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영모가 지적한 인간 속에 들어있는 수성(獸性)인 삼독은 다음과 같다.

 

탐은 탐욕(貪慾)을, 진은 진에(瞋恚, 성냄)를, 치는 치정(癡情)을 의미한다.

 

이 세 가지 수성을 끊어내면 성인(聖人)의 반열에 오른다는 것이다.

욕심을 부리지 않고 화도 내지 않고 질투나 음욕을 가지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탐-진-치의 삼독을 끊어야 동물이 아닌 참인간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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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에는 시작과 끝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실망해선 안 된다

 

인내하며 정진하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쭉 과정이 있을뿐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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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긍정은 강한 부정과 일맥상통하다고 했다

나 또한 익히 그러할진대 누굴 지적질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자신들만 세상살이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이기심에서 벗어나길바란다.

더 깊은 침묵의 무덤으로 빠지지않도록 자신을 돌봐주기바란다

 

 

 

 

 

 

 

칙칙해지지 말자.

미소를 지어보자.

크게 소리 내어 웃어보자.

먹고, 마시고 흥겨워해라.

순간에 충실해라.

삶은 계속된다.

이보다 더 나쁠 수도 있다.

그렇다고 별 수 있나?

여기, 우리는 이렇게 살아있다.

-노라 에프런, 내 인생은 로맨틱 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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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철 세계경영연구원 회장 선진국은 두 가지로 만들어진다.

하나는 풍요함이고, 다른 하나는 건강함이다.

 이 중에서 더 어렵고 중요한 것은 건강함이다.

건강한 사회란 보편적 진리에 입각한 상식과 원칙이 지배하는 사회를 말한다.

쿠웨이트나 사우디아라비아가 거대한 풍요에도 선진국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건강한 사회를 구축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건강함이 기반이 되지 않은 풍요는 오래가지 못한다.

 나치 독일·소련·일본제국·아르헨티나가 그랬다.

우리 사회는 지난 50여 년간 풍요함과 건강함을 동시에 추구해왔다.

그리고 많은 면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민주화를 이루었고 부패를 나름대로 줄이면서 괄목할 만한 풍요도 얻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풍요함에 비해 아직도 너무나 건강하지 않다는 점이다.

한 사회의 건강성은 공공 부문의 윤리성·사명의식·기율·능률성 등으로 측정한다.

어느 사회나 민간 부문에는 부패·타락·나태·비효율 등이 어느 정도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비건강성을 교정하고 그로부터 오는 피해를 예방하고 치유하는 것이 공공 부문의 몫이다.

미국이 마약·폭력 등 민간 부문의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선진국으로 간주되는 것은 공공부문이 건강한 편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나라를 지키는 군(軍)·관(官)·검(檢)·경(警)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대형 사고가 터지고 있다.

 세월호 참사가 대표적이다. 단순 사고로 끝날 수 있었던 것을 참사로 만든 것은 공공 부문이었다.

군은 엉터리 무기와 부품을 예사로 납품받는 부패 덩어리로 전락했다.

사단장이 사무실에서 부하를 성추행하고, 젊은 장병들이 걸핏하면 맞아 죽거나 자살한다.

최고위 검찰 간부가 불륜과 음란을 자행할 뿐 아니라 새빨간 거짓말을 눈 하나 까닥하지 않고 한다.

정치인은 패싸움하느라 정신이 없을 뿐 아니라 여전히 썩어 있다.

공무원들은 현직에서는 물론 물러나서도 관피아로 군림하면서 자기 배 채우기에 바쁘다.

이렇게 공공 부문의 실패가 한꺼번에 터져나오는 것은 우리 공공 부문 전체에 만연되어 있는 질병이 여기저기서 삐져나오는 현상이다.

그것은 사명의식의 결여, 윤리의식의 실종, 기강 해이가 복합적으로 배태한 도덕적 붕괴라는 질병이다.

우리 공공 부문이 추락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최근 몇몇 정권이 건강함보다 풍요함에 너무 집착했기 때문이다.

 민간 부문의 성공이 가져온 풍요함에 도취해서 사회적 건강의 중요성을 간과해 버렸던 것이다.

우리가 열심히 만들고 수출하면 저절로 선진국으로 승격될 것이라는 착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세월호 참사 등은 사회적 건강성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너무나 잔인한 방법으로 일깨워 주었다.

그래서 대통령을 포함한 모두가 건강성을 향한 국가 개조를 해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하지만 6개월도 지나지 않아 국가 개조에 대한 이야기는 사라져 버렸다.

요즘 들리는 이야기는 온통 경제 회복뿐이다.

이대로는 안 된다.

건강성을 잃은 풍요는 절대로 오래 지속될 수 없다.

풍요한 사회 못지않게 건강한 사회도 국가의 우선순위가 되어야 한다.

 경제 회복과 국가 개조가 함께 강조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지금 누리는 정도의 풍요나마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전성철 세계경영연구원 회장

 기형도, 살림, 1990“가을의 저녁은 너무 빈곤하다…
가을은 약탈자”(87쪽)라던 기형도의 단상이 해질 녘 집을 나서는 나를 위로한다. 


