한 커플이 있다면 오래오래 함께 하시기를. 릴케의 저주 따윈 잊어버리시고.

웰빙과 웰다잉은 반대 개념 아닌 삶의 한 묶음

 

중앙일보 편집국장논설고문을 지낸 최철주씨는 현역 은퇴 후 웰다잉을 바로 알기 위해 미국·일본 등 해외까지 나가 말기 환자 30여 명의 사연을 들었다.

 

웰빙(well-being)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넘치는 사회에서 내놓고 얘기하기도 꺼리는 웰다잉(well-dying)에 천착하는 이가 있다.

 중앙일보 편집국장·논설고문을 지낸 원로 언론인 최철주(72)씨다.

현재는 호스피스와 웰다잉 강사로 활동 중이다.

그는 웰빙과 웰다잉에 대해 “대척점에 있는 게 아니라 웰빙 안에 웰다잉이 존재한다”며 “몇 년 전 딸과 아내를 잇따라 암으로 잃은 것을 계기로 웰다잉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2004년 자궁암 환자이던 딸은 말기 상태에 들어가면서 수술을 마다했다. 중환자실에 들어가는 것도 완강히 거부해 가족들을 자주 울렸다.

딸은 메모지에 “더 치료할 방법도 없는 상태에서 중환자실에 가는 것은 지옥으로 가는 고통이나 마찬가지”라고 적었다.

당시 32세이던 딸은 직장을 그만두고 아기를 기다리는 평범한 주부였다.

이런 딸이 너무 일찍 죽음을 맞게 된 상황을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딸은 아빠에게 호스피스 아카데미 교육을 받아보라고 권했다.

 

웰다잉 강사 교육에 50대 여성 몰려 그가 6개월 과정인 호스피스 교육을 받던 중 딸은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이 끝난 다음 날에도 그는 호스피스 교육에 참석했다. 죽음 교육을 잘 받겠다는 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집사람은 슬픔을 이겨내지 못했고, 그게 독이 됐다. 딸이 숨진 지 4년 뒤 아내도 암에 걸려 모녀 관계는 참 특별하다고 느꼈다.” 그의 눈이 촉촉해졌다.

 부인은 항암제 치료를 거부하고 호스피스 센터를 나와 8개월간 집에서 머물다 임종했다.

 

그는 요즘 말기 환자들이 편안한 죽음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돕는 웰다잉 강사로 활동 중이다. 웰다잉 강사 양성을 위한 교육에도 적극적이다.

보통 10주 동안 진행되는 강좌인데 그는 이 중 한 강좌를 맡는다. 수강생은 80명 정도. 큰 일을 치른 뒤 삶에 대한 회의를 느낀 여성 수강생이 많단다.

50대 이후 여성이 수강생의 70% 이상을 차지한다고 했다.

 

그의 부인은 웰다잉 전도사가 되려는 남편과 함께 다른 나라 호스피스 병동을 방문했다. 투병 중에도 남편이 웰다잉 강사로 나가는 일을 적극 권하기도 했다가 어느 때는 씁쓸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병이 심해질수록 감정의 기복이 커졌다.

 

웰다잉 강사에게도 ‘좋은 죽음이란 무엇인가’는 선뜻 답하기 힘든 질문이다. 답을 구하기 위해 그는 아내와 함께 미국·일본 등의 호스피스 병동을 방문하고 죽음을 앞둔 30여 명의 말기 환자를 만났다. 현역에서 은퇴한 원로기자가 다시 취재수첩을 들고 ‘좋은 죽음’과 ‘그렇지 못한 죽음’의 차이를 찾아 나선 것이다.

그 결과물이 2008년 출간된 『해피엔딩-우리는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있다』란 책이다.

 

부인이 딸의 죽음을 받아들인 것도 미국의 호스피스 병동에서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많은 환자를 보고 나서였다. 그 후 부인은 “딸이 편안하게 갔다. 그것도 제 복이지”라고 자주 중얼거렸다.

 

연명 치료 거부한 소설가 최인호

죽음을 앞둔 환자들이 그의 취재에 순순히 응해줬을까.

 

“한국에선 힘들었다. 열에 여덟·아홉 사람은 자신의 말년을 남에게 드러내길 꺼렸다. 기자나 언론에 대한 불신이 깊어 저널리스트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럽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말기 환자들은 달랐다. 기타 치고 노래 부르고 담소하고 죽음을 평화로운 상태에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질문에도 잘 답변해줬다.”

 

그는 웰다잉을 실천한 저명인사로 고(故) 최종현 SK 회장을 먼저 꼽았다.

 

“죽음을 앞둔 최 회장을 직접 만난 건 아니다. 현역 기자 시절부터 최 회장의 죽음에 대해선 관심이 많았다.

돈·명예·권력을 모두 가졌던 최 회장이 대학병원에서 치료 받다 어느 날 집으로 돌아가 6개월 동안 통증 치료를 받다가 세상을 떠난 이유가 궁금해서였다.

당시 나는 중앙일보 도쿄총국장이었는데 일본 기자들이 오히려 최 회장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깊게 취재했다.

 나중에 최 회장의 동반자였던 SK텔레콤 손길승 명예회장으로부터 죽음의 과정을 전해 들었다.

손 회장에 따르면 최 회장은 폐암 수술 뒤 암이 재발하자 항암제와 방사선 치료를 거부했다.

통증이 심해지면 통증 완화제를 맞으면서 호흡 훈련을 하며 자기 마음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새 항암제를 써보자는 주변의 권유도 뿌리치고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였다.

 최 회장이 생을 마감한 당시(1998년)만 해도 토장(土葬)을 당연시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최 회장은 자신을 화장해 자연에 뿌려줄 것을 당부했다.

 그의 유언은 우리나라의 화장 문화를 바꾸는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유명 작곡자이자 바이올린 연주자인 조념씨의 죽음도 그에겐 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경기도 포천의 한 호스피스 센터에서 조 선생을 만난 것은 2008년 그가 숨지기 닷새 전이었다.

