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최고의 날은 아직 오지 않았다.

샤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자 팬디의 수석 디자이너인 칼 라거펠드의 명언이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패션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며 활발히 활동 중인 칼 라거펠드

패션을 전혀 모칼 라거펠드

 

-디올 옴므(Dior Homme) 수트를 입기 위해 13개월 동안 다이어트를 진행해 무려 42kg을 감량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재판장석의 나와 피고인석의 여러분 중 누가 죄인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이 능력이 부족해서 여러분을 죄인이라 단언하는 것이니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54년 전인 1961년 10월 '경주호 납북 미수 사건' 재판장 김홍섭 부장판사는 피고인 3명에게 사형을 선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고는 머리를 숙인 채 한동안 묵념했다. 피고인들도 고개를 떨구고 눈물을 흘렸다. 이를 지켜본 고(故) 박찬일 변호사는 1965년 "많은 법정을 다녔지만 재판장이 목메여 말문이 막히고 피고인들이 숙연히 눈물을 흘리는 광경은 처음이었다"고 했다.

 

16일 서울 법원 종합청사에서 '사도(使徒) 법관' 김홍섭(1915~1965) 판사의 50주기 추념식이 열렸다. 그는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 최대교 전 서울고검장과 함께 '법조 3성(聖)'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추념식에는 양승태 대법원장과 하창우 대한변호사협회장, 이상민 국회 법사위원장 등 법조계 인사 200여명과 김 판사의 부인 김자선 여사, 차남 김계훈 서울시립대 교수가 참석했다. 양 대법원장은 추모사에서 "김 판사의 삶은 반세기가 지난 오늘에도 법관이 가져야 할 태도가 무엇인지 가르침을 주고 있다"고 했다. 참석자들은 그의 삶과 철학을 그린 다큐멘터리를 보고, 추념식장에 전시된 사진들을 살펴봤다. 법원과 유족이 2년간 작업해 펴낸 820쪽 분량의 '법관 김홍섭 자료집'도 공개됐다.

 

1915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난 김 판사는 원평보통학교를 최우수로 졸업했지만, 형편이 어려워 상급 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일본인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며 독학해 1939년 일본 니혼대 법률과에 진학, 1년 만에 조선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 법관이 됐다.

 

김 판사는 검정 고무신에 상·하의는 짝짝이로 다녔다. 점심은 밥과 무짠지만 든 도시락이었다. 그와 일한 서정원 전 대법원 도서실장은 "출장을 가면 기차 이등칸만 타는데, 역무원이 '판사가 이등칸에 탈 리 없다'며 다른 사람 놔두고 김 판사만 표 검사를 했다"고 했다.

 

16일 서울 법원 종합청사에서 열린 김홍섭 판사 50주기 추념식에 참가한 인사들이 국기 배례를 하고 있다. 오른쪽부터 양승태 대법원장, 고영한 대법관, 조희대 대법관, 권순일 대법관, 김홍섭 판사의 부인 김자선 여사, 차남 김계훈 서울시립대 교수, 심상철 서울고법원장, 조용구 사법연수원장. /장련성 객원기자

김 판사는 늘 '어떻게 사람이 사람을 재판하고, 죽음의 죄를 논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고 한다. 6·25전쟁통에 쌀 배급을 몰래 더 타간 여인을 재판하게 된 그가 지인에게 "나도 배고파서 배급을 좀 더 타 먹었는데 같은 죄인끼리 어떻게 재판하느냐"고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피고인과 검사의 사정을 두루 살핀 덕에 그의 재판에 불복해 항소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에겐 '사도 법관' 말고도 '사형수의 아버지' '법복 입은 성직자' 등의 별명이 따라다닌다. 사형수들을 찾아다니며 "진정하게 참회하라"고 설득하고, 박봉을 쪼개 책을 선물하거나 가족을 챙겼기 때문이다. 그가 사형수와 주고받은 편지는 남아 있는 것만 200통이 넘는다.

 

김 판사는 1964년 3월 서울고법원장으로 옮긴 직후 간암 진단을 받았지만 끝까지 법원을 떠나지 않았다. 1965년 1월 1일자 조선일보에는 '사람이란 날개가 없었다'는 제목의 짧은 글이 실렸다. 그가 남긴 마지막 기고문이다. '꿈을 이루어보려는 希望(희망)을 간직해 본 적이 있었고, 희망을 따라 꿈에 애태워 했던 한때가 있었소. 그러나 이루어질 수 있는 꿈이 진정 꿈일 수 없고 잡히고야 말 標的(표적)이 어엿한 표적일 수도 없을지라, 이제는 한 걸음 또 한 걸음 오직 평상심으로서 발 앞을 살펴 失足(실족)의 禍(화)를 조심하고자 할 따름이요. 나는 날개가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아 안 것 같소.' 2개월 뒤 그는 가족에게 "행복한 삶이었다"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15년만에 문여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길'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길'로 유명한 스페인의 '왕의 오솔길'이 폐쇄된지 15년만에 다시 문을 연다.

 

미국 CNN 뉴스가 스페인 일간 티 파이즈를 인용해 스페인 당국이 오는 29일부터 열리는 성주간(홀리 위크) 축제 '세마나 산타'(semana santa)에 앞서 26일부터 엘로코 협곡에 있는 '왕의 오솔길'을 재개방한다고 보도했다.

 

왕의 오솔길은 애초 재개장 이후 3개월 동안 무료로 개방될 예정이었으나, 이를 늘려 총 6개월 동안 개방된다. 이후부터는 통행료가 징수된다.

 

개장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3월 중에는 오후 2시까지 개방되지만, 오는 4월 1일부터 10월 31일까지는 오후 5시까지 연장되고 그후부터는 다시 오후 2시까지 개방된다.

 

왕의 오솔길은 1905년 엘로코 협곡 근처 과달오르세강 협곡의 수력발전소 건설 노동자들이 물자 수송과 이동을 위해 임시로 만들어진 것, 1921년 스페인 알폰소 13세가 댐 건설을 축하하기 위해 이 길을 건너게 되면서 그런 거창한 이름이 붙여졌다.

 

그러나 이후 약 80여년간 보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길'이라는 악명을 얻게 됐다.

 

그런데 이런 악명은 오히려 스릴과 모험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내로라하는 등반객 사이에서는 왕의 오솔길이 반드시 들러야 할 필수 코스처럼 여겨지게 된 것이다.

 

일부러 절벽 위나 콘크리트 패널이 떨어져 나가 녹슨 철골만 남은 위험한 곳만 골라가며 이 길을 건너는 이들이 늘어났고, 지금까지 20명이 넘는 사람이 이 길을 건너다 사망했다. 이런 위험성에 스페인 정부는 무단 침입 시 600유로(약 71만원)라는 벌금을 물게 하며 2000년부터 출입구를 폐쇄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일부 등반객이 이 길을 방문하는 일이 끊이지 않자 스페인 당국은 이를 정비한 뒤 덜 위험하게 만들어 관광 상품화하기로 한 것이다.