기형도(1960~1989). 그는 스물두 살에 백혈병에 걸렸고 그로부터 7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29년의 삶. 이 책은 그가 사망한 지 일 년 만에 고인이 쓴 여행기, 일기, 편지, 단상, 소설, 서평, 기사를 묶은 책이다. 
김현이 제목을 정한 유고 시집 <입속의 검은 잎>과 전집은 지금도 꾸준히 읽히고 있지만 이 책은 24년 전 ‘고전’이다.
내게 ‘희망’의 이미지는 상술, 무임승차, 불신이 느껴지는 위로, 네온사인 십자가 등이다. 
문자 자체로도 희망(希望)은 좋은 의미가 아니다. 
기형도는 간단히 썼다. “희망이란 말 그대로 욕망에 대한 그리움 아닌가. 나는 모든 것이 권태롭다… 
도대체 무엇이 더 남아있단 말인가… 
시는 어쨌든 욕망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지금 욕망이 사라졌다… 추악하고 덧없는 생존이다…”(19~21쪽) 3쪽을 내 맘대로 짜깁기한 것이니, 그의 생각을 왜곡한 것일 수도 있다.그는 희망을 부숴야 뭔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의 여행기는 “희망에 지칠 때까지 지치고 지쳐서 돌아오리라”였다. 흔히 회자되는 루쉰의 말도 희망에 대한 긍정이 아니다. “땅 위에 길이 없는 것”처럼 원래 희망도 없다는 얘기다. 많은 사람이 걸어 다니면 길이 만들어진다는 실행의 고단함을 강조한 말이다.희망은 삶에 대한 특정한 사고방식을 집약한다. 미래 지향, 긍정, 바람… 사람들은 이 말을 편애한다. 희망이 있어야만 살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오히려 표현 그대로 생각하면 절망(切望)이 희망적이다. 절망은 바라는 것을 끊은 상태, 희망은 뭔가 바라는 상태. 무엇이 더 ‘희망적’인가?상처와 좌절은 객관적이지 않다. 기대에서 온다. 무엇인가를 바라는 상태. 소망, 원망(願望), 희망은 종교다. 바라지 말고 바라는 현실을 살면 된다. 희망은 필요 없다. 대중에게 희망을 제시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바쁜 이들은 주로 정치인과 종교인이다. 요즘은 지식인이나 사회운동가도 힐링이라는 이름의 희망을 말하는데 이건 진짜 절망적인 현상이다. 그들의 임무는 고통을 드러내고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그래야 할 사람들이 대중이 원하는 희망을 이야기한다? 불길한 징조다.희망은 바라는 것이므로 어차피 현재에는 없다. 내가 생각하는 ‘희망’의 문제는 두 가지다. 우리 사회는 희망이 없다. 맞다. 하지만 희망과 현실을 대립적으로 사고하기 때문에 이런 좌절이 오는 것 아닐까. 현실의 일부인 ‘어두운’ 현실을 드러내면 희망이 없어지는 것처럼 생각한다. “세월호는 이제 그만” 같은 논리가 대표적이다.또 다른 문제는 바랄 망(望), 자체에 있다. 이것은 미래의 비전이다. 실천이 아닌 이미 도착한 마음의 상태다. 미래상이 현실과 멀어질수록 희망은 부정의를 미화하게 된다. 이때 사람들은 세월호 이슈를 회피하고 황우석 사태를 부정한다. 그리고 이를 기억하려는 사람들을 절망의 메신저로 취급한다.기형도가 살았던 1980년대에 비해 지금 사람들의 욕망은 하늘을 두 쪽 낼 만큼 강렬하다. 실현 가능성은 그 반대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죽을 만큼 노력하거나 노력해봤자 불가능한 일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시대의 희망은 통치 이데올로기에 가깝다. 대중은 ‘착해 보이는 말’, 희망으로 대응한다. 현실은 물질이고 희망은 생각이다. 현실을 변화시키는 것보다 ‘마음가짐’을 바꾸는 것이 쉽기 때문이다.정희진 여성학 강사희망과 현실의 간극이 클 때 우리는 절망한다. 절망에 대처하는 가장 위험한 방법은 희망이 인식이 되어 그 인식을 행동으로 옮길 때다. 나는 희망을 버리는 것이 치유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명절 인사처럼 “모든 이들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곳이 아니다.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인 동시에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 ‘희망찬 인생’은 바라는 것이 없는 사람이다.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인간은 무엇인가의 볼모가 된다. 희망은 욕망의 포로를 부드럽고 아름답게 조종하는 벗어나기 어려운 권력이다.

정희진 여성학 강사

 

 

긴 시간을 바람처럼 있는것처럼 있지 않는것처럼 담담하고 무심하게 흘러 보내왔다.

애써 잊기로 작정한 시간임을 상기시키면서

시간이라는 세월속에 망각이라는 배를 띄워 보냈다.

 

자연속의 유속에 만 의지했다.

임의적인 속도는 무시했는데 지금은 속도를 또 다시 마출려고 한다.

어떠한 사항이 발생할지 모른다.