그는 지인들이 마지막 눈도장을 찍기 위해 병원을 찾는 것을 피곤해하고 나중엔 다 거부했다.

 그러던 분이 내 책을 보고 공감했다면서 나를 위해 문둥이 시인 한하운의 ‘보리피리’를 직접 연주해줬다. 지금 생각해도 눈물이 난다.”

 

그는 소설가 최인호씨도 임종 전에 만나고 싶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여러 번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나를 만나는 것을 부담스러워했다. 최 작가의 친구로부터 ‘그가 죽음을 앞두고 두려움을 갖기 시작했으며 계속 글을 쓰고 싶지만 죽음이란 운명은 어쩔 수 없다’는 말을 했다고 전해 들었다.

그는 연명 치료를 거부했다.”

 

그럼 죽음을 앞둔 가족이나 지인들에겐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까.

그는 자연스러운 대화를 권한다.

 

“병문안 와서 자신도 모르게 살아 있는 우월감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다. 환자에게 위로는커녕 마음의 상처를 주지 않으려면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천당 가실 거다’ ‘극락왕생 하실 거다’ 같은 말은 환자의 상처를 덧나게 한다.

 하느님·성경·화엄경·금강경 등 종교와 관련된 말도 너무 많이 하는 건 피하는 것이 좋다.

 신앙을 지닌 환자들도 종교 얘기를 하는 것은 싫어했다.

 ‘우리 지난 봄에 놀러갔을 때가 생각난다. 그런 행복한 시절이 다시 왔으면 좋겠다’ ‘약간 괜찮아지면 차나 한 잔 마시자’ ‘커피향 좋지’ ‘장미가 참 예쁘지’와 같이 평소처럼 가벼운 대화를 나누는 것이 더 큰 위로가 된다.

 시인 이해인 수녀에게 들은 얘기가 인상 깊다. 같은 병원에 입원했던 김수환 추기경이 ‘잠깐 오라’고 했단다.

 자신을 종교적으로 위로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김 추기경은 종교 언어 하나 쓰지 않고 ‘이해인 수녀, 대단하다! 정말 대단하다!’ 하며 인간적인 말로 자신을 위로했다고 했다.

 김 추기경이 가난하고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터득한 위로의 말일 것으로 이해인 수녀는 말했다.”

 

미국에선 초등학교 때부터 죽음 교육 시작

질병으로 여명이 제한돼 있는 이들은 어떻게 삶을 마감하는 것이 웰다잉일까. 그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고통스럽다.

받아들이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생명도 연장될 수 있다”고 답했다.

평온한 죽음, 즉 평온사(平穩死)에서 답을 찾자는 것이다.

 

“웰다잉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며 삶의 마지막을 맞는 것이다.

 생존 가능한 시간을 주치의에게 미리 알려달라고 요청한 뒤 남은 시간에 마무리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고 떠나는 것이 웰다잉의 좋은 예다.

영화 ‘버킷리스트’에서처럼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을 실행하는 것도 방법이다.

 말기 환자 중엔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람도 있다. 멀리는 못 가지만 일본·중국 등 가까운 나라를 여행한다.

이들은 진통제를 처방받아 통증이 심해지는 상황에 대비한다. 배낭을 메고 가족과 함께 국내 여행을 하거나 서예 등 취미 활동을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환자에게 여명을 말해주지 않는 의사가 꽤 많은 게 현실이다. 나중에 있을지 모를 환자나 보호자들의 항의를 꺼려서라고 한다.

 

“의료진이 예상하는 이상으로 오래 사는 환자들도 꽤 많다.

나는 주치의가 여명을 말해주지 않으면 담당 레지던트에게 물어볼 것을 권한다.

 의사가 죽음을 모르고 환자를 치료하는 것은 난센스다. 의사라면 환자의 치료(cure)와 관리(care)를 함께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국내 의대에선 죽음 교육이 거의 이뤄지지 않아 안타깝다.

 지난해 가을부터 울산대 의대가 전국 최초로 죽음학 강의를 시작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서구에선 어릴 때부터 죽음에 대한 교육을 실시한다. 그는 미국의 예를 들면서 초등학교 때 그런 교육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에선 초등 교사가 테이블 위에 화분을 놓고 삶과 죽음의 개념을 가르친다. 꽃은 열흘이면 시드는데 그게 꽃의 인생이란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다.

 아이들이 가족처럼 대하는 애완견도 10∼20년이면 떠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인터뷰를 마치고 헤어지면서도 그는 “웰빙의 삶을 살려면 웰다잉을 알아야 한다”

두 아이의 엄마 샬롯 키틀리(영국)씨가 지난 16일 세상을 떠났다(depart this life). 36세.

 

 

대장암 4기 진단을 받았다(be diagnosed with stage four bowel cancer). 간과 폐로 전이됐다(spread to her liver and lungs). 대장과 간의 종양을 제거하기(remove tumors from her bowel and liver) 위해 두 번 수술을 받았다.

25차례의 방사선 치료, 39번의 끔찍한 화학요법 치료(25 rounds of radiotherapy and 39 bouts of gruelling chemotherapy)도 견뎌냈지만, 끝내 놓아주지 않았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블로그 내용.

"살고 싶은 나날이 저리 많은데, 저한테는 허락하지 않네요. 내 아이들 커가는 모습도 보고 싶고, 남편에게 못된 마누라도 되면서(become grumpy with my husband) 늙어보고 싶은데, 그럴 시간을 안 주네요.

살아보니 그렇더라고요. 매일 아침 아이들에게 일어나라고, 서두르라고, 이 닦으라고 소리 소리 지르는(shout at my children to wake up, hurry up and clean their teeth) 나날이 행복이었더군요.