 

현지 일간 티 파이즈에 따르면 왕의 오솔길을 정비하는 데 지금까지 550만 유로(65억 6700만 원)의 거액이 들어갔다.

 

한편 왕의 오솔길 전체 길이는 약7.7km이며 이 중 2.9km가 나무 패널로만 되어 있다

일은 공자가 사람을 살피는 가장 중요한 실마리다. '

 

논어' 학이편에서 공자는 "일을 할 때는 민첩하게 하고 말은 신중하게 해야 한다[敏於事而愼於言]"고 말한다.

 

또 이인편에서는 "말은 어눌하려고 애쓰고 행동은 민첩해야 한다[欲訥於言而敏於行]"고 말한다. 일은 곧 행동이다. 둘 다 민첩함[敏]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민첩함이라고 해서 그냥 잽싸다는 뜻이 아니다. 일에 임하는 태도와 관련해 공자는 학이편에서 경사(敬事)라고 했다. 기존 번역서들은 이를 '일을 공경하라'는 식으로 번역하는데 이렇게 해서는 그 말의 본 뜻을 알 길이 없다.

 

오히려 '매사에 임할 때 조심하고 삼가는 태도로 임하라'고 해야 그나마 본 뜻에 가깝다.

 

반드시 일에 임하여서는 두려워 하고[臨事而懼] 치밀한 전략과 전술 세우기를 즐겨 하여 일을 성공으로 이끄는[好謀而成者] 사람(안회)과 함께할 것이다."

 

일에 임해 두려워 하는 것이 바로 경사(敬事)이고, 치밀한 전략과 전술 세우기를 즐겨 하여 일을 성공으로 이끄는 것[好謀而成者]이 바로 민첩함[敏]이다.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일에 임해 두려워 한다는 것은 일을 두려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이 혹시라도 실패할까봐 두려워 하여 만반의 태세를 갖춘다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 자체의 성격을 잘 알아야 한다. 그 결정적인 실마리는 '대학'에 나온다.

 

"모든 일에는 근본과 곁가지가 있고 모든 일에는 끝과 시작이 있다[物有本末 事有終始].

 

진덕수는 '대학연의'에서 물(物)은 곧 사(事)라고 말한다. 즉 국내 번역서들이 모호하게 옮겨 놓듯이 사물이나 물건이 아니라 일[物=事], 즉 사람의 일로 보고서 인재를 보는 법[辨人才]으로 풀었다는 뜻이다. 결국 일[物=事]은 사람의 일, 즉 인사(人事)인 것이다.

 

다시 '대학'이다. 일에는 근본과 곁가지, 즉 중히 여겨야 할 것과 가벼이 여겨도 되는 것[重輕=輕重]이 있기 때문에 이것부터 가려야 한다.

 

그리고 모든 일에는 끝과 시작이 있다. 그래서 '대학'은 먼저 해야 할 것과 뒤에 해야 할 것을 알아야 한다[知所先後]고 말한다. 이런 사람은 일을 민첩하게 처리할 수밖에 없다. 말도 신중하게 할 것이다.

 

그래서 민어사이신어언(敏於事而愼於言), 욕눌어언이민어행(欲訥於言而敏於行), 경사(敬事), 임사이구(臨事而懼), 호모이성자(好謀而成者), 물유본말(物有本末), 사유종시(事有終始), 지소선후(知所先後)는 사람을 살피는 핵심 개념이 된다.


창의적인 일에 오랜 시간 투신한 친구와 만나 대포 한잔 한 적이 있습니다. 이런저런 한담이 오가다가 요즘 배우는 재미에 빠졌다고 합니다. 이에 제가 좀 자극 적으로 반응했습니다. “넌 앞으로도 창의적이기 어려울 것 같다. 배우는 일이 아름다운 일이기는 하지만, 배우다가 보통은 자기 길을 잃어버린다. 지금 너처럼 좋은 경력을 가진 사람이 아직도 배우는 일이 재밌어진다면 어쩌란 말이냐?”

저의 이런 반응에 의문을 품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배우는 건 좋은 일 아닙니까? 평생 배움의 고삐를 늦춰선 안 되겠지요?” 하면서요. 그런데 저는 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단계에서는 배움의 고삐를 늦춰야 할 때도 있지 않겠어요? 배움이 습관이 되어 버리면 평생을 배우다 세월을 다 보내버립니다. 다른 사람의 생각만 배우다가 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보통은 이러지 않나요?

우리가 배우는 목적은 언젠가는 자신을 표현하기 위함입니다. 배움은 수단이고,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목적인 것이죠. 삶은 자기표현의 과정이어야 합니다. 수동적으로 배우는 것이 습관이 되다 보면 이 표현 능력이 사라지기 쉽습니다. 그러니 무언가를 배울 때는 항상 머릿속에 ‘내가 배우는 목적은 나를 표현하기 위해서다’라는 생각을 담고 있어야 합니다.

세계 어느 민족이 젊은 학생들을 붙들고 “공부 열심히 하라”고 그토록 다그쳐댑니까. 공부에 몰두하다가, 즉 다른 사람의 생각을 따라 배우다가 잘못하면 죽을 때까지 잃지 말아야 할 야수 같은 눈빛이 사라져버릴 수도 있습니다. 남에게 들은 말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자기 눈에서는 원초적인 힘찬 눈빛이 사라집니다. 자신의 주인 자리를 자기가 차지하고 있지 못하고, 배운 내용들이 대신 차지해버릴 때 이런 형형한 눈빛이 사라지는 일이 나타납니다.

공부는 내가 나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 내가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한 수단임을 잊지 말아야 해요. 이 기본적인 자세를 노자는 ‘자율自律’이라 했습니다. 자율이란 내가 나를 조율하는 겁니다. 남에게 들은 말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자신의 길은 잃고 삶은 더욱 불안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공부를 멈추고 생각을 시작해야 하루를 살아도 나답게 살 수 있습니다.


출처 :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 EBS인문학특강 최진석 교수의 노자 강의


 

 

보스턴에서 북서쪽으로 차를 타고 40분 정도 달리면 한적한 도시 콩코드에 도착한다. 이곳에는 월든이란 호수가 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라는 철학자가 1845년부터 2년간 이 호수 북쪽에 기거하면서 '월든'이란 책을 써서 유명해졌다.
그는 손수 집을 짓고 밭을 일궈 자급자족 하며 살았다. 그가 살던 오두막에 가면 푯말이 하나 등장하는데 이렇게 쓰여 있다.

'나는 숲에 간다. 삶의 가장 본질적인 것들만을 대면해 보고 싶기 때문이다.