다만 다름을 인정하면서 속도를 조율하는 지혜를 바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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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는 몸에 해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우유·프림·설탕을 뺀 원두커피는 잘 마시면 당뇨병·파킨슨병·간암·우울증 예방이나 증상 완화에 효과가 있다. 지금까지 나온 연구 결과를 종합해 보면 질환에 따라 효과를 볼 수 있는 커피의 양은 각각 다르다. 계명대 의대 생리학교실 배재훈 교수는 "카페인 등 커피의 유효 성분에 반응하는 정도가 장기(臟器)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라 말했다.

 

 

◇하루 한 잔=당뇨병 막아

커피를 한 잔 마시면 전혀 마시지 않는 사람에 비해 당뇨병 발병률이 3분의 1 가량 줄어든다. 2010년 브라질 상파울루대 연구팀에 따르면, 점심시간에 커피를 한 잔 마시는 여성은 마시지 않는 여성에 비해 당뇨병 발병률이 33% 적었다. 배재훈 교수는 "커피의 카페인과 항산화 성분인 클로로겐산이 이러한 효과를 내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커피 한 잔에는 100㎎ 가량의 카페인과 40㎎~150㎎의 클로로겐산이 들어 있다.


◇하루 두 잔=파킨슨병 증상 완화

2012년 미국 하버드대·캐나다 맥길대 연구팀에 따르면, 파킨슨병에 걸린 사람들이 하루에 커피를 두 잔 마시면 증상이 호전됐다. 맥길대 연구팀은 "커피 두 잔에 함유된 200㎎ 가량의 카페인이 파킨슨병을 악화시키는 특정 물질(아데노신)의 작용을 막아 근육 강직 등 운동 장애를 완화시키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하루 세 잔=간암 예방

2013년 이탈리아 밀라노대 연구팀에 따르면, 하루에 커피를 세 잔 마시면 간암 발병률을 40%까지 낮출 수 있다. 배재훈 교수는 "커피에 포함된 1000여 종의 생리활성물질이 간 기능을 정상화시키는 것으로 추정되며, 그중 어떤 물질이 영향을 주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루 네 잔=우울증 위험 감소

2011년 미국 하버드 공중보건대 연구팀에 따르면 커피를 네 잔 마시는 여성이 그렇지 않은 여성보다 우울증 발병률이 20% 낮았다. 연구팀은 "카페인이 세로토닌이나 도파민 같은 뇌 신경전달물질 작용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커피 네 잔에 포함된 카페인은 400mg 가량이다.

한편, 커피를 안 마시는 게 좋은 사람도 있다. 임신부와 소아는 카페인에 민감하고, 부정맥·위식도 역류환자는 병의 증상을 악화시키기 때문에 커피를 마시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

 


 


▶ ‘민물장어의 꿈’

<‘민물장어의 꿈’ 가사 전문>

좁고 좁은 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은

나를 깎고 잘라서 스스로 작아지는 것뿐

이젠 버릴 것조차 거의 남은 게 없는데

문득 거울을 보니 자존심 하나가 남았네

두고온 고향

보고픈 얼굴

따뜻한 저녁과 웃음소리

고갤 흔들어 지워버리며 소리를 듣네

나를 부르는 쉬지 말고 가라하는

저 강물이 모여드는 곳

성난 파도 아래 깊이

한 번만이라도 이를수 있다면

나 언젠가

심장이 터질 때까지

흐느껴울고 웃다가 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 없이

익숙해 가는 거친 잠자리도

또 다른 안식을 빚어 그 마저 두려울 뿐인데

부끄러운 게으름

자잘한 욕심들아

얼마나 나일 먹어야 마음의 안식을 얻을까

하루 또 하루

무거워지는

고독의 무게를 참는 것은

그보다 힘든

그보다 슬픈

의미도 없이 잊혀지긴 싫은

두려움 때문이지만

저 강들이 모여드는곳

성난 파도 아래 깊이

한 번만이라도 이를수 있다면

나 언젠가

심장이 터질 때까지

흐느껴울고 웃으며 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 없이

아무도 내게 말해 주지 않는

정말로 내가 누군지 알기 위해

내일 있을 조선일보 주최 춘천 마라톤에 가긴위한 준비로 점심겸 저녁을 하면서 덕담까지......

나의 의도와 다르게 건강을 위해 최선의 노력에 임하는 자세라는 과찬까지  듣기민망한 말을 삼키면서

26일 새벽 3시에 눈을 떴다.

대부분은 새벽 3시20분에 기상하는 일상때문에 힘들지는 않았다.

완주를 목표에 두지만 작년보다 10분이라도 완주시간을 당기고 싶지만 과욕이다. 고 생각을 고치자는 마음을 먹지만 좀 그렇다.

 

작년 서울 동아마라톤때 시간 좀 줄여볼 욕심으로 20키로까지 평균 페이스 망각하고 달리다가 중도에 포기할뻔 한 일을 잊지말아야 한다.

 

새벽4시에 된장국에 밥을 말아 가볍게 먹으면서 참 별짓 다한다는 생각에 혼 자 ㅎ ㅎ ㅎ

책자에 의하면 400칼로리에서 600칼로리정도면 충분하다고 기재 된걸 기억하면서 액체(파워  칼로리)식품을 두개 준비도 했다.