살고 싶어서, 해보라는 온갖 치료 다 받아봤어요. 기본적 의학 요법은 물론(not to mention the standard medical therapies), 기름에 절인 치즈도 먹어보고 쓰디쓴 즙도 마셔봤습니다. 침도 맞았지요(get acupuncture).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귀한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어요(feel like a waste of precious time). 장례식 문제를 미리 처리해놓고 나니(sort out my funeral in advance) 매일 아침 일어나 내 새끼들 껴안아주고 뽀뽀해줄 수 있다는(have a cuddle and kiss my babies) 게 새삼 너무 감사하게 느껴졌어요.

얼마 후 나는 그이의 곁에서 잠을 깨는(awake next to him) 기쁨을 잃게 될 것이고, 그이는 무심코 커피잔 두 개를 꺼냈다가 커피는 한 잔만 타도 된다는 사실에 슬퍼하겠지요. 딸 아이 머리 땋아줘야(plait her hair) 하는데…, 아들 녀석 잃어 버린 레고의 어느 조각이 어디에 굴러 들어가 있는지는 저만 아는데 그건 누가 찾아줄까요.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고(be given six months to live) 22개월 살았습니다. 그렇게 1년 보너스로 얻은 덕에 아들 초등학교 입학 첫날 학교에 데려다 주는(walk my son for his first day at school) 기쁨을 품고 갈 수 있게 됐습니다. 녀석의 첫 번째 흔들거리던 이빨(his first wobbly tooth)이 빠져 그 기념으로 자전거를 사주러 갔을 때는 정말 행복했어요.

보너스 1년 덕분에 30대 중반이 아니라 30대 후반까지 살고 가네요. 중년의 복부 비만(middle-age spread)이요? 늘어나는 허리둘레(expanding waistline), 그거 한번 가져봤으면 좋겠습니다. 희어지는 머리카락(greying hair)이요? 그거 한번 뽑아봤으면 좋겠습니다. 그만큼 살아남는다는 얘기잖아요.

저는 한번 늙어보고 싶어요. 부디 삶을 즐기면서 사세요. 두 손으로 삶을 꽉 붙드세요(keep a tight grip on your life with both hands). 여러분이 부럽습니다."

'Live to the point of tears.'(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 '눈물이 나도록 살아라.'


                                                        고난의 십자가 지고 갈 사제단의 40돌

“이 시대의 노란 리본 평생 달고 살 수밖에요”


‘교회의 사명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것. 빈자 약자들을 위해 교회 밖으로 나가라. 교회는 상처받은 약자들을 돕는 야전병원이 되어야 한다.’ 이런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을 삶에서 실천하는 종교인들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사제단)을 빼고 말할 수 있을까.

편한 길을 두고 굳이 고난을 자초하며 약자들 곁을 지켜온 사제단이 창립 40돌을 맞았다. 사제단은 22일 오전 10시30분 서울 명동성당 대성전에서 40돌 감사 미사를 올리고, 오후 1시엔 같은 장소에서 ‘사제단 40년 평가와 전망’ 심포지엄을 연다. 명동성당은 1976년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 철폐를 요구하며 김대중·문익환·윤보선·함석헌 등이 ‘3·1 구국선언’을 발표한 곳이자, 1987년 박종철씨 고문치사 은폐조작 사건을 폭로해 6월 항쟁의 불을 지핀 민주화의 성지다.

성서에서 40년은 이스라엘 족속들이 애굽(이집트)의 노예상태에서 도망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 광야에서 보낸 세월이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가나안 땅으로 향하기보다는 거친 광야로 나가고 있다. 왜일까. 40돌 행사 준비위원장인 김인국 신부(충북 옥천성당 주임·사진)에게 그 이유를 들었다.


                                                                            박정희 유신정권 저항하며 탄생 
                                                                           그 딸이 40년 민주화 여정 되돌려 
                                                                           사제단도 다시 그 자세로 가야 돼 
                                                                             22일 ‘40년 평가·전망’ 심포지엄
                                                                              ‘정치·종북 사제’로 매도 당하지만 
                                                                             빈자·약자 돕는 것이 교회의 사명 
                                                                              침묵은 결국 강자의 편을 드는 것 
                                                                            교회쇄신은 미룰 수 없는 당면과제


“40년 전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정권에 저항하며 사제단이 탄생했다. 그의 딸인 박근혜 대통령이 40년 동안 국민들이 피땀으로 연 민주화 여정을 참혹한 상태로 역주행해버렸다. 사회 전반이 유신독재의 상황으로 가고 있다. 그러니 사제단도 다시 그때의 자세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우익과 보수신문들은 사제들의 현실참여는 1970~80년대엔 저항하는 게 정당성이 있었지만, 민주화가 이뤄진 지금은 정당성이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왜 사회 갈등만 부추기느냐”며 “사제단이 역할이 달라져야 하는 것 아니냐”고 주장한다. 김 신부는 당시에도 독재자를 옹호하고 민주화 인사들을 음해하던 그들의 공식에 동의하지 않는다. 더구나 “교회 밖의 일에 그렇게 신경 쓰는 게 사제의 할 일이냐”는 논박에 대해서도 분명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왜 ‘교회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했는가. ‘교회 밖으로 나가 빈자와 약자를 돕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한국 천주교는 초기 100년간은 박해시대 순교로 인해 산으로 피해 도망다니며 기진맥진해 미처 교회 밖을 돌볼 수 없었다. 그 이후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조선교구를 이끈 뮈텔 주교와 김수환 추기경, 두 개의 모델이 한국 천주교를 대표하고 있다. 뮈텔 주교는 한민족을 등진 채 한국 교회를 지키는 데만 주력했다. 반면 김수환 추기경은 민주화 여정에 동참하고 인권 피해자들을 껴안으며 세상을 살리기 위해 애썼다. 교황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어떤 모델을 따라야 할 것인지는 명확하다. 사제들은 교회 자신만을 위해 파견된 존재가 아님은 분명하다.”