 

 

“육신은 잠시 걸친 옷일 뿐,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

 

2003년 4월 법정 스님과 최인호 작가가 서울 길상사 요사채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덕조 스님 제공

 

 

“스님께선 어느 책에서나 죽음이 무섭지 않다고 하셨는데 정말 무섭지 않습니까.”(최인호) “죽음은 나무가 자라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거늘, 육신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겨 소유물이 소멸된다는 생각 때문에 편안히 눈을 못 감는 것이지요. 육신은 내가 잠시 걸친 옷일 뿐인걸요.”(법정 스님)

 

다음 달 11일 법정 스님(1932∼2010)의 입적 5주기를 앞두고 고(故) 최인호 작가(1945∼2013)와의 산방 대담을 담은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네’(여백·사진)가 24일 출간됐다. 2003년 4월 길상사 요사채에서 4시간 동안 나눈 대담이다. 책에는 2004년 출간된 ‘대화’(샘터)에 수록된 대담과 산문집 ‘최인호의 인생’에 실렸던 법정 스님 관련 글이 수록됐다.

 

최 작가는 생전 암 투병 중에도 법정 스님의 입적 3주기에 맞춰 2013년 이 책을 출간하려 했지만 소설 작업과 병세 악화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해 9월 세상을 떠났다. 그는 출판사에 스님이 입적한 날(3월 11일)을 전후해 책을 내 달라고 유지를 남겼다. 책 제목과 구성도 작가가 직접 정했다.

 

 

두 사람은 행복, 사랑, 고독, 죽음, 진리, 시대정신 등 11가지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남은 생의 꿈에 대한 이야기가 특히 눈길이 간다.

 

“저는 정면 승부하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다시 태어나도, 지금 이 생에서도 끝까지 창작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고요.”(최인호)

 

“내게도 꿈이 있지요. 얼마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남은 삶을 보다 단순하고 간소하게 살고 싶군요. 그리고 추하지 않게 그 삶을 마감하고 싶습니다.”(법정 스님)

 

두 사람 모두 말을 행동으로 옮겼기에 지금도 깊은 울림을 준다.

 

작가는 서로의 인연도 소개한다. 1980년대 초반 잡지 ‘샘터’에 각자 ‘산방한담(山房閑談)’과 연작소설 ‘가족’을 연재하던 두 사람은 우연히 잡지사에서 마주쳤다. 이런저런 대화가 오가다 법정 스님이 “앞으로 무슨 소설을 쓰겠느냐”고 묻자, 최인호는 “불교에 관한 소설을 쓰고 싶다”고 답했다. 최인호는 “쓰고 싶어 하면 언젠가는 쓰게 되겠지요. 말과 행동이 업이 되어서 결과를 이루게 됩니다”란 스님의 격려를 화두로 가지고 불교소설 ‘길 없는 길’을 완성했다.

 

이들은 첫 만남 이후 30년 가까이 열 번 남짓 만나면서 서로 격려하고 응원했다. 최인호는 “법정 스님과의 인연은 전생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숙세(宿世)의 것임을 깨달았다. 법정 스님과 나는 둘이 아니다.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다. 우리는 하나다”라고 썼다.

 

 

 

뛰자. ㅋㅋㅋㅋ

 

 

 

 

 

점프. 악악악악ㅎㅎㅎㅎ

 

 

 

 

 

여기에 이런 곳이 있었네

1년차엔 ‘선거 불복’ 논란, 2년차엔 세월호 거짓 눈물

갈수록 최악인 총리 후보, 남은 임기 아득하기만 합니다

 

 

하는 일마다 왜 이렇게 고약합니까. 국민을 힘들게 하는 겁니까. 일주일 지나면 집권 3년차가 시작되는데, 앞으로 남은 당신의 임기가 아득하기만 합니다.

이완구 의원을 국무총리로 지명하고 인준 투표가 이뤄지기까지 벌어진 난장판을 돌아보십시요. 먼저 정치권이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그나마 생산적 경쟁의 원칙과 화합의 분위기가 자리잡아 가던 중이었습니다. 새누리당은 여권 전체가 파국으로 내몰릴 것을 우려해 울며 겨자 먹기로 인준 투표를 밀어붙였습니다. 거부할 수도 수용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 야당은 고심참담한 처지였습니다. 이래서야 야당이 국정에 생산적으로 협조할 수 있겠습니까?

다음은 이 나라를 망국으로 빠뜨려온 지역감정이란 괴물을 불러냈습니다. 그것도 비교적 중립적이었던 충청 사람들에게 불을 질렀습니다. 눈도 귀도 먼 충청권은 호남을 원망했고, 정부 여당은 이런 분위기를 악용해 호남을 고립시키려 했습니다. 내년이 총선이니 손 안 대고 코 풀려고까지 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충청 출신 새정치민주연합 소속 의원들과 정치인들은 중앙당에 조속한 인준을 재촉했겠습니까.

알다시피 이완구씨는 홍성 출신이라지만, 그곳의 김좌진, 한용운, 김복한, 김종진 선생 등 지조 높은 인사들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어떻게든 국방의 의무를 회피하려 했고, 땅 투기는 물론 절세·탈세를 귀신같이 해왔고, 심지어 친인척을 동원해 대학교수로 임용돼 월급만 받아 챙기고, 언론을 제 수족처럼 부리려 했습니다. 충절을 브랜드로 삼는 이곳의 우국지사가 본다면 개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더 기가 막힌 것은 그런 사람을 지명하고, 지역감정을 부채질하여, 통과시킨 당신의 재주입니다. 대통령이라면 모름지기 국론을 하나로 모으는 데 앞장서야 합니다. 특정 지역의 대통령이 아니라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지역간 분열을 자극해 당파적 목적을 관철하려 했습니다. 그것이 지지율 30%대 대통령이 싸움에서 승률을 높이는 길이라는 걸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러나 그건 대통령이 아니라 조폭이나 할 짓입니다.

이완구씨는 지난해 12월 땅속에 묻힌 지 오래인 ‘대통령 각하’를 당신의 면전에서 세 번이나 언급했습니다. ‘대한민국을 힘들게 이끌어오신 대통령 각하께 박수를~’ ‘대통령 각하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당시는 정홍원 국무총리 후임자들이 거명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로서는 당신의 심장에 남을 최고의 아부를 날린 셈이고, 당신은 그런 이씨의 모습이 흐뭇했던가 봅니다.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당신의 충성스런 새누리당은 그의 인준을 관철시켰습니다.

지금은 아무도 당신을 흔쾌히 지지하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런 처지에서 입속의 혀처럼 굴 사람을 수하에 두려는 당신의 심정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전두환씨의 이 한마디만큼은 기억해야 합니다. “눈물 많은 놈 믿지 말라.” 재임 시절 동기동창이면서도 그 앞에서 각하, 각하 하며 온갖 비굴을 다 떨던 노태우씨를 두고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는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뒤 전씨 앞에서 감사의 눈물을 철철 흘렸습니다. 노씨는 대통령이 되자 그를 청문회에 세우고, 백담사로 보냈습니다.