 

2번 풀코스 마라톤을 뛰어보니 소소한것들이 필요했다.

파스,음료,간식,테이핑,,,,,,

용산역에서 입석으로 출발

참 많은 사람들이 입석으로 6시 출발 춘천행 열차로 1시간 15분 정도

7시15분 춘천역하차 몸도 풀겸 1.5km 도보로  집합소에 도착

 

 

 

 

 

 

 

 

 

25km부터는 포기하는 사람들이,또한 다리에 허리에 온 몸 자체가 반란 그 자체이면서 구급차소리에 자신도 유혹을 받는다.

30km부터는 시간을 단출시키자는 유혹은 이미 망각 정해진 시간대에 온전히 완주라도 하면서

자신을 위한 합리화로 머리를 돌린다.

"원래, 아마츄어 마라톤은 완주에 있다." 라는 사회자 발언부터 천천히라도 낙오없이 가자고 또한 격려해 준 가족들의 얼굴과 완주의 기쁨을 상상하면서 겨우 겨우 한걸음씩 마지막 힘을 동원해 2014 가을의 전설 춘천마라톤을 끝났다.

 

작년에는 주최측에서 준비한 단체버스을 이용했다.

서울 도착시간이 5시간 이상

춘천에 전국차는 집합된것 같았다

 

이번에는 차편을 전철선택했다.

춘천역에서 상봉역까지 1시간 30분 종착역이라 맨먼저 줄을 서 착석에 성공

시내 지하철도 종점에 가까워 빈자리가 많았다.

계산된 교통편이었다.

3시간을 힘든속에 힘듬을 뿌듯하게 생각하면서 집에 도착했다.

극기를 즐기는 기쁨 또한 위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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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심양합 (三心兩合)

변방 관리의 딸 여희(麗姬)가 진(晉)나라로 시집가게 되자 슬피 울어 눈이 퉁퉁 부었다. 막상 궁궐로 들어가 왕과 한 침대를 쓰고 맛난 고기로 매 끼니를 먹게 되니 시집올 때 엉엉 울던 일을 근세 중국의 기재(奇才) 서석린(徐錫麟·1873~1907)은 독서에서 삼심양합(三心兩合)의 태도를 중시했다.

먼저 삼심은 독서할 때 지녀야 할 세 가지 마음가짐이다.

전심(專心)과 세심(細心), 항심(恒心)을 꼽았다. 전심은 모든 잡념을 배제하고 마음을 오롯이 모아 책에 몰두하는 것이다.

 

 세심은 말 그대로 꼼꼼히 놓치지 않고 세밀하게 훑는 자세다.

그는 책을 읽다가 중요한 대목이나 좋은 구절과 만나면 표시해두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부친에게 나아가 물어 완전히 안 뒤에야 그만두었다.

 항심은 기복 없는 꾸준한 마음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매일 밥을 먹어야 하고 날마다 책을 읽어야 한다. 하루만 굶으면 배가 고프고 하루만 안 읽으면 머리가 고프다.

" 안중근 의사가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속에 가시가 돋는다(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고 한 뜻과 같다.

양합(兩合)은 두 가지 결합과 연계를 말한다.

첫째는 독서와 수신양덕(修身養德)의 결합을 강조했다.

 그는 책상 위에 직접 제갈공명의 '계자서(誡子書)' 중 다음 대목을 써놓았다.

 "군자의 배움은 고요함으로 몸을 닦고 검소함으로 덕을 길러야 한다.

담박함이 아니고는 뜻을 밝게 할 수가 없고, 고요함이 아니고는 먼 데까지 다다를 수가 없다(夫君子之學 靜以修身 儉以養德 非澹泊無以明志, 非寧靜無以致遠).

" 고요함과 검소함으로 자신의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향상시킬 때 독서의 진정한 보람이 있다.

 내면의 성찰 없는 독서는 교만과 독선을 낳기 쉽다.

 머리와 가슴이 따로 놀면 못쓴다.

 

둘째로 그는 독서와 신체 단련의 결합을 중시했다.

공부로 잔뜩 긴장한 머리는 산책과 체조 등의 활동으로 한번씩 풀어주어 독서에 리듬과 탄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 욱여넣기만 하면 효율도 떨어지고 무엇보다 오래 지속할 수가 없다.

그저 읽고 벌로 읽으면 안 읽느니만 못하다.

 성호(星湖) 선생 식으로 말하면, 흑백을 말하면서 희고 검은 것은 모르고 말을 하지만 귀로 들어갔다가 입으로 나오는 데 지나지 않아 실컷 먹고 토하는 것과 같게 된다. 건강을 해치고 뜻마저 사납게 된다.