40살 이후에도 사회 참여를 중단하거나 수정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게 김 신부의 주장이다. 오히려 사제에서 평신도로, 사회적 이슈에서 세상 전반으로 ‘참여’가 확산되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지난달 방한한 교황께서 평신도 대표들을 만난 자리에서 ‘자선사업도 좋지만, 인간 성장에 기여하라’는 주문을 했다. 교황은 ‘규제받지 않는 자본주의는 새로운 독재’라고 했듯이, 자본에 의해 정리해고를 당하고 폐기물로 취급되는 인간들이 인간으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구조적 개선을 요청한 것이다.”

사제단은 세상 밖으로 나올수록 ‘갈등과 분열의 주범’으로 공격받을 게 뻔하다. 최근엔 우익들과 연계된 교회 내 단체들까지 등장해 사제단을 ‘정치 사제와 종북 사제’로 매도하는 데 앞장서고 있다.
“교회 내에서 사회적 문제에 대한 입장 차이로 분열하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주교들이 그런 분열이 두려워 눈치를 보며 침묵하는 건 교회를 기둥부터 썩게 만드는 것이다. 눈치를 보는 대상이 누구냐. 약자들은 아니다. 결국 기득권자들의 눈치를 보는 것이다. 약자들은 이의제기도 하지않는다. 침묵은 결국 강자의 편을 드는 것이다. 그러면 빈자와 약자를 우선적으로 선택해야 할 교회가 복음의 기둥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눈치를 살피기보다는 빈자와 약자를 돕다가 시끄러워질수록 오히려 복음다운 것이다. 그게 교회의 건강함을 보여주는 지표다.”

이 때문에 ‘교회 쇄신’은 더 미룰 수 없는 당면 과제라는 게 김 신부의 생각이다. 교황의 방한 성과를 일회성으로 덮어버리지 않고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는 사목의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서도 교회 상층부부터 쇄신이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본당 예산의 10%는 무조건 사회복지기금으로 쓰고 그중 30%는 정의평화기금으로 쓰는 인천교구처럼 사제들이 예산 사용하는 것부터 쇄신하는 운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말했다.
“진정한 쇄신은 자기다움의 회복이다. ‘보잘것없는 사람’ 보기를 ‘주님’ 보듯이 하는 특유의 시력을 되찾는 것이다. 교회가 모든 이를 비춰주고 살려주고 키워주는 태양이라면 가장 우선적으로 비춰야 할 이들은 벼랑 끝에 서 있는 사람들이다.”

김 신부는 “그래서 사제단은 이 시대의 노란 리본을 평생 달고 살 수밖에 없다”고 한다.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순교당한 복자 124위처럼 박해받고 고난당하는 것은 세상의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복음의 기쁨’이기에, ‘40돌’ 이후에도 고난의 십자가를 계속 지고 가겠다는 것이다.

[중앙일보] 싱글족 47% 스웨덴 행복도 세계 5위

‘복지 천국’으로 불리는 스웨덴은 1인 가구 비율이 전체의 47%에 달한다. 국민 두 명 중 한 명은 혼자 산다는 얘기다. 수도인 스톡홀름은 이 비율이 무려 60%에 이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웨덴에서는 ‘고독사(孤獨死)’ 같은 사회적 문제를 찾아보기 어렵다. 전통적인 가족의 개념이 해체됐음에도 ‘살기 좋은 나라’에 꼽힌다. 실제로 지난해 유엔이 전 세계 156개국을 대상으로 국민 행복도를 조사한 결과(2013년 세계 행복 보고서)에 따르면 스웨덴은 덴마크·노르웨이 등에 이어 5위였다.

 비결은 다양한 복지제도와 사회안전장치다. 특히 ‘공동주택정책’은 1인 가구를 위한 핵심 지원책이다. 집합주택 거주자들이 개인 원룸을 제외한 공동주방과 육아센터 등 나머지 시설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다양한 연령대의 거주자들은 각자의 경험과 정보를 교류하며 공동체를 꾸려나간다. 이 때문에 1인 가구라 해도 고립될 일이 없다. 상대적으로 수입이 적은 청년층과 노년층의 안정된 주거생활을 뒷받침하기 위해 국가에서 지원하는 주택보조금은 이 나라가 1인 가구의 천국이 될 수 있는 밑바탕이 됐다.

  일본은 1인 가구 맞춤형 치안·공공서비스를 제공한다. 일본 도쿄가스의 경우 독거노인의 가스 사용 여부를 친지들에게 전화로 알려주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프랑스에는 ‘콜로카시옹(colocation)’이란 제도가 있다. ‘두 세대 함께 살기’ 등 협회를 통해 독거노인이나 노인 부부가 젊은 학생들과 함께 사는 것이다.

제목 그대로 <만들어진 우울증>은 자연스런 감정을 질병으로 만드는 사회에 대한 비판이다.

수줍음 같은 소극적 기질을 우울증으로 몰아 막대한 이익을 챙기는 미국의 제약, 의료 산업 구조를 파헤친다. 하지만 우울증에 관한 무지가 심각한 우리 사회에서는 섬세한 읽기가 필요하다. 우울증은 약을 제대로 복용하지 않아 재발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인들은 다른 약은 남용하면서 유독 신경정신과 처방전만은 “의지로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의지는 적재적소의 미덕이 가장 중요하다.

그렇지 않은 의지는 재앙이다. 지나친 의지, “하면 된다. 안 되면 될 때까지”는 목표가 무엇이든 바람직하지 않다. ‘열심’은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주변에 그런 사람이 많아서일까. 내게 ‘열심’은 치열하거나 성실하다는 의미보다 완장 차고 설친다는 인상이 강하다. 환경 파괴는 덤이다.

 

이 책은 수줍음이 어떻게 병이 되었나(원제)를 추적한다. ‘밝고 긍정적인 인상’처럼 무조건 긍정되는 말도 드물다.