눈물 연기에선 이완구씨도 빠지지 않습니다. 지난해 10월 안산 합동분향소를 찾은 그는 유족들 앞에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그러나 그 뒤 그가 한 일은 ‘세월호 특별법’이 유족들의 뜻대로 제정되는 걸 방해하는 것이었습니다. 진상조사위에 수사권·기소권을 줄 수 없다, 특검 추천권도 줄 수 없다는 그의 의견은 결국 관철됐습니다. 그리고 여당 쪽 진상조사위원회 위원으로 그동안 세월호 참사를 왜곡했던 인물들을 선임했습니다.

당신도 눈물 연기를 해봐서 알 겁니다. 눈물 잘 흘리는 탤런트는 상황만 바뀌면 언제든 해죽해죽 웃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언제든 배반하고 만다는 게 전씨가 제 삶에서 얻은 교훈입니다.

이 총리 후보자의 인준이 끝났으니 곧 당신의 집권 3년차를 함께할 진용이 꾸려지겠죠. 김기춘 비서실장도 짐을 다 쌌다고 하니, 내각과 청와대의 컨트롤타워가 새롭게 바뀌는 셈입니다. 그러나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섭니다. 문고리 3인방과 상시들은 건재하고, 문지방에 머리 박고 ‘황공무지’만을 읊조릴 총리가 들어섰으니 어찌 내용이 바뀔 수 있겠습니까. 비서실과 총리의 충성 경쟁이 오히려 가관일 것 같습니다.

김장수 주중대사 임명은 기대를 일찌감치 접게 한 또다른 이유입니다. 웬만하면 이완구 총리 지명으로 말미암은 난장판에 대해 속죄하는 차원에서 은인자중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중은커녕 당신은 소란을 틈타 김씨를 주중대사에 임명했습니다. 그는 외교의 문외한입니다. 게다가 그는 꼿꼿 장수가 아니라 뺑소니 장수였습니다. 세월호 참사 때는 ‘청와대는 컨트롤타워가 아니’라는 말로 책임을 회피했고,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파동 때는 그 내용을 잘 알고 있는 처지이지만, 진실이 왜곡되어 유포되는 걸 침묵으로 방관했습니다. 군사정부 시절 군 장성 출신을 즐겨 전권대사로 임명하던 독재자들의 습관이 아니라면 쉽게 할 수 없는 인사입니다.

하도 많이 되풀이되다 보니 이런 생각마저 듭니다. 국민들이 놀라 자빠지는 모습을 즐기는 건 아닐까? 중국의 서주를 망하게 한 건 포사와 그의 미색에 빠진 유왕이었습니다. 유왕은 포사가 웃는 걸 보려고 외적의 침략이 없는데도 시도 때도 없이 봉화를 올려 제후들이 군대를 끌고 장안으로 오도록 했습니다. 어이없이 돌아가는 병력을 볼 때마다 포사는 웃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견융이 침략했고, 유왕은 봉화를 올렸지만 아무도 지원병을 끌고 오지 않아, 나라는 망하고 유왕은 참수를 당했습니다.

2년 동안 당신은 총리로 다섯명이나 지명했습니다. 이 가운데 김용준, 안대희, 문창극씨 3명은 낙마했습니다. 인준됐다고 하여 적절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특히 부적격의 정도는 뒤로 갈수록 높아졌습니다. 이번이 최악이었습니다. 병역, 재산 형성, 탈루 탈세, 부동산 투기, 삼청교육대 인권유린, 교수 임용 의혹, 그리고 언론 협박 등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이뤄진 편법 탈법 불법 의혹, 부도덕한 처신과 부적절한 자질은 산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꼭 그렇게 해야 합니까? 그래야 직성이 풀리겠습니까? 집권 1년차엔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불복’ 논란으로 대통령선거 부정 문제를 덮고 넘어갔습니다. 2년차엔 거짓 눈물로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피했습니다. 그럼 3년차엔? 국민이 피해갈 만큼 지저분한 자들을 앞세워 국민과의 불통을 강화하겠다는 겁니까?

 

오직 우리 자신만이 스스로를 구원 할 수 있다

7일·7대륙·7회 '지옥의 마라톤'…인간의 한계에 '도전'

한 선수가 일주일간, 일곱 대륙를 돌며 일곱번의 마라톤 풀코스를 뛰는 대회 
12명의 참가자가 출발한 이곳은 남극.
42.195m의 마라톤 풀코스를 마치자 쉴 틈도 없이 바로 이동
이번엔 바다 건너 남미의 칠레
남극에서 남미 칠레를 거쳐 북미의 미국을 찍고, 유럽 스페인과 아프리카 모로코에 들렀다 
아시아 아랍에미리트로, 그리고 마지막엔 호주 시드니까지.

 총 이동거리만 3만8천km.
이들이 잠을 자거나 쉴 수 있는 곳은 비행기 기내 뿐. 
식사도 기내식으로 제한
.영하 20도의 남극에서 영상 25도의 호주까지, 발가락은 동상에 걸리고 아킬레스건이 망가지는 등의 고통
.7번의 풀코스를 합친 295km를 25시간 36분 3초에 완주, 지옥의 레이스 우승자 기록
 대단한 모험이다
 단순한 경주가 아니라 모험
참가비 4천만원을 내고 고통의 레이스에 뛰어들어 완주한 12명의 참가자들, 인간의 한계에 도전한 그들 모두가 우승자이다

이들은 위대한 사람들이다

[정민의 世說新語] 은산철벽 (銀山鐵壁)

 

은산(銀山)은 중국 베이징시 창핑구(昌平區)에 위치한 산 이름이다. 봉우리가 워낙 높고 험준한 데다 겨울이면 흰 눈에 늘 덮여 있어 이 이름을 얻었다. 기슭은 온통 검은 석벽으로 둘러싸여 이를 철벽이라 부른다. 그래서 은산철벽은 사람의 의지가 굳고 기상이 높아 범접할 수 없음을 비유하는 말로 많이 쓴다.

 

권상하(權尙夏·1641~1721)가 정황(丁)의 신도비명에서 "대개 공은 실지 공부가 이미 깊어 대의를 환히 보았다. 이 때문에 변고를 만나서도 지조를 잃지 않았다. 비록 옛날에 이른바 은산철벽이라 한들 어찌 이에서 더하겠는가?"라고 썼다. 명(銘)에서도 "절해에 유배되어 죽음 앞에 더욱 굳세. 곤륜산에 불이 나도 안 타는 건 옥뿐일세(流移絶海, 九死確. 火炎崑岡, 不燼唯玉)"라고 기렸다.

