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무덤 앞에서

내 무덤 앞에서 눈물짓지 말라.
난 그곳에 없다.
난 잠들지 않는다.
난 수천 개의 바람이다.
난 눈 위에서 반짝이는 보석이다.
난 잘 익은 이삭들 위에서 빛나는 햇빛이다.
난 가을에 내리는 비다.
당신이 아침의 고요 속에 눈을 떴을 때
난 원을 그리며 솟구치는 
새들의 가벼운 비상이다.
난 밤에 빛나는 별들이다.
내 무덤 앞에서 울지 말라.
난 거기에 없다.
난 잠들지 않는다./작가 미상



주위 여러분에게 드리는 말씀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오면
나는 자연스럽게 죽게 되기를 바란다.
나는 병원이 아니고 집에 있기를 바라며
어떤 의사도 곁에 없기를 바란다.
의학은 삶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이며
죽음에 대해서도 무지하니까.
 
그럴 수 있다면 나는 죽음이 가까이 왔을 무렵에
지붕이 없는 툭 트인 곳에 있고 싶다
그리고 나는 단식을 하다 죽고 싶다
죽음이 다가오면 음식을 끊고
할 수 있으면 마찬가지로 마시는 것도 끊기를 바란다.
 
나는 죽음의 과정을 예민하게 느끼고 싶다.
그러므로 어떤 진통제나 마취제도 필요없다.
나는 되도록 빠르고 조용히 가고 싶다.
회한에 젖거나 슬픔에 잠길 필요는 없으니
오히려 자리를 함께 한 사람들은 마음과 행동에
조용함과 위엄, 이해와 평화로움을 갖춰
죽음의 경험을 함께 나눠 주기 바란다
 
죽음은 무한한 경험의 세계
나는 힘이 닿는 한 열심히 , 충만하게 살아왔으므로
기쁘고 희망에 차서 간다
죽음은 옮겨감이거나 깨어남이다
삶의 다른 일들처럼 어느 경우든 환영해야 한다
 
법이 요구하지 않는 한,
어떤 장의업자나 그밖에 직업으로 시체를 다루는 사람이
이 일에 끼여들어선 안 된다
내가 죽은 뒤 되도록 빨리 친구들이
내 몸에 작업복을 입혀 침낭 속에 넣은 다음
평범한 나무 상자에 뉘기를 바란다.
상자 안이나 위에 어떤 장식도 치장도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옷을 입힌 몸은
화장터로 보내어 조용히 화장되기를 바란다.
어떤 장례식도 열려서는 안 된다
어떤 상황에서든
언제 어떤 식으로던
설교사나 목사, 그밖의 직업 종교인이 주관해서는 안 된다.
 
화장이 끝난 뒤 되도록 빨리 나의 아내가,
만일 아내가 나보다 먼저 가거나 그렇게 할 수 없을 때는
누군가 다른 친구가 재를 거두어
바다가 바라다보이는 나무 아래 뿌려 주기 바란다.
 
나는 맑은 의식으로 이 모든 요청을 하는 바이며,
이런 요청이 내 뒤에 계속 살아가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존중되기를 바란다.

- 스콧 니어링(죽기 전에 남긴 유언에서)

 

-찬 공기땜에 서쪽하늘은 그냥스치기에는 아름답다. -

 

좋은 변화와 나쁜 변화를 가르는 기준이 있을까.

어설프나마 이런 프레임을 짜 본다.

즐거움과 기쁨은 다르다.

즐거움에 천착하는 것은 좋지 않은 변화다.

기쁨을 추구하는 것은 좋은 변화다.

가령 술자리에서 친구들과 희희덕거리며 폭탄주를 돌리는 일은 즐겁다.

그러나 다음 날 변기를 붙잡고 기도할 때의 후유증은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다.

 

침침한 눈을 비벼가며 밤새 책을 읽는 일은 즐겁지 않다.

그러나 새벽에 마지막 장을 넘길 때의 기쁨은 그 즐겁지 않음의 총량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해서 어떤 일을 할 때 소생은 매번 자문한다. 이 일은 즐거움을 주는 일인가 기쁨을 주는 일인가.