 자본주의에 적합한 인간형과 기분(mood)이 있다. 체제는 적응형 인간을 정상으로 본다. 활기는 맹목적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가 된 반면 우울함, 슬픔, 무기력은 부적응 ‘증상’이 되었다. 단조형 감정은 자본의 적이다. 자본은 떠들썩한 분위기를 좋아한다. 보이지 않는 손은 없다. 글자 그대로 경기는 ‘부양(浮揚)’하는 것이다.

부끄러움, 겸손함, 신중함의 미덕은 후퇴했다. 이 책은 성공을 위해 확신에 차 있으며 사교성이 지나치게 좋은 인간 유형을 찬양하는 시대를 분석한다. 수줍음이 아니라 다행증(多幸症)이 문제라는 것이다. 울퉁불퉁한 사람, 내향적인 사람, 염세주의자, 비관주의자, 소심한 사람이 없는 사회가 건전한 사회일까.(7장)

 

즐거움 집착 현상은 사색이나 고뇌보다 건강, 출세, 스펙, 힐링에 집중한다. 그렇지 않거나 그런 가치에 관심 없는 사람은 낙오자 취급한다. 뻔뻔 당당형, 자기도취, 근거 없는 자신감에 넘치는 리더들이 많다. 막히는 도로에서, 아니 사회 도처에서 “목소리 크면 이긴다”는 ‘활기’가 넘친다.

 

세월호는 매일 충격의 강도를 갱신하고 있지만 ‘세월호 피로감’은 절정이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문제 해결을 방치하고 일을 안 하는 정치권과 관료들이 국민에게 피로감을 준다는 뜻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이 표현으로 비판받아야 할 사람들이, 이 말로 피해 집단이 행복을 방해한다고 불평하고 있다. 당신들 때문에 피곤하다고.

피로감의 출처는 어디인가. 지난 4월16일 이후 사태를 관통하는 공통점은 ‘누가 할 말을 누가 하고 있는가’라는 피로감이다. 적반하장이 분노에서 가치관의 혼란과 자기 검열을 거쳐, 집단 우울증을 낳았다. 그들이 말하는 피로의 내용을 알고 싶다. 지겨움? 지겨운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무엇이 이토록 정부 여당을 공포에 떨게 하는가 궁금증만 깊어갈 뿐이다. 유병언씨의 죽음(?)을 둘러싼 항간의 다양한 분석들이 대표적인 예다.

 

피로감 언설은 어두운 일은 잊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처럼 얘기한다.

 신문이나 방송도 “따뜻한 소식, 즐거운 뉴스가 많은 세상을 희망해봅니다”는 식의 언급을 자주 하는데 그 자체로 좋거나 나쁜 소식은 없다. 뉴스는 정치보다 당파적이다. 사람마다 이해관계, 입장, 위치에 따라 희비가 다르다. 어떤 사람에게 괴로운 사실이 어떤 사람에게는 사태의 진전일 수 있다.

어떤 이에겐 평화가 어떤 이에겐 부정의일 수 있다.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사건의 효과는 없다. 그러므로 “당신은 무엇에 대해 걱정하는가”보다 “이 걱정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질문이 더 효과적이다.(257쪽)

 

나는 한국 사회가 싫어하는 인간형은 진보나 여성주의 이런 쪽(?)이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느낄 때가 많다.

문제 제기, 정확한 질문이 많은 사람도 공격적이라고 기피한다. 생각하는 사람은 모나거나 어두운 사람이라는 편견이 있는 것 같다.

사유는 인간 본성(호모 사피엔스!), 세월호는 영원히 생각할 문제다. 책임지고 해결해야 할 일상이다. 행복 강박을 버리고 비극을 허락하라.

 불안 없는 영혼이 더 위험하다.(319쪽)

 

정희진 여성학 강사

박근혜 대통령 ‘처세술’ 누구한테 배웠나       이봉수 시민편집인·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장

유아독존, 아전인수, 교언영색, 당동벌이, 객반위주….

지난 16일 박근혜 대통령의 국무회의 발언을 듣고 ‘도대체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고심하며 떠올려본 사자성어들이다.

유아독존(唯我獨尊). 세상에서 자기만 존귀하다고 생각하는 태도다. 왕조 시대 군왕의 태도인데, 민주주의 시대 지도자라면 가져서는 안될 기질이다. 잘난 체하기로 제일 유명한 왕은 루이14세쯤 될 것이다. ‘짐은 곧 국가’라고도 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비슷한 말을 했다. “대통령에 대한 모독적인 발언은 국민에 대한 모독이다.” 설훈 의원의 말투에 개인적으로 기분이 나빴을 수 있다는 점은 이해한다. 그러나 대통령이 자신을 국민과 동일시하는 전근대적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것을 알고 기분 나빠진 국민도 있을 것이다.

같은 군 출신이지만 전두환·노태우 두 대통령은 결이 꽤 달랐다. 전 대통령은 자기를 많이 닮은 탤런트조차 출연을 금했지만, 노 대통령은 “나를 코미디 대상으로 삼아도 좋다”고 말했다. 권위주의에 길들여진 언론은 그런 대통령을 ‘물태우’라고 조롱했다. 고졸인 노무현 대통령은 보수언론이 아예 대통령 대접을 하지 않았다.

한국 언론의 병리를 드러낸 보도 태도였지만 대통령이 탈권위주의로 나가는 방향은 옳았다. 약간의 금도만 지켜진다면 정치인에 대한 국민과 언론의 풍자는 폭넓게 인정돼야 한다. 우리나라 예전 탈춤도 그랬지만 정치 선진국에서는 신랄한 풍자를 당연하게 여긴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 때 검찰이 풍자만화나 걸개그림까지 처벌하기 시작하더니 요즘 들어 우리의 풍자문화는 박정희·전두환 시대로 퇴행하는 느낌을 준다.