 

 

월봉 무주(月峯 無住·1623~?) 스님의 '시혜사(示慧師)'란 시는 이렇다. "푸른 바다 깊이 재기 무에 어렵고, 수미산 높다 한들 못 오르리오. 조주 스님 '무(無)' 자 화두 이것만큼은, 철벽에다 더하여 은산이로다(滄海何難測, 須彌豈不攀. 趙州無字話, 鐵壁又銀山)." 깊은 바다도 닷줄로 잴 수 있고 수미산도 작정하면 못 오를 리 없다. 하지만 조주 스님의 무(無) 자 화두만큼은 눈앞이 캄캄해 어찌해볼 수가 없다. 시는 자신이 날마다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지만 이 화두 하나를 들고 중노릇의 끝장을 보려 한다는 얘기다.

 

은으로 깎은 산, 무쇠 절벽은 기대고 비빌 언덕조차 없는 난공불락이다. 선가(禪家)에서는 화두를 들 때 마치 은산철벽 앞에 마주 선 것처럼 어찌해볼 수 없는 극단의 경계까지 자신을 밀어붙여 활구(活句)로 이를 타파해야 화두가 비로소 열린다고 본다. 은산철벽을 유가에서는 지향해야 할 대상으로 본 데 반해 선가에서는 깨달음으로 가는 길에 반드시 넘어야 할 장벽으로 본 것이 다르다.

 

기필코 넘지 않으면 안 되는 은산철벽은 누구에게나 있다.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한 걸음 더 내딛는 불퇴전(不退轉)의 정신만이 끝내 우리를 붙들어준다. 스스로 은산철벽으로 우뚝 설 때까지 물러서면 안 된다.


 

 

다음달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는 이준구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가 20일 서울대 사회과학대 교수연구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인터뷰] 내달 정년퇴임하는 이준구 경제학 교수
“세금 더 걷더라도 자원외교같은 해괴한데 말고 보육에 쓰자”
‘좌빨’ 이준구라는 수식어가 붙을 정도로 진보적인 발언과 사회경제 이슈에 대한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아온 경제학자 이준구 교수(서울대 경제학부·65)가 34년간 몸담았던 대학강단을 떠난다. 다음달 정년퇴임을 앞두고 <한겨레>가 20일 서울대 연구실에서 이 교수를 만났다. 국내 대표적인 경제학자로, 자신의 블로그(http://jkl123.com/)에 사회경제 이슈에 대한 소신발언을 가끔씩 올리고 있고 블로그 글마다 1만 조회수를 넘을 정도로 ‘파워블로거’로 이름을 떨치고 있기도 하다.

△우리 시대 지식인의 책무 △젊은이들의 고뇌 △사회경제적 이슈 진단 및 한국경제가 당면한 과제 △한국 경제학자의 보수적 편향 등을 주제로 1시간 30분동안 이뤄진 인터뷰에서 이 교수는 “우리 사회와 경제에 (글)쓸 일이 너무나 많아져 현실에 적극 개입하게 됐다”며 “(신자유주의 사회경제정책을 주창하고 확산시켜온) 직업으로서의 한국 경제학자들의 극단적인 보수 편향은 지금도 풀리지 않은 의문이자 기이한 현상”이라고 토로했다. 평생동안 정치 및 권력과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아오며 전공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고 수많은 제자를 길러온 노교수는 뜻밖에도(?) ‘민주주의자 김근태 선배의 추억’을 떠올리며 “젊은날 시국문제에 비겁하게 물러서 있었던 내 자신에 대한 죄책감과 부채감이 늘 있었는데, 이것이 점차 나이들면서 현실 문제에 적극 개입하게 된 개인적 배경이기도 하다”고 <한겨레>에 처음 털어놓았다.

“재벌 2·3세 경영권 상속
아버지가 금메달 땄다고
자녀를 올림픽대표 뽑는 것

경제학계 보수편향은 의문
분배 공정성 관심 적어
나를 진보 분류 기이한 일

김근태의원 고초겪을 때
데모 안해 죄책감 가져
그래서 5공 시국선언 참여” 


-연구실 문에 내붙인, 불도저를 뒤덮으며 여기저기 피어난 쑥부쟁이 아래로 ‘끈질기게 피어라. 너희가 강의 주인이다’는 글귀가 선명하다. 2010년께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을 비판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현실 문제에 개입하는 발언들을 해왔다. 엠비(MB) 정부의 또다른 ‘31조원 자원외교’를 둘러싼 국회 국정조사를 앞두고 있는데…

=자원확보, 물론 한국경제에서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 어떤 중요한 일도 어떤 방식으로 추진하느냐가 실질적으로 더 중요한데 자원외교는 그 점을 무시했다. 당시 이를 추진했던 사람들은 자원외교가 필요했고, 본래 그 성과는 먼 훗날에나 나온다는 식으로 변명하면서 피해가려한다. 그러나, 먼 훗날에 나올 효과도 중간에 점검해보면 올바르게 투자한 건지 지금 단계에서 판단이 나온다. 실패로 이미 거의 판명되고 있는데, 갑자기 반전되겠는가? 혹시나 원유가격이 1배럴에 5백달러로 뛰면 우리가 옳았다고 말할지 모르겠으나 그걸 대비했다는 건 말도 안된다. 200년 만에 한번 올지 모를 홍수를 대비했다는 4대강 사업도 마찬가지다. 내가 재정학 전공인데 정부 예산과 관련해, 지금 세간에 오르내리는 어린이집 보육교사 아동폭행 사건의 경우, 보육교사의 급여를 올려주는 방식으로 가야 문제를 줄일 수 있다. 어린이집 보육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매우 큰데 적절한 보수를 주는 정규직 보육교사를 늘리면 일자리 창출에도 도움이 되고 이런 지출은 불황 대비책도 되고 경제성장도 견인할 수 있다. 국민들의 복지지출 관련 세금 부담이 조금 늘더라도 걷힌 세금과 정부 예산을, 자원외교나 4대강 등 해괴망측한 데 쓰지 말고 그런 곳에 유용하게 효과적으로 써야 한다.

-일자리 창출 관련해, 최근 청년실업률이 9%로 역대 최악이다. 대기업이 당장의 성과에 매달리면서 경력직 채용만 선호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아무튼 취업난은 우리 시대 젊은이들이 현실적으로 당면하고 있는 고통이자 좌절인데…

=우리 경제가 저성장 기조에 들어가면서 이제 고용창출이 활발하게 일어나기 어렵고, 기업이 신규투자해도 인력투입을 최소화하는 생산방식으로 가고 있어서 근본적으로 ‘고용없는 성장’에 직면하고 있다. 청년실업 대책 중 하나로 정부가 (창조경제 관련해) 벤처 육성에 나서고 있는데 창업을 북돋는다고 해결될 성격이 아니다. 그런 정보기술 중심의 벤처기업들은 일반적으로 창조적인 몇 사람 중심으로 운영되는 것이지 일반 직원을 대규모로 고용하는 기업이 아니다. 고용창출 효과가 큰 중소기업을 더 확장하고 키우는 정책이 필요하다.