 

그런 식으로 연장해 생각해보면 즐거움은 대체로 아이의 영역이고 기쁨은 대부분 어른의 영역인 것 같다.

물론 궁극의 단계는 즐거움과 기쁨의 대상이 일치하는 것이겠다.

 

이 대목에서 이런 질문 하실 수 있겠다.

신나고 즐겁게 술 마시고 다음 날도 여전히 기쁘다면 어떤 경우입니까.

그건 술이 덜 깬 상태라서 그렇다.

혹은 주머니에 구겨 넣은 카드 영수증을 아직 펼쳐보지 않아서 그렇다.

최근 연구비를 유용하여 유흥주점에서 놀았다는 공공기관 연구원들의 기사를 보면 '애들'의 영역, 즐거움의 영역을 졸업하는 것이 마냥 쉬운 일만은 아닌 것 같다.

 

남정욱/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모든 번뇌로부터 벗어난 수행자는

먹고 입는 것에 탐착하지 않는다

 

열반이란 비어있음이요, 자취가 없는 것

해탈자의 행로여,

허공을 나는 새가 날갯짓의 자국을 남기지 않듯

그 가는 길에도 자취가 없네

 

함께한 의미가 퇴색되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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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의 비극 - 성장없는 사랑에 매달려 自殺이라는 파국 맞아
어떻게 살 것인가 -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성장하는 삶을 삶아야
최고의 행복은 융합과 일치 - 타인의 존재를 긍정하고 그들 인생을 예찬해야



 

 

 

 

 

재단법인 플라톤 아카데미가 주관하는 인문학 대중 강연 프로그램 '인문학 아고라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석영중<사진>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가 '톨스토이, 성장을 말하다'란 제목으로 펼친 강연 내용을 요약해 소개한다.

톨스토이는 평생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는 사상가이자 교육자이기도 했다.

그는 어떻게 쓸 것인가에 관해 고민하기보다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해 더 많이 고민했고, 그 고민은 그의 작품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

그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 문학 속에 답을 하나 마련해 두었는데 그 답은 바로 '성장'이다.

 그는 성장을 "끊임없이 보다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인생의 진정한 의미는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노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끊임없이 성장하는 게 인생의 진정한 의미

톨스토이에게 성장이란 일단 나에게서부터 시작한다.

내가 나 자신을 알고, 이해하고, 나 자신과 훌륭한 관계를 맺으면서 더 나은 최선의 나를 만들어 가는 것, 여기에서 성장이 시작된다.

그런데 나라는 것은 네가 있기 때문에 존재한다. 그래서 나와 너의 관계, 나와 타자의 관계 그리고 나와 세계와의 관계가 중요하다.

 결국 톨스토이에게 성장이란 나와 나의 관계 그리고 나와 세계와의 관계를 올바르게 정립해 가는 과정이다.

중요한 것은 성장이 완결된 목표가 아니라는 것이다.

성장은 그 자체가 과정이다. 우리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진리 그 자체가 아니라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가 기울이는 노력이다.

 다시 말하면 변화해 가는 과정, 흐름에 올라타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것들을 그의 대표작인 '안나 카레니나'를 통해서 짚어보도록 하겠다.

1877년 출판된 이 소설은 우리에게 연애 소설 혹은 불륜 소설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안나가 아니라 톨스토이가 자기의 분신으로 설정한 레빈이라는 청년이다.

그 청년의 성장 과정이야말로 톨스토이가 우리에게 전달하려 했던 메시지다.

안나 카레니나의 자살은 성장 없는 사랑 때문

아름답고 친절한 안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사는 고위 관료의 젊은 아내다.

그런데 어느 날 모스크바에 사는 오빠가 가정교사와 불륜을 저지르자 오빠 집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 기차를 타고 모스크바로 간다.

모스크바 역에 내린 안나는 브론스키라는 매우 잘생긴 젊은 청년 장교를 만나 첫눈에 반한다.

안나는 결국 남편과 자식, 사회적인 명성도 버리고 브론스키와 내연의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의 삶은 행복하지 않다.