우리나라에는 대통령뿐 아니라 국회의원이나 자치단체장까지 선거가 끝나면 ‘공복’이 아니라 큰 ‘벼슬’로 여기고 뻣뻣해지는 이들이 많은데, 말 속에서 그런 태도가 배어 나온다. 진해야구장 건립 취소로 16일 달걀 투척 세례를 받은 안상수 창원시장도 발표문에서 “110만 창원시민의 수장에게 테러를 가한 것은 시민을 모독한 행위”라며 시민의 ‘수장’을 자임했다.

아전인수(我田引水). 자기에게만 이롭도록 생각하거나 행동함을 이르는 말이다. KBS 여론조사에서도 세월호 재협상과 수사권·기소권 보장이 훨씬 우세했는데 반대 의견만 수렴해 재협상을 걷어차버렸다. 세월호법으로 설치될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달라는 유가족 요구를 삼권분립에 위배된다며 5개월간 침묵하더니 “여야의 2차 합의안이 마지막 결단이었다”며 입법권을 침해했다. 삼권분립을 내세우거나 내팽개치는 것이 자신의 유·불리에 달렸다.

박 대통령은 “국회가 국민에 대한 의무를 행하지 못할 경우 그 의무를 반납하고 세비도 돌려드려야 한다”고 말했다. 삼권분립 체제에서 헌법 위반 소지가 있는 대통령 발언이 아닐 수 없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행정부를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이 입법부의 권능을 무시하는 것은 탄핵감 아닌가? ‘말도 못하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그렇다면 대통령 하야 발언에는 여권이 왜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했나? 박정희 대통령이 10월유신 때 국회를 해산한 것도 국회를 시녀로 여긴 사고방식의 연장선에 있었다.

내각책임제라면 총리는 의회를 비판하고 해산까지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권한은 총리 자신의 퇴진을 전제로 한다. 함께 책임을 지도록 제도를 발전시켜온 것이다. 세비 반납 발언도 아전인수식이다. 한나라당 대표 시절 사학법에 반대해 두 달간 국회에 나오지 않았을 때 세비를 반납했다면 말발이 선다. 박 대통령은 국회의원 시절 민생법안은커녕 법안 제출 건수와 출석일수가 모두 꼴찌였다.

교언영색(巧言令色). 남의 환심을 사기 위해 꾸며서 하는 말과 꾸며서 짓는 낯빛을 일컫는다. 박 대통령은 5월19일 눈물을 흘리면서 세월호특별법 제정과 진상규명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때의 말과 눈물이 교언영색이 아니었다면 수사권과 기소권을 주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눈물이 턱까지 흘러내리면 가려워서라도 닦기 마련인데 그러지 않은 것은 역시 꾸민 행동이었나?


▲ 유아독존, 아전인수, 교언영색, 당동벌이…
우리는 어쩌다 이런 대통령을 ‘모시게’ 됐나

▲ ‘짐은 곧 국민’ 권위에 대한 도전 용납 안해
원칙도 유·불리 따라 변하고 꾸며서 하는 말 수시로 바꿔
보수신문·방송이 부추기면 대립국면 조성해 난국 돌파


 

정부의 교언영색 중 최신판은 국민 건강을 위해 담뱃값을 올린다는 발표였다. 국민 건강이 그렇게 걱정된다면 정부가 금연운동을 벌이든지 부탄 왕국처럼 아예 흡연을 금지하면 될 일이다. 노무현 정부 때 담뱃값을 500원 올리려 하자 박근혜·최경환 의원은 반대했다. 그때는 국민 건강을 조금만 위하는 수준이어서 반대했나? 서민 부담이 큰 간접세이지만 세수 확보와 국민 건강을 위해 담뱃세를 올렸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더라면 애연가들이 뒤틀린 심사를 달래기 위해 애꿎은 담배를 또 태우지는 않았을 터이다.

‘민생 타령’을 하며 세월호 국면에서 벗어나려는 것은 전형적인 교언영색이다. 대선 때 박근혜 후보가 내걸었던 경제민주화와 복지 강화도 알고보니 ‘감언이설’이었지만, ‘민생’은 공약을 지키는 게 가장 확실한 해결책이다. 서민들의 삶이 총체적으로 붕괴되고 있는데 일부 서비스업과 부동산의 규제를 푸는 걸로 민생을 해결하겠다는 발상이야말로 무능 정권의 밑천을 드러낸 것이다. 학교 근처에 호텔을 짓겠다는 관광진흥법과 의료법인의 영리자회사 설립을 허용하는 의료법 개정안 등은 ‘민생법안’이 아니라 ‘민폐법안’이 될 가능성이 높다.

보수신문과 ‘정권방송’이 ‘우리 경제가 골든타임을 놓치고 있다’는 보도를 쏟아내자 정부도 맞장구 치며 세월호 정국 탈출에 십분 활용하고 있다. 세월호처럼 갑자기 침몰했나, 한국 경제에 느닷없이 골든타임이 닥친 이유를 모르겠다. 집권하고 1년반도 넘은 때에….

박 대통령의 재래시장 방문은 박정희 대통령 이래로 써먹어온 교언영색의 수법인데도 먹혀 들어가는 건 왜일까? 정치적으로 대립국면이 고조될 때마다 시장에 가는 건 ‘정치와 초연하게 경제만 생각하는 대통령’이란 이미지를 부각시켜 주기 때문이다. 청와대 사진기자단이 주범이다. 재래시장을 찾는 것은 사주는 상품값만큼만 민생에 도움이 될 뿐이다. 정치를 통하지 않고 경제를 살릴 방도는 없다. ‘경제’란 말 자체가 경세제민(經世濟民), 곧 ‘세상을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 아닌가.

당동벌이(黨同伐異).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끼리 한패가 되고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을 물리친다는 말이다. 박 대통령은 “세월호특별법에 ‘순수한 유가족’들의 마음을 담아야 하고 ‘외부 세력’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민을 아군과 적군으로 구분하고 대결국면을 조성해 난국에서 빠져나가려는 발상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100%를 위한 대통령이 되겠다던 ‘국민대통합’ 약속을 완전히 저버리고 절반가량 지지층만 확실히 안고 가겠다는 태도다. 보수신문과 종편방송의 지지를 받고 있는데다 지상파 방송도 극우인사들을 방송통신위원회와 KBS 이사회 등에 대거 포진시킴으로써 대국민 심리전 준비를 끝낸 상태다. 이름만 남은 ‘공영방송’의 사장과 요직도 친여 인물로 채워졌다.