-이른바 “연말정산 세금폭탄”을 둘러싼 월급쟁이들의 분통이 지금 터져나오고 있다.

=근본적으로는 정부가 애초에 원천징수를 충분히 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적게 해서 이런 논란이 나오는 듯하다. 월급봉투에서 원천적으로 떼는 세금 징수율을 적게해 처분가능소득이 크다는 인상을 주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아닌가싶다. 이번 논란은 세율을 올려서 문제가 된 게 아니고, 소득공제를 세액공제로 바꾸면서 소득구간에 따라 공제액의 변화가 발생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고소득자와 저소득자의 소득계층간 부담 측면에서 볼때 세액공제로 바꾼 건 올바른 방향이다. 내가 무엇이든 정부 정책을 헐뜯는 사람은 아니다. 직장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지만 근본적으로 정책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다.

-새해 벽두 담배값 인상도 큰 이슈가 되었다. 재정학자로서, 흡연자와 비흡연자, 부유층과 서민, 국가의 재정수입, 국민 건강 등을 고려할 때 최적의 담배값 시장가격은 존재할 수 있는가?

=세계 각국마다 정책적 의도에 따라 담배값이 천자만별이라서 어느 일국에서 적정한 담배값이 얼마인지 도출하는 건 본질적으로 성립하기 어렵다. 금연을 권하는 정부의 의지가 얼마나 결연한지가 관건인데, 재정학에서 담배세는 일종의 ‘죄악세’로 설명하고, 나도 인상에 기본적으로 찬성한다. 죄악세는 세금을 무겁게 물려 사람들이 금연으로 돌아서면 건강 증진이라는 정책목표가 달성되어 좋고, 반대로 흡연자들이 버티고 계속 흡연하면 재정수입이 증대되므로 정부는 그 역시 행복한 세금이다. 그러나 왜 하필 지금 인상인가? ‘증세없는 복지’라는 실현 불가능한 약속을 애초 정부 출범 때부터 했다. 사회복지를 대폭 확충하려면 증세가 불가피한데, 어떤 방식으로 증세할 것인지 놓고 건전한 토론을 거쳐 담배세 인상이 그 답이라고 찾았다면 찬성한다. 그런데 지금은 정부가 (잘못된)약속은 그대로 둔채 체면 유지하고, 세수가 궁색하니 손쉬운 담배세 인상을 선택했다는 의심을 사기에 딱 좋은 상황이다. 배나무 아래서 갓 끈을 고쳐매지 말라했는데 아예 배를 따려고 하는 것이 국민들 눈에 보인 것이다. 서민 생계비만 더 올린다는 부정적 측면만 사람들이 보게 되는 게 당연하다.

-저성장, 수요부진에 따른 디플레이션 우려, 우리 경제의 등뼈인 제조업의 전반적인 수익성 악화 등 한국경제에 경고등이 켜지고 있다. 우리 경제의 성숙단계상 피할 수 없는 추세와 현상들인가?

=우리 경제는 그동안의 고도성장 동력이 소진돼가는 과정에 들어서 있다. 즉 어차피 저성장 기조로 들어가야 할 때가 되었고, 여기에 겹쳐 세계 경제가 모두 저성장 기조로 가고 있기 때문에 어려움이 한층 가중되고 있고 또 불가피하다. 다만 이왕 이렇게 어려울 바에는 주택경기를 띄우는 것같은 단기적 부양으로 가지 말고 장기적으로 체질을 개선하는 경제 견실화 방향으로 가야 한다. 부동산경기는 반짝하고 마는 것일뿐 경제의 성장동력과는 무관하다.

-체질 개선과 견실화를 좀더 설명해달라

=경제에서의 질서, 곧 게임의 규칙을 제대로 확립해야 한다는 얘기다. 경제민주화, 갑의 횡포를 없애는 공정한 룰을 만드는 작업 등이다. 이런 경제 질서 확립이 곧 장기적으로 소득증대가 정말로 필요한 계층에게 소득이 돌아가게 하는 기초가 된다.

-방금 소득분배와 관련해 말했는데, 최근 한국경제가 수출 및 기업주도 성장에서 벗어나 임금 및 소득 또 내수가 이끄는 성장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요구가 많다.

=임금과 소득을 높여 내수를 활성화해야 하는 건 맞다. 다만 기업이 막대한 사내유보금을 끌어안고 있는데, 배당을 더 해주라는 식으로 소득을 늘려주려는 정책은 주식을 많이 가진 부유층과 외국인투자자의 주머니만 더 두둑하게 해주는 일이다. 또 임금을 올려주라는 정책은 대기업 노동자의 보수를 더욱 늘리는 쪽으로 갈 공산이 크고, 중소기업과 자영업자의 소득 증가로 이어지기는 어렵다. 시장 매커니즘에서 힘의 균형이 대기업 쪽에 가 있는데 그 힘을 발휘하지 말고 약자한테 잘해주라는 식으로 경제정책을 펴기도 어려운 점이 있다. 납품단가 후려치기에 정부가 개입해 직접 그 단가를 결정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서 작고한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박사 같은 분들이 필요하다. 삼성과 현대차 등 대기업이 하청업체에 좀더 관대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

-‘땅콩 회항’으로 대표되는 재벌기업 오너와 2·3세의 일탈적 행동이 요즘 빈번하게 나타나고 있다.

=우리 재벌기업 체제가 가족기업 형태인데, 오너가 마치 주인처럼 행세하면서 자기 임직원을 하인 다루듯 하는 문화는 다른 나라에선 보기 힘들다. 또 회삿돈을 개인 가계부마냥 가져다쓰는 기업문화의 미성숙까지 결합되어 대기업의 지배구조가 더 복잡해지고 있다. ‘땅콩 회항’ 사건의 경우 우리는 여론재판으로 징벌하고 말았지만, 내가 그 비행기에 타고 있었다면 도대체 수많은 승객들을 두고 뭐하는 짓이냐고 당장 말했을 것이다. 승객 서비스라는 관점에 보면, 옆에서 고성 지른 조현아 전 부사장은 사무장이나 승무원에게뿐 아니라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비행기가 늦게 출발하게 된 고객들에게 진정으로 사과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똑똑하고 야심만만한 젊은이들이여, 우리 기업에 오라”고 말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상속자본 등 세습자본주의는 우리가 미국보다 현저하다. 미국의 억만장자 중 세습은 10명 중 2~3명인데 한국은 8명 이상이라고 한다. 세습자본에 대한 피케티의 메시지가 서구에 비해 우리 사회에 더 잘 들어맞고 있는 셈이다. 기업의 경영권 대물림은 올림픽 대표팀을 구성할 때 실제로 100m 뛰어보게 한 뒤 선발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는지에 따라 뽑는 거나 다름없다.