 안나는 브론스키가 혹시 자기를 버릴까 봐, 그의 사랑이 식을까 봐 전전긍긍한다.

 근거도 없는 질투를 해서 브론스키를 힘들게 하고, 불안에 떨고 나중에는 노이로제 증상까지 보이다가 결국은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만다.

안나의 오빠 스티바에게는 레빈이라고 하는 친구가 있다.

 이 친구는 스티바의 처제인 키티에게 청혼을 한다. 그런데 키티는 브론스키에게 마음이 가 있었기에 거절한다.

 브론스키가 안나와 내연 관계로 들어가자 키티는 절망한 나머지 병에 걸린다. 독일 온천에 가서 회복한 뒤 러시아로 돌아온 키티는 다시 레빈의 청혼을 받자 수락하고 결혼을 해서 이상적인 삶을 향해 나아간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은 처음부터 발전의 여지가 없는 사랑이다.

톨스토이에게 욕구 충족에서 출발한 사랑은 더 이상의 성장이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안나와 브론스키는 변함없는 사랑에만 매달려 있다.

 이 사랑은 변화가 없다. 안나는 브론스키와 같이 있으면 있을수록 그의 사랑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못 얻을 때는 브론스키를 증오하게 되고, 브론스키는 안나가 자기한테 너무 집착하기 때문에 그 안나가 짐스러워지고 그러다 보니 증오하게 된다.

결국 두 남녀는 겉으로는 사랑한다고 얘기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깊은 증오를 숨긴 상태가 지속된다.

안나의 자살은 증오에서 오는 자기 학대였다.

이 두 사람의 사랑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성장이 없다는 것, 다시 말하면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안나는 변함없는 사랑을 원하는데, 그것은 순리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불행해지고 결국 파국을 맞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얻는 최고의 행복은 사람들과의 융합과 일치
반면 레빈과 키티는 성장하는 삶을 산다. 둘은 결혼한 처음에는 상당히 많이 괴로워한다.

의심도 하고, 질투도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은 결국에 가서는 소통하고, 이상적인 가정, 공감하는 가정 그리고 기쁨이 있는 가정을 향해서 나아가게 된다.

레빈의 성장 단계는 세 가지다.

 

우선은 몰입이다. 그리고 소통을 하고, 그다음에는 죽음을 기억한다.

 

이 세 가지는 강의 초반에 말했던 나와 나의 관계, 나와 세계와의 관계, 변화에 대한 이해로 바꿔 말할 수 있다.

몰입이란 자기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레빈은 소설 중 풀베기 장면에서 이것을 체험한다. 지주인 레빈은 어느 날 직접 풀베기를 하기로 작정한다. 진심으로 농부들과 함께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풀베기 과정에서 그는 자아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가게 된다.

'레빈은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했다.

만일 누군가가 그에게 몇 시간 동안이나 베었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30분쯤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벌써 정오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는 풀베기에 몰입하면 할수록 자아가 해방되는 경험을 한다.

'그가 하는 일에는 지금 그에게 커다란 기쁨을 가져다주는 변화가 일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 시간 동안은 자기가 하는 일을 잊어버렸다. 일이 쉬워졌다.' 일종의 무아지경에 빠진 것이다.

 '낫이 저절로 풀을 베었다. 그것은 행복한 순간이었다.

 레빈은 오랫동안 베어 나감에 따라 더욱더 무아지경의 순간을 느끼게 되었다.'

레빈이 자아에서 해방되고 자기의 의식으로부터 벗어났을 때 그는 비로소 외부, 타자, 세계와 교감을 할 수가 있었다. '레빈은 농부들에게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주인에 대한 어려움은 이미 오래전에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레빈은 영감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잔뜩 흥미를 느끼며 그의 집안일에 대한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는 형보다 영감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톨스토이는 소통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그는 다른 저서 '인생의 길'에서 "이승에서 인간이 얻는 최고의 행복은 사람들과의 융합과 일치"라고 했다.

현대식으로 말하면 공감이다.

미래학자 제레미 리프킨이 "공감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고, 그들의 인생을 예찬하는 것"이라고 한 것은 톨스토이와 일맥상통한다.