객반위주(客反爲主). 손님이 도리어 주인 노릇을 한다는 뜻이다. 세월호 유족들도 국민이지만 국민을 돌봐야 할 대통령은 그들이 헌법체계를 흔들고 경제의 발목을 잡는 ‘국가의 공적’이나 되는 것처럼 매도했다. 박 대통령은 유족들에게 “진상규명에 여한이 없도록 하겠다”더니 오히려 대못을 박았다.

박 대통령의 정치 스타일과 처세술이 체득한 것이든, ‘호가호위’하는 참모들의 농단에 따른 것이든, 언론이 부추긴 것이든, 아니면 합작품이든, 최종 책임은 대통령에게 돌아간다. 박 대통령은 세월호 정국에 대한 국민 피로도가 점증하고 야당이 지리멸렬한 틈에 승부수를 잘 던졌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성역 없는 진상규명으로 유족들의 한을 풀지 못한다면, 진심으로 서민을 위한 정책들을 내놓지 못한다면, ‘정신적 내전’ 상태라고 불릴 만큼 편가르기가 심한데 그걸 더 부추긴다면, 언론에 의해 일정 부분 ‘만들어진’ 지지율을 믿고 일방적으로 국정을 밀어붙인다면, 박근혜 정권은 임기말에 참담한 ‘일패도지’로 귀결될 공산이 크다. 그때 가서는 어떤 사자성어를 떠올릴까?

자승자박, 소탐대실, 인과응보, 진퇴유곡…. 그래도 국민을 위해 ‘사필귀정’으로 끝났으면 좋겠다. 악담이 아닌 쓴소리로 받아들였으면 한다.

요즘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 새누리당 등 집권세력은 표정관리하느라 애쓸 것 같다. 연이은 ‘인사 참사’로 청와대와 새누리당에 대한 불리한 여건이 조성되었음에도 국회의원 재·보궐선거에서 이겼다. 잘못은 여당이 해도 심판은 계속 야당이 받고 있다. 야당의 아성 호남에서 박 대통령 측근 중 측근인 이정현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넉넉히 당선했다. 정치적 반사이익도 챙기지 못한 제1야당의 지지율은 연일 추락하여 20%대를 겨우 유지하고 있지만, 새누리당은 45%를 지켜내고 있다. 진보성향의 장하성 교수도 “새정치민주연합은 현 구조라면 10년 안에는 재집권이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국가의 무능’을 만천하에 드러낸 세월호 참사에도 불구하고 집권세력으로서는 큰 고비는 넘겼다. 세월호 유가족의 절절한 호소를 외면하고 심신을 지치게 만들면서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막아내고 있다. 어버이연합, 엄마부대, 일베 등 몰상식 집단이 앞장서서 가지각색의 행패를 부리며 유가족을 모욕하고 있으니 ‘차도살인(借刀殺人)’ ‘좌향기리(坐享其利)’의 성과도 즐기고 있을 것이다.

한편 법원은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과 원세훈 전 국정원장 사건에서 공직선거법 위반에 대한 무죄판결을 내려 탄생 초기부터 의심받던 정권의 민주적 정통성을 사후적으로 보완해주었다. 이제 국정원과 경찰의 선거개입에 항의하던 시민들과, 헌정문란 국가범죄와 정면으로 맞붙으며 법치주의를 수호하려 했던 윤석열, 권은희 두 법률가를 몰아칠 근거가 마련되었다.

요컨대 대선 이후 선거를 계속 이겼고 당분간 선거 치를 일도 없는 데다, 무조건 똘똘 뭉쳐 지지해주는 45%가 있는데 야권은 자중지란, 사분오열, 지리멸렬이니 집권세력 입장에서는 잔치를 벌이고 싶을 것이다. 대한민국을 세세손손 ‘이승만과 박정희만의 나라’로 고착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도 커져갈 것이다. 집권세력이 대선 시기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공약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린 것, ‘경제 살리기’란 미명 아래 공공부문을 영리화(營利化)하려는 것, 부자감세로 위기에 처한 재정을 서민증세로 메우겠다는 것, 자신들도 합의하여 제정한 ‘국회선진화법’을 이제 와서 개정하겠다는 것 등은 바로 이런 자신감의 발로일 것이다.

이 시점에 박 대통령 등 집권세력의 수장들에게 몇 마디 하고자 한다. 몰락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지금이 절정기라고. 견제세력도 국민적 저항도 미미하니, 남은 것은 “반신반인” 운운하는 아부와 충성 경쟁, 그리고 그 뒷면에서 벌어지는 자리다툼과 부패일 것이다.

옛글을 빌려 말하면, <순자(荀子)>가 말한 ‘국적(國賊)’, 즉 “나라가 잘되고 못되는 것은 거들떠보지 않으면서, 교묘히 임금에게 영합하여 구차하게 받아들여져 자기의 녹봉이나 유지하고 사람들과의 사귐만 넓히고 있는 자”, <관자(管子)>가 말한 ‘침신(侵臣)’, 즉 “법령을 훼손하며 사사로이 패거리 짓기를 좋아하고 사사로이 청탁을 행하는 자”들이 창궐할 것이다. 반면 대통령의 언동에 대하여 합당한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배신자’로 취급되고 ‘불경죄(不敬罪)’를 범한 것으로 여겨져 인사상 불이익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한비자(韓非子)>가 말한 ‘망징(亡徵)’, 즉 나라가 망하는 징조도 강해질 것이다. 즉, “군주가 고집이 세서 남과 화합하지 못하고 간하는 말을 거슬러 남을 이기고 싶어하며 경솔하게 자만심이 강한 경우”, “군주가 잘못을 뉘우치지 않으며 나라가 혼란한데도 자기 자랑만 하는 경우” 등을 더 자주 보게 될 것이다.