-이번 정년퇴임 기념으로 제자들이 펴낸 <꽃보다 제자>라는 문집에 보면 한 후학이 “교육자와 연구자로서 늘 같은 자리를 지키며 외길을 걸으셨다. 한결같다는 것, 얼마나 단순하면서도 어려운 일인가”라고 적고 있다. 한국의 여러 경제학자들이 ‘경세’를 표방하며 대학강단을 벗어나 이런 저런 정치적 조직에 몸담고 활동하는 모습을 흔히 보는데…. 

=나는 남들에 대해 얘기하는 걸 천성적으로 싫어한다. 다만 스스로 그런 정치적 활동의 가능성을 전혀 열어두지 않은 건 내 자신이 그런 일에 전혀 맞지 않고 능력도 없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절감했기 때문이다. 예외적인 소수도 있겠지만, 교수라는 직업군에 속한 대다수는 사람을 다루고 조직을 운영하고 또 집권세력 내부에 들어가 인파이팅(기존 질서에 맞서 개혁을 추진하는)하는 데 능력이 별로 없다. 나는 내 능력을 최대로 발휘할 수 있는 곳은 학교라고 생각해왔다. 내가 외부의 정치적 조직 등에 다른 일자리를 얻었다면 아마도 첫 출근하는 날부터 스스로 후회하게 될 게 뻔하다.(웃음)

-블로그에 최근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에 대한 글을 올렸다. 우리사회의 소득불평등 심화와 분배의 공정성과 관련해 우리 학계에서 ‘직업으로서의 경제학자’의 책임이나 무능, 무관심 등이 그 한 요인이라는 지적도 있다.

=피케티 열풍은 그동안 경제학자들이 분배 문제에 너무 관심을 안 가져온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다. 즉 소득불평등이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자각하는 계기를 제공한 게 열풍의 한 이유다. 내가 몸담고 있는 주류경제학은 분배 문제에 별로 많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아왔다. 분배 공정성은 가치판단의 문제라서 경제과학적 분석의 영역을 벗어나고, 그래서 경제학자들이 다루는데 자신이 없다는 것이다. 미국경제학자들이 그동안 미국사회는 어느 정도 분배 공정성이 이뤄졌다고 인식하고 있었는데, 최근엔 현실경제에서 급격한 분배 악화가 나타나면서 그 생각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중이다. 반면에, 한국 경제학자들은 분배 공정성에 대한 관심이 미국 경제학자보다 훨씬 적다. 시장이냐 국가 개입이냐는 관점의 진보와 보수 스펙트럼에서 미국 경제학자들은 다양하게 분포하는 반면, 한국 경제학자들은 보수 쪽에 거의 쏠려 있다. 왜 그럴까? 이건 나의 오랜 풀리지 않은 의문이다. 한국에서 분배 공정성이 상대적으로 잘 이뤄졌다면, 또 시장이 좀더 완전해 정부개입의 필요성이 적다면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경제와 시장의 여러 상황을 보면 우리 경제학자들이 좀더 진보적인 태도를 취하는 게 자연스러울 듯한데 현실은 그 반대다. 우리 경제학계의 이념적 지형은 참으로 이상하다. 내가 미국에 가면 중도 밖에 안되고 ‘진보’로 불릴 수 없는데, 한국사회에선 나를 진보 경제학자로 부르고 있다. 내게 ‘좌빨’ 칭호가 붙었듯 자기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좌빨로 매도하는 일반적인 경향이 있긴 한데, 경제학자 그룹 속에 가봐도 나는 상당히 진보적인 학자로 분류되고 있다. 기이한 일이다. 미국에서 경제학 박사과정 유학할 때 미국 지도교수는 진보적인 사람이 많은 편인데, 왜 한국에 돌아와서는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는 걸까?

-‘연구’와 관련해 퇴임 이후 구상은?

=두 가지다. 첫째, 1980년대 이후 미국의 신자유주의와 관련해 그동안 내가 써온 논문들을 모아 책으로 펴낼까 한다. 그것이 한국에 미치는 영향 때문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꿈은 마치 한국을 미국의 51번째 주로 만들려 했던 것 아니냐는 착각을 갖게 한다. 영어몰입교육이나 감세정책, 민영화, 노동시장 유연화 등 미국식 신자유주의 정책을 그대로 복사한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미국을 미국 역사상 가장 불평등한 사회경제로 만들었는데, 우리가 이를 성찰 없이 그대로 계속 직수입하면 우리 역시 불평등이 더 심화되는 경제로 치닫게 될 위험성을 경고하려는 게 목적이다. 우리 사회는 이상하게 보수적이다. 이미 실패한 것이 자명한데도 세금 깎아주면 경제가 활성화된다고 막연하게 믿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환상이 여전히 강하다. 미국에서 막대한 재정적자와 불평등 심화라는 부작용만 초래한, 이미 실패한 정책으로 판명된 것인데 우리 경제정책담당자와 경제학자들이 이를 알고서 답습하고 있는 건지 의문이다.

둘째, 과거 노무현 정부의 종합부동산세를 당시에 나 혼자만 두둔했는데, 종합부동산세의 죽음이 아직도 아쉽다. 그런데 부동산 과세의 경제학적 근거를 최근 영국 경제주간 <이코노미스트>지에서 새삼 발견했다. 미국과 유럽 등 서구 경제학자들이 쓴 논문을 보면 부동산 등 재산에 대한 과세가 여러 세목 중에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조세를 평가하는 기준에 효율성과 공평성 이 두 가지가 있다. 조세 부과로 민간부문의 의사결정을 교란시키는, 예컨대 근로소득세를 부과하면 사람들이 일을 적게 하게 되고 이자소득세를 높이면 저축을 적게 하는 것인데, 부동산 과세는 그런 초과부담이 상대적으로 적다. 이 세금을 피할 수 있는 별다른 옵션이 없기 때문이다. 즉 부동산은 이동성이 없어서 다른 나라로 옮기거나 튀어 피해갈 수 없다. 부동산 과세는 경제의 효율성도 높이고 성장에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내가 뒤늦게 발견한 셈이다. 재산분포가 소득분포보다 훨씬 편중돼 있기 때문에 공평성도 달성된다. 이런 논문들을 모아 책으로 소개해보려한다.

-사실 30만권 이상 팔린 <미시경제학> 교과서의 저자인 ‘이준구 교수’가 왜, 어떤 이유로 현실에 적극 개입하는 발언을 쏟아내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젊은 시절에 우리 사회의 이슈들에 대한 생각은 늘 하고 있었지만 강단에서든 글로든 표현하는 건 내 스스로 극도로 삼갔다. 그런데 나이가 점차 들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사회에서 고쳐야할 점이 있다면 지식인이 이를 지적하고 문제 있다고 얘기하지 않으면 개선되기 어렵다고 느꼈다. 자기가 배운 바를 사회에 투영해 문제점이든 올바른 방향이든 지적하고 말하는 게 지식인의 큰 책무라고 자각하기 시작한 셈이다.