 

나도 옳고 너도 옳다고 한 원효… 皆是皆非(개시개비· 모든 주장이 다 옳고 또 다 그르다)

 

사진(원효대사의 초상화)

 

[지식 콘서트] 나도 옳고 너도 옳다고 한 원효… 皆是皆非(개시개비· 모든 주장이 다 옳고 또 다 그르다)

 

조성택 고려대 교수의 '경계와 차이를 넘어' (上)

 

스코틀랜드 분리 찬반 투표후

"서로 다른 의견 있었지만 모두 스코틀랜드 사랑한 사람" 英 여왕의 발언 인상적

 

원효의 화쟁론

부처님 말 아닌게 없으니 모든 경전이 최고이고 부처님 얘기 다 못담기에 다 옳은 경전도 없어

 

 

이번 전체 강연 주제는 '어떻게 살 것인가'이다. 그럼 '어떻게'란 뭘까. 사실 굉장히 난감한 질문이다. 무엇을, 언제, 어디서라는 질문은 선택지가 주어진 것이다. 점심때 뭘 먹을까. 짜장면, 짬뽕, 볶음밥…. 이런 식으로 고를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는 다르다.

 

지난 세월 식민지 해방에서 근대 산업화에 민주화,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에게 '어떻게'라는 질문은 잊혀 왔다.

 

그런데 IMF 경제 위기를 겪고 뭔가 다른 게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문제의식이 생겼다. 그러다 지난 4월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어떤 합의가 우리 사회에서 이뤄졌다.

 

황지우 시인의 '마음의 지도 속 별자리'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지금 나에게는 칼도 經도 없다/ 經이 길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길은/ 가면 뒤에 있다'. 길이라면 앞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인생에서는 다르다. 그동안 걸어온 길은 보이나, 앞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마치 사막에서처럼.

 

소크라테스는 훌륭하게 살라고 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훌륭하게 사는 것인가. 고전적 가치로 절제, 겸양, 배려, 관용이 거론된다.

지금 이 시대에 가장 절실한 건 함께 사는 지혜다.

함께 산다는 건 나와 다른 사람과 산다는 걸 전제로 하고 있다.

얼굴색, 키, 성격, 입맛, 이념이 다른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는 차이와 경계를 나와 남을 가르는 기준으로 삼아왔다.

 

자연도 그렇고, 인간 세계도 진선미란 서로 다른 것들이 어울리면서 이뤄지는 것이다.

모두 똑같은 풍경을 두고 아름답다고 하지 않는다. 산과 물은 다르지만 함께 있어 아름답다.

단풍도 빨간색과 노란색이 다투지 않고 함께 어울려 장관을 이룬다.

 

이제 우리는 다양한 사람, 심지어 다양한 인종이 함께 사회를 이뤄가는 길목에 서 있다.

이 다른 것들이 어떻게 함께 어울릴 수 있는가 하는 난제를 극복하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못 나간다.

 

대립으로 얼룩진 광화문광장, 해군 기지 분쟁이 이어지는 제주 강정마을, 송전탑 갈등이 일상인 밀양, 용산 참사, 진도 세월호 사태까지 전국 지명(地名)이 다 갈등을 상징한다.

 

명절 때 가족이 모이면 가급적 정치 얘기 안 하려 한다. 자꾸 싸우기 때문이다.

아시안게임에서 손연재가 금메달을 따자 김연아 팬들이 안티로 나섰다.

김연아를 좋아한다고 손연재를 미워할 이유가 있나.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고려대 대강당을 리노베이션한다니까 문과대 학생회가 "대강당 뺏어가는 놈은 귀싸대기 올려버린다"는 구호를 달더라. 전국 분쟁 현장마다 섬뜩한 구호가 일상화되고 있다.

 

세계 가치관 조사라는 자료를 보면 "자녀의 교육에 있어서 타인에 대한 관용과 존중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그렇다'는 답변이 56개국 중 우리가 최하위다.

나도 옳고 너도 옳다

 

그렇다면 하나의 옳음만 존재하는가.

하나만 옳으냐. 내가 옳으면 네가 그르고, 네가 옳으면 내가 그른가?

 

다른 종교나 가치관, 다른 판단은 인정하고 포용할 수 없는가?

세월호 특검법을 주장하면 법질서를 세울 수가 없고. 법질서를 강조하면 유족의 아픔은 달랠 수 없는가?

 

얼마 전 스코틀랜드 분리 국민투표가 끝나고 엘리자베스 여왕이 "스코틀랜드에 대해서 서로 다른 의견이 있었지만, 모두가 스코틀랜드를 사랑하는 사람이다"고 말했다.

 

정치적 수사이긴 했지만, 정치가 그 정도는 돼야 한다. 오바마가 대통령 선거 출마했을 때 "이라크 전쟁을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고 묻자 그는 "이라크전을 반대하는 사람도 찬성하는 사람도 다 미국을 사랑하는 사람이다"고 답했다. 더 짓궂게 "이라크와 전쟁했을 때 하나님이 미국 편이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까지 들어오자 그는 "질문이 잘못됐다.

하나님이 우리 편에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편에 있는지 물어야 한다"고 받아쳤다.

 

우리는 사회적 합의라고 하면 늘 투표, 혹은 다수결을 많이 생각한다.

민주주의 제도로서 투표나 다수결이 의미가 있는 것은 그 과정이 선하기 때문이다.

결과가 선하기 때문이 아니라 투표에 이르는 그 과정이 선하다.

민주주의는 시민의 지혜를 필요로 한다는 말이 있다. 지금 제도로서 민주주의는 투표에 의한 평화적 정권 교체, 그 이상은 아니다.