 공감의 순간은 살면서 누릴 수 있는 경험 가운데 가장 밀도 높은 생생한 경험이다.

죽음을 기억하면 삶은 풍요로워진다

톨스토이는 죽음의 체험이 참으로 많은 사람이었다.

 세 살 때 어머니, 열 살 때는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리고 아주 좋아하던 형도 35세 때 떠나갔다.

그 자신도 58세 때 마차에 치여 사망 직전까지 간 경험이 있었다.

 그는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고, 죽음의 공포를 물리치고자 철학과 종교와 사상을 공부했다.

안나 카레니나의 주인공 레빈 역시 죽음에 대해 골똘하게 생각한다.

소설 끝에 아이를 낳고 모든 것이 정말 좋아지는 무렵에 그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서 절망한다.

 

 '그는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인간의 앞길에는 고뇌와 죽음과 망각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이해했다.'

이 작품을 쓴 후에도 죽음에 대해 골몰하던 톨스토이가 실제 삶에서 발견한 해답은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만일 반드시 죽을 거라는 걸 기억한다면 지금 이 현재가 얼마나 소중하겠는가. 죽음을 기억하게 되면 현재가 놀랄 만큼 풍요로워진다.

순간순간이 선물처럼 느껴지고 그 순간순간에 충실한 삶을 살게 된다.

우리가 죽음을 기억하고, 변화를 받아들이고, 시간과 함께 더불어 살면 시간은 모든 지나간 상처를 치유해 주는 치유의 힘이자 신의 선물이 된다.

인생의 뒤안길에는 상처도 있고 슬픔도 있고 고뇌도 있다.

 이루어지지 않는 욕망, 배신, 좌절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도 결국은 흘러가며, 어느 때인가는 시간에 의해 치유된다.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인간은 성장하는 것이다.

레빈은 소설의 끝에서 이것을 이해했다. '나의 생활 전체는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순간순간이 이전처럼 무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다

유년기 과도한 TV 시청은 毒
유산소 운동, 기억 용량 키워



기억력 저하는 자연스러운 노화 현상의 하나다.
30대 중반부터 서서히 뇌세포가 줄어들기 시작, 나이를 먹을수록 기억력을 주관하는 뇌 부위의 기능이 떨어진다. 하지만 기억을 담당하는 측두엽·전두엽을 활성화시키면 세포 수가 줄더라도 기억력은 일정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다.
한양대병원 신경과 김희진 교수는 "뇌 건강에 좋은 음식을 적정량 먹고, 충분히 자고, 사회적 활동을 오래 하면 기억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기억력 강화에 좋은 생활 속 실천법을 소개한다.

 

 


▲ 30대부터 뇌세포 수가 줄어들기 시작, 50대부터는 전반적인 뇌 기능이 떨어져 건망증 증세가 나타난다. 의료진이 뇌 MRI(자기공명영상) 사진을 판독하는 장면

 /신지호 헬스조선 기자

◇렘수면 취해야 정보 저장 잘 돼

하루 동안 받아들인 정보를 뇌에 잘 저장하려면 잠을 충분히 자야 한다. 총 수면량의 20~25%를 차지하는 렘수면 중에는 세타파라는 뇌파가 흐르는데, 세타파는 정보가 뇌에 오랫동안 저장될 수 있도록 돕는다.
김희진 교수는 "렘수면을 취하지 않으면 기억력이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가 많다"고 말했다.
그런데 렘수면량은 총 수면량에 비례하기 때문에, 잠을 적게 자면 렘수면 시간도 줄어든다. 따라서 한 번 잠들면 중간에 깨지 않고 오랫동안 잘 수 있도록 자기 전에 반신욕을 하거나, 적당한 운동을 하는 습관을 갖는 게 좋다.