한편 내우외환으로 망해가는 듯이 보이는 야권은 차츰차츰 전열을 찾을 것이다. 폐허 속에 새로운 지도력이 형성될 것이다. 현재 여권의 지지율은 여권이 잘해서가 아니라 야권이 못해서이다. 주권자는 야권의 무능함에 실망하고 있지만, 동시에 여권의 뻔뻔함에도 분개하고 있다. 권위주의 독재체제를 버텨내고 마침내 무너뜨린 ‘능동적 시민’은 항상 새로 태어나고 성장한다.

로마 시대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성대한 개선행진을 할 때 바로 뒤에 노예 한 명을 세워놓았다. 그 노예의 임무는 장군에게 계속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이었다. “당신도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Memento mori), “당신도 한낱 인간임을 기억하라”(Hominem te esse memento). 대선 시기의 마음과 약속을 다 저버렸으나 승리를 구가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 그리고 그를 보좌하는 김기춘 비서실장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에게 이 말을 보낸다.

박희태 전 국회의장의 ‘골프장 경기진행요원(속칭 캐디) 성추행’ 사건은 우리 사회의 부끄럽고 참담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박 전 의장의 지위가 특별히 높고, 그의 가해 행동이 지나치게 심각하며, 피해자가 남다른 용기를 발휘해 고소했기 때문에 더욱 주목을 받는 측면이 있긴 하지만, 주변에서는 유사한 피해 상황이 일상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여군 장교가 상관의 성추행을 견디기 힘들어 자살하고, 여교사들을 상습 성추행한 교장은 경징계를 받고 만다. 검사는 여자 피의자를 성추행하고, 항공사는 승무원 대상 성추행과 성희롱 승객들에 대한 강력한 대응을 천명하기에 이르렀다. 지성의 전당인 대학에서도 교수의 제자 성추행과 성희롱이 심각한 문제고, 회식 자리 성추행 사건은 점심시간 직장인들의 단골 화젯거리가 된 지 오래다.

왜 이 지경일까? 일부 주장처럼 ‘남자의 성 욕구는 본능적’이고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강해서’일까? 그렇다면 그 본능적 욕구는 왜 늘 높고 강한 사람이 낮고 약한 사람을 대할 때만 발동할까? 한국 남자들이 다른 인종이나 민족의 남자들보다 진화가 덜 된 미개한 인종집단일까? 게다가, 최근엔 여성 상관이나 직장 상사, 혹은 교사들이 남자 신입사원이나 학생들을 성추행하는 사건들도 늘고 있다. 지위가 높아지면 여성 성호르몬이 남성 성호르몬으로 바뀌고 남성적 성 욕구가 생기는 놀라운 ‘생물학적 변화’가 발생하는 것일까? 의학적, 심리학적으로 ‘성(性·sex)’은 대뇌 ‘성 중추’에 의해 통제된다. 발정기에만 성 욕구가 생기는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은 언제든지 인지와 의식, 상상 등의 작용으로 성 중추가 자극되어 성 욕구가 발동될 수 있다. 심지어 노령, 질병, 거세 등으로 인해 기능적으로 ‘성불능’ 상태인 사람도 성적인 환상을 즐기고 다른 사람에게 성적인 가해 행위를 할 수 있다. 심지어 동유럽 체코 공화국에선 물리적 거세를 당한 성범죄 전과자가 연쇄성폭행을 저지르다 검거되기도 했다. 물론, 김수창 전 제주지검장 등 ‘이러면 안 되는데’라고 생각하면서도 충동과 욕구를 통제하지 못해 성범죄를 저지르는 ‘성도착 환자’들도 있다.

하지만, 권력자 혹은 상급자나 고객 등 소위 ‘갑’의 위치에 있는 자들이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소위 ‘을’에게 저지르는 성희롱과 성추행은 모두 철저히 합리적 선택에 의해 저지르는 범죄들이다. 즉, 개인적으로는 ‘본능’이 아닌 인지와 사고 등 ‘생각’과 ‘습관’이 문제고, 사회적으로는 문화와 관행이 원인이다. 그동안 대기업의 중소기업 혹은 대리점 대상 횡포, 지위가 높거나 많이 가진 자들이 상대적으로 약한 자들을 괴롭히고 착취하거나 폭행하는 소위 ‘갑질’ 논란의 연장선상이라고 할 수 있다. ‘성(性) 갑질’이라 할 만하다. ‘성(性) 갑질’이 더 문제인 이유는, 가해 행위가 은밀하게 이루어지고, 피해자는 극도로 수치심을 느껴 큰 충격과 긴 후유증에 시달리는 데 반해 신고나 항의 혹은 피해구제 노력을 하기 어렵다는 특성 때문이다. 만약 ‘성(性) 갑질’ 피해 사실을 알리거나 신고할 경우 피해자들을 도와야 할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오히려 숨기고 무마하려 애쓰거나 피해자에게 불이익을 가하기도 한다. 가해자들은 이런 피해자들의 약점을 너무 잘 알고, 서로 공유하거나 학습하면서 ‘성(性) 갑질’을 상습적으로 저질러왔다.

이제는 멈춰야 한다. 부끄럽고 안타깝게도 누이와 딸과 손녀를 생각하라며 ‘갑들에게 반성과 자각’을 호소해 봐야 효과가 없다. 박희태 전 국회의장을 고소한 용감한 골프장 경기진행요원 같은 ‘을’들의 자기 권리 찾기 노력과 이들의 용기와 노력을 지키고 보호하고 북돋워 주는 국가와 사회의 시스템이 ‘성(性) 갑질’을 멈추게 해야 한다. ‘발본색원’ ‘4대 악 척결’ 같은 용어는 ‘성(性) 갑질’에 적용되어야 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