생활에서의 민주주의, 일상에서의 민주주의의 가치 실현에 대해서는 취약하다.

 

미국은 1955년 과학기술을 국가 경쟁력으로 확보하기 위해서 국가과학재단(NSF)을 만들었다.

뒤이어 1965년 국립인문진흥재단이란 단체를 만들기에 이른다. 다인종, 다문화가 섞여 있는 나라에서 어떻게 통합된 미국을 만들 것인지 고민 끝에 나온 산물이다.

 

그들은 국민을 통합하기 위해 인문학이 필요하다고 봤다. 민주주의는 시민의 지혜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만 갖고는 안 된다는 것이다. 1997년 창조적인 미국 건설을 위한 위원회가 결성되어 보고서를 냈는데 거기에는 "예술과 인문학이 명백한 공공재"라는 구절이 들어 있다.

 

1945년 해방될 때 우리는 1인당 국민소득이 860달러였다.

가나는 1190달러. 지금은 2만5000달러와 1800달러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 개발 독재, 국가 주도 발전 등등 많은 얘기가 나온다. 하지만 인문학적인 두께의 차이에 주목하고 싶다.

 

우리는 왕의 언행을 500년간 매일 기록한 왕조실록을 가지고 있는 나라다. 우리글도 있다.

 

화엄사상의 핵심은'개시개비(皆是皆非)'

 

지금부터 말하려는 화엄사상도 우리가 가진 찬란한 유산 중 하나다. 7~8세기 동아시아 사상 주류는 화엄사상이다.

이 사상을 한국적인 사유 속에서 녹여냈던 게 원효다.

 

원효의 화쟁론(和諍論)은 그런 맥락이다.

원효가 살았던 7세기 한국은 동아시아 전체로 보면 변방이다.

불교 사상 역시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파된 걸 수입한 것이다. 그래서 많은 스님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지금 한국 대학 실정과 흡사하다. 그런데 원효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학을 못 갔다. 유학 갔다 오면 배우는 게 뭔가. 전체를 배워오는 게 아니라 유학 간 학교 일부 학풍을 배워서 온다. 원효는 유학을 가지 않으면서 동아시아 변방에 앉아 중국에서 벌어지는 불교의 다양한 학설을 스스로 소화했다.

 

'화쟁'이란 말이 처음 등장한 건 '열반경종요'이다. '統衆典之部分/ 歸萬流之一味/ 開佛意之至公/ 和百家之異諍'. 부분적인 여러 경전을 통섭하여서 여러 갈래 흐름, 다양한 담론이나 이론을 한 맛으로 돌이키며 부처의 지극한 뜻, 올바른 뜻을 열어 여러 학파의 쟁론을 화통한다. 이게 화쟁의 핵심이다.

 

무슨 말이냐면 A란 경전, B란 경전, C란 경전 이 모든 게 부분적으로 옳다는 것이다.

어느 한 경전도 부처님 말이 아닌 게 없다. 그러나 어느 한 경전도 다 옳은 건 아니다. 왜? 부처님의 얘기를 다 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원효는 경전을 해석할 때마다 그 경전이 최고라고 칭송한다. 처음에 원효 경전을 보면 이상하다. 보는 것마다 최고라 한다. 그 이야기는 아무것도 최고가 아니라는 얘기다. 자기 생각이 없는 사람인가 여겼다가 다시 찬찬히 보면 '아, 그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모두가 최고라는 것이다. 어느 한 부분에 대한 해석으로선 최고라는 거다.

 

여러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고 있다. 코를 만진 어떤 이는 '길다'고 한다. 배를 만진 사람은 '벽과 같다'고 하고, 다리를 만진 이는 '기둥 같다'고 한다. 틀린 건가? 그렇지 않다. 맞다. 그래서 원효는 "모두 옳다(개시·皆是)"고 한다.

 

그런데 다들 맞는 얘길 하고 있긴 하지만 코끼리의 전모(全貌)는 모른다.

 

그래서 원효는 "모두 틀렸다(개비·皆非)"고도 한다.

원효는 우리 모두 이 장님들처럼 부분적 진리만을 알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개시개비(皆是皆非)'. 모든 주장이 다 옳다. 그러나 모든 주장은 다 틀리다. 내가 옳으면 네가 그르고, 네가 그르면 내가 옳다는 이분법적인 것이 아니라,

 

내가 옳으면 너도 옳고, 네가 그르면 나도 그르다는 생각을 가질 때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문제의식이다.

 

장님들이 와글와글 떠드는 과정이 논쟁이라면, 입을 닫고 귀를 여는 과정은 대화다.

 

 

조성택 고려대 교수의 '경계와 차이를 넘어'()

 

 

[지식 콘서트] 나를 비우고 경청하라論爭 대신 對話를 하면 갈등이 풀린다

 

 

경청은 곧 공감 - 나의 옳음과 너의 옳음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게 화쟁대화가 가능하다면 갈등은 문제가 아닌 기회

인문학의 역할 - 사회의 가장 아픈 곳이 인문학이 있을 자리지역·계층·좌우서로 다른 것을 이어줘야

 

 

대화란 얼마나 중요한가. 지난해 5월 영국 런던에서 휴가 나온 군인을 살해한 흑인 청년에게 다가가 자수를 설득한 주부 이야기를 다시 떠올려보자. 이 주부는 "무섭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범인이 흥분했지만 술이나 약물에 취해 있지 않아서 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섭지 않았다"고 답했다. 진정한 대화가 이루어진다면 무서울 게 없다. 길에서 개나 호랑이를 만나면 무서울 수 있다. 술 취한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대화가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화가 된다면 우리는 상대방이 무섭지 않다. 원효의 화쟁(和諍)은 바로 대화의 철학이다.