또 한 가지, 솔직히 말하자면 노무현 정부 후반기에 우리 사회에 신자유주의 열풍이 불어닥치면서 노무현 정부가 억울하게 매를 맞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누구도 용기를 내 노무현 정부를 두둔하지 않고 있었다. ‘3불 교육정책’이나 종합부동산세 등 당시 정부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는 대목들이 분명히 있었음에도 보수 언론과 보수적 지식인으로부터 공격받고 몰매를 맞았다. 그때 나와 같은, 정부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이 나서 발언하는 게 효과가 있을 듯해보였다. 당시 경제성장률이 4%대로 떨어진 것에 대한 비난 여론이 비등했는데 그건 단지 착시 현상일뿐 당시 경제 상태로 보면 그 정도는 견실한 성장률이라고 내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이명박 정부 들어 부자감세와 4대강 사업 등이 터져나오면서 ‘(글)쓸 일이 너무나 많아져’ 현실 문제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된 것이다.(이 교수는 현실 이슈에 개입하더라도 블로그 등을 통한 활자 글을 매개로 주로 발언할뿐 인터뷰 같은 ‘말’을 중간 매체로 삼는 건 가급적 피하는 편이다.)

여기에 더해 한 가지 덧붙일 게 있다. 내가 2013년에 블로그에 ‘김근태 선배님의 추억’이란 글을 쓴 적 있다. 돌아가신 민주주의자 김근태 의원이 민주화를 위해 숱한 고초를 겪었는데 나는 그 시절에 데모에 한번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상대적으로 안락한 생활을 해온 죄책감이 있다. 사실 전두환 정권 말기에 개헌을 요구하는 교수 시국선언에 내가 서명해 참여했다. 당시 서울대 교수 1천여명 중 참여자가 40여명 밖에 안될 정도로 서슬퍼런 군부정권 시절이었다. 용기가 있어서가 아니다. 과거 학생시절 나의 모습에 대한 속죄의 심정으로, (당시에)지금이라도 참여하지 않으면 비겁하게 살았다고 두고두고 후회할 것같아서였다. 현실개입 발언들을 하고 있는 지금의 나의 행동은 이런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대학과 입시, 우리 시대의 젊은이에 대한 얘기를 들어보면서 인터뷰를 마칠까 한다.

=현행 대학 입시제도는 서울대를 포함해 어느 대학에서든, 입학사정관제를 중심으로 볼 때 누가 붙고 떨어질지 불확실성이 크고 또 어떤 과정을 통해 누가 합격하게 되는지 다소 불투명한 소지가 분명히 있다. 이에 대한 심도있는 반성이 한번도 이뤄진 적이 없는데, 입시제도를 선도하고 있는 서울대 내부를 포함해서 충분하고 깊은 토론이 이뤄져야 한다. 입학사정관제가 과연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개인적 주관에 의해 판단되고 있을 소지도 배제하기 어렵다.

-이 교수의 블로그에 들어가보면 “교수 생활의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로 수많은 제자들과 따뜻한 마음을 주고 받을 수 있다는 점”이라고 쓰고 있다. 학점, 행복한 삶, 진로 등을 놓고 고민하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제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10여편을 써 올려두고 있다. 노교수로서 한마디 해주신다면?

=은퇴를 맞아 대학생들에게 따로 해주고 싶은 말을 정리하자면, 요즘 학생들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매우 큰데 “불안해하지 말고 용기를 가지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 삶은 누구나 불확실성의 연속이다. 처음에 좋은 직장에서 출발했어도 앞으로의 삶은 불확실하다. 그것이 어차피 삶의 본질이다. 요즘 세대는 우리 세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곱게 자라서 역경에 대한 두려움이 큰데 너무 불안해할 필요 없다. 다만 일반적인 인생지침서는 말하거나 쓰고 싶지 않다. 그런 책은 옳은 말들이긴 하나 실천에 옮기기 어려운 것이라서 다 읽고나면 허탈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제자들에게 욕심을 버리라거나 햇볕 좋은날 산보를 하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햇볕요법도 곧잘 해주고 있다. 마음을 조금만 더 비우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면 그만큼 편해진다. 많은 일에서 오히려 루틴한 버릇같은 것을 만들어놓으면, 또 선택의 여지없이 그냥 정해진대로 살면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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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날땐 말없이”…기념논문집·고별강연 사양

34년간 꼿꼿한 학자의 길 걸어

이준구 교수는 한마디로 흔치 않은 지식인이다. 어느 정도 이름을 얻은 한국의 경제학자라면 흔히 맡는 대기업의 사외이사를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 “제안을 받아본 적도 없다”고 한다. 옛 경부고속철도평가위원 같은 일회적인 참가를 빼고는 1984년 서울대 교수로 부임한 뒤 정부의 이런저런 위원회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서울대에서 연구진실성위원회 위원장을 한 것을 빼면 행정조직의 보직 자리에 가서 일해본 일도 없다. 정치와 무관한 삶을 살면서 명리에 물들지 않고 한결같이 살아온 34년 지식인의 역정 그 자체가 곧 우리 사회 지식인의 표상인 듯 보인다. “떠날 때는 말없이 가야 한다”며 정년퇴임 기념논문집 발간도 고별강연도 마다했다. 대신 제자 27명이 애틋한 추억을 담아 쓴 <꽃보다 제자>라는 자그마한 문집 하나와 자신이 틈틈이 찍어온 서울대 교정의 사계 사진들을 넣은 달력 하나만 남겼다.

“학문에는 은퇴가 없다”는 말을 몸소 일깨우려는 것일까. 퇴임 뒤에도 강의실에 수백명이 듣는 초급 ‘경제원론’ 강의를 5년간 더 하고, “30만권 플러스 알파”가 팔렸을 정도로 “25년간 베스트셀러로 자리잡아 자부심이 있다”는 <미시경제학>을 비롯해 <재정학> 등 교과서(현재 4~6판)를 끊임없이 수정·보완하는 작업을 할 예정이다. 수강생이 많아 채점하기 벅차다는 이유 등으로 흔히 대학에서 시간강사에게 맡기는 과목이 초급 ‘경제원론’인데 노교수는 지난 마지막 학기까지도 ‘경제원론’ 강의를 맡았다. “경제학에 입문하는 학생들을 지도한다는 점에서 원론은 매우 중요한 과목이고, 또 폭넓은 이해와 원숙한 이해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이 가르치는 게 맞아요. 내가 그렇다는 말은 아니지만….” 이날 인터뷰를 마치고 점심식사를 하러 간 대학 구내식당에서 노교수는 학생들과 뒤섞인 채 긴 밥줄에 서 차례로 배식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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