 

 

 

논쟁은 내가 옳고 네가 그르다는 것을 입증하는 과정이다. 반면 대화는 저 사람의 옳음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저 사람 얘기에 공감하면서 저 사람 눈에 비친 나를 보는 것이다. 논쟁이 필요 없다는 게 아니라 문제 해결을 위해서라면 논쟁은 반드시 대화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의견이 다르더라도 주장만 하지 말고 대화하면서 상대 관점에서 자기를 성찰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을 놓고 환경이냐 안보냐 티격태격하는데 어느 한쪽을 무조건 희생해야 하는 건 아닐 것이다. 안보와 환경, 둘 다 중요한 가치다. 그런데 왜 양극단에서 양자택일 논쟁만 할까. 이 사회가 민주화 시대를 관통하면서 중요하게 여긴 가치 중 하나는 사회적 정의다. 그런데 정의란 정의 그 자체뿐 아니라 해결과 화해의 과정에서 의미가 커진다.

 

최근 국민대통합위원회 콘퍼런스에 갔는데 제주 4·3사건에 대한 발표 부분에서 보수 단체 인사들이 진행을 제지했다. 처음엔 언짢았는데 30분 정도 얘길 들었더니 경청할 내용이 있더라. 4·3사건 정의를 세우는 과정에서 또 다른 아픔을 유발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만델라가 진실화해위원회를 만든 것도 그런 취지다. 화해하기 전 진실 규명이 먼저라고 얘기하지만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누는 진실 규명이 아니라 화해가 전제된 진실이라면 좀 더 승화된 화해·진실이 가능하지 않을까.

 

 

 

 

앞서 얘기한 원효의 화쟁, 개시개비(皆是皆非)는 양비론이 아니다. 의견이 다르고 논쟁하더라도 상대를 미워하지는 말자. 내가 옳으면 네가 그르고, 네가 옳다고 인정하면 내가 틀린다고 생각하는 이분법을 지양하자. 각자 주장은 나름대로 옳음이 있다. '나의 옳음''너의 옳음'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게 화쟁이고, 민주 시민의 지혜다.

 

경청은 화쟁적 대화의 과정이다. 경청은 귀 기울여 듣는 것이다. 그냥 듣는 게 아니다.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좋은 음악을 들을 때 마음을 비우고 듣지 않으면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경청도 그렇다. 상대방 얘기의 약점을 찾기 위해 경청하는 건 의미가 없다. 경청은 자기를 비우고 상대방의 옳음을 발견하는 과정이다. 즉 공감하는 것이다.

 

요즘은 공감을 심리학에서 많이 쓰지만 원래는 시 창작 이론에서 나왔다. 꽃에 대한 시를 쓸 때 꽃을 바라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스스로 꽃이 되어볼 때 시가 나온다. 공감이란 '바라보기'에서 '되어보기'로 전환하는 과정이다.

 

이것만으로 물론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출발점은 여기가 되어야 한다. 사회적 갈등과 분쟁을 중재하거나 해결하는 데 참여했던 사람들 얘길 들어보면 한결같이 경청하는 데서 합의의 실마리가 잡힌다고 한다.

 

미국 미주리주에서 낙태 문제를 놓고 대립이 벌어졌다. 낙태 시술 병원에 방화가 발생하는 등 격렬한 논란 끝에 낙태를 불법화했다. 그리고 낙태 반대론을 이끌었던 주민이 지역 신문에 기고해 "낙태를 하지 못해 태어난 한 부모 가정 아이들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자"고 제안했다. 다음엔 낙태 찬성론자들에게 전화를 걸어 함께 찾자고 요청했다. 낙태를 찬성하건 반대하건 둘 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려는 열망은 비슷하다. 방법이 다를 뿐이었다.

 

경청과 공감이 사랑의 에너지

 

대화가 가능할 때 갈등과 분쟁은 문제 상황이 아니다. 사실 갈등과 분쟁이 없는 단일 의견만 존재하는 사회는 전체주의다. 간디는 "갈등과 분쟁은 진리를 드러내는 에너지이고 기회"라고 말했다. 우리 사회 갈등과 분쟁은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대화를 통해 발전의 기회와 에너지로 만들지 못하는 행태가 문제다.

 

대화는 영어로 'dialogue'. 둘 간(dia)의 논리(logue)라는 말이다. 둘 다 말이 되는 논리라는 의미다. 그리스 비극에서 안티고네는 국왕인 삼촌 명령을 거역하고 반역을 저지른 오빠 장례를 강행한다. 왕은 국법을 어긴 반역자는 적절한 장례를 허용할 수 없다는 통치 논리를, 안티고네는 가족의 윤리를 얘기하고 있었다. 화해할 수 없는 비극에서 안티고네는 "우리는 서로 미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말을 남긴다. 성경도, 불경도 결국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친다. 이게 인문 정신의 본질이다. 오규원 시인의 '무법'이란 시에는 '사랑에는 길만 있고 법은 없네'라는 구절이 나온다. 사랑하는 데 무슨 방법이 따로 있겠는가. 사랑하는 길만 있다.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한 경청과 공감은 결국 사랑의 에너지다. 예컨대 '세월호특별법'을 둘러싼 갈등에서 법률적 완결성과 합법성이 쟁점이 되긴 했지만, 사실 여기서 결여된 건 '사랑'이었다. 법 논리가 중요하지 않거나 틀린 게 아니라 아이 잃은 부모 심정을 그 논리와 법이 담지 못한다는 게 문제다.

 

체념은 포기가 아니라 희망

 

체념(諦念)도 중요하다. 체념은 포기하는 게 아니다. ()는 사실 진리 ''자다. 불교의 사성제(四聖諦), 네 가지 진리 할 때 그 글자다. 국어사전에도 희망을 버리고 단념함과 더불어, 두 번째는 도리를 깨닫는 마음이란 뜻이 나와 있다.

 

대화에 있어서나 민주사회를 살아가는 시민 입장에서 체념은 중요한 덕목이다. 주관을 단념하고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게 체념이다. 포기하는 마음이 아니라 '희망을 만들어 가는' 적극적 마음이다. 체념하지 못하는 마음은 '희망'이 아니라 미련일 뿐이다.

 

김우창 고려대 명예 교수는 "글이란 글 밖에 있는 걸 글 안에 담고자 하는 것"이라면서 사물을 온전하게 객관적으로 그린다는 게 가능한가라는 문제 제기를 한다. 저기 있는 나무는 자기 공간을 점하고 있고, 나는 내 공간이 있다. 내 인식의 공간을 뜻한다. 내 의식이란 캔버스는 이미 그 자체로 주관적 세계를 창조하고 있기 때문에 온전하게 저기 있는 그대로 그려낸다는 게 얼마나 가능한가. 결국 글쓰기라고 하는 건 주관의 체념이다. 주관을 체념할 때 전체를 온전하게 그려내는 글쓰기가 완성된다.

 

사회적 갈등과 분쟁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경청과 대화를 통해 해결을 위한 작은 합의, 공통의 분모가 만들어지려면 자기주장을 체념하는 게 중요하며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태도다. 합의의 결과가 선해야 하는 게 아니라 그 과정이 선해야 한다.

 

기원전 3세기 인도의 아소카왕은 불교에 귀의했지만, 통치자로서 다른 종교를 인정하고 포용하는 교시를 남겼다. "종교마다 기본 교리는 다를 수 있으며, 자기 종교는 사랑하고 남의 종교를 비판하는 일은 삼가야 한다. 자기 종교를 선전하느라 남의 종교를 비난하는 것은 어떤 의도에서든 오히려 더 큰 해악을 가져다줄 뿐이다. 다른 사람의 가르침에도 귀 기울이고 존경해야 한다. 그리하면 자신의 종교도 발전하게 되고 진리도 더욱 빛나게 될 것이다."

 

인문학에서 세계의 중심은 아픔이 있는 곳

 

인문학에서 바라본 세계의 중심은 어딜까. 우리 몸의 중심은 어딘가. 가슴? 마음? 아니다. 발가락이 아프면 발가락이 중심이 된다. 귀가 아프면 귀가 중심이다. 인문학에서 바라보는 세계의 중심은 이 세상의 아픈 곳이다.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고, 또 지금 우리 사회가 앓는 분쟁과 갈등의 현장이다. 인문학은 사회 가장 아픈 곳의 중심에 서 있어야 한다.

 

또 인문학은 세상을 '이어준다'. 서로 다른 사람, 지역, 계층 그리고 왼쪽과 오른쪽, 위아래, 남과 북, 서로 다른 모든 것을 이어주는 게 인문학이다. 흔히 좌우, 진보 보수, 왼쪽 오른쪽을 다르다고 한다. 다르기도 하고 서로 구분된다. 그러나 이들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왼손과 오른손은 구분되지만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태극의 음양도 구분되지만 분리되어 있지 않다.

 

분쟁과 갈등을 문제 상황으로 바라볼 게 아니라 분쟁과 갈등을 바라보는 눈을 바꾸자. 그게 진리를 드러내는 더 큰 공동선을 만들어 가는 에너지가 되게 하자.

와우정사에 계시는 부처님

해탈의 경지라면 이런 표정을 닮지 않았나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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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써야 한다.

성공적인 작품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상의 습관을 버리지 않기 위해서이다." 톨스토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위대한 자산, 즉 시간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네.

시간을 성실하게 사용한다면 우리는 훨씬 놀라운 일을 이루어낼 걸세." 프리드리히 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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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는 마치 나병처럼 고독처럼 서서히 영혼을 잠식시키는 상처가 있다.

하지만 그 고통은 다른 누구와도 나눌 수가 없다.”

(사데크 헤다야트, <눈먼 부엉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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