◇유산소 운동 하면 해마 크기 커져

미국 일리노이어바나샴페인대 연구팀이 노인 60명을 두 그룹으로 나눠, 각각 근력운동과 걷기 운동을 1년간 시켰다. 그 결과, 근력운동을 한 그룹의 해마 크기는 1% 작아졌지만, 걷기 그룹의 해마 크기는 2% 커졌다고 한다.
유산소 운동이 기억력 강화에 도움이 된다는 걸 보여준다.
김희진 교수는 "유산소 운동을 하면 산소와 영양분이 뇌로 잘 공급된다"며 "1주일에 세 차례, 매번 한 시간 정도 걷는 게 가장 좋다"고 말했다.
요가나 명상은 필요 없는 자극에는 뇌가 반응하지 않게 만들어주기 때문에, 필요한 정보에만 집중해서 기억이 잘 되도록 도와준다.

◇적극적인 감정 표현도 중요

특정 자극을 받았을 때 느낀 감정을 겉으로 표현하면 나중에 그 사건을 기억하기 쉽다.
영국 스탠퍼드대 연구팀이 57명을 대상으로 감성을 자극하는 영화를 보게 한 뒤, 감정을 숨겼던 그룹과 그렇지 않은 그룹의 기억력을 비교했다.
그 결과, 슬픈 장면에서 눈물을 흘리고 재미있는 장면에서 웃는 등 느낀 감정을 그대로 표현했던 그룹이 감정을 표현하지 않은 그룹에 비해 영화 내용을 더 잘 기억했다고 한다.
정보를 저장하고 감정을 느끼게 하는 뇌 부위(해마)가 같기 때문이다.

분당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김기웅 교수는 "감정 표현을 제대로 안 하면 우울감을 느끼는데, 우울감은 기억력 저하의 주요 원인"이라며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손 많이 움직여 전두엽 자극해야

손을 많이 쓰면 전두엽이 자극돼 뇌에 저장된 정보를 잘 떠올릴 수 있다.
효과를 높이려면 같은 동작을 반복하기 보다는 다양한 방식으로 손을 움직이는 게 좋다.
오른손잡이라면 왼손으로 글씨를 써보고, 메모는 컴퓨터 대신 종이에 적는 식이다.
큐브 맞추기, 십자 낱말 풀이, 스도쿠 등 머리를 쓰면서 손을 움직여야 하는 놀이도 도움이 된다.
김기웅 교수는 "스마트폰도 손을 쓰기는 하지만, 단순 작업에 가깝기 때문에 기억력 강화에는 큰 도움이 안 된다"며 "다만, 평소에 사용하지 않는 쪽 손을 사용하면 어느 정도 뇌를 자극할 수는 있다"고 말했다.

☞렘수면
잠의 5단계 중 마지막 단계로, 몸은 자고 있지만 뇌는 일을 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뇌를 위한 잠’이라고 불릴 정도로 습득한 정보를 저장하기 위해 꼭 필요하다.

 

 

 

 

잊고 산다

딱히 방법이 없다

문득 기억이 스물 스물 기어올라 우울하게도 한다

딱히 방법이 없다

아마도 잊지 못하고 어느 곳에 묻혀둔것들이 간혹은 한자리를 차지하는듯

또 아래칸으로 자리를 바꿀뿐인것이다

아래

칸들을 바꾸면서 힘든 호흡을 조정할 뿐이다

오늘이 그런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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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에는 시작과 끝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실망해선 안 된다

인내하며 정진하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쭉 과정이 있을뿐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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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경계가 무너진 지구촌 시대, 전 세계 74% 시장과 관세장벽을 튼 한국은 아직도 ‘국민시대’를 고수하는 유별난 나라다. 미국 대통령은 보통 ‘친애하는 시민 여러분 (Dear American Citizens!)’으로 말문을 연다. ‘국민’은 전쟁, 재난 같은 특별한 상황에서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호칭될 뿐이다. 한국의 대통령들은 그냥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이다. 연두교서나 담화문에서 ‘시민 여러분’으로 시작했다가는 온 나라가 시끄러울 것이다. 거꾸로 박원순 시장이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이라고 했다면 드디어 본심을 드러냈다고 대서특필 될 것이다. 우리에겐 부산시민, 광주시민은 존재해도 ‘한국 시민’은 없다. 형용모순이다. 뭐가 문제인가?

 

 미국 시민, 독일 시민은 역사적 위상이 뚜렷한 존재이기에 형용모순이 아니다. 19세기 100여 년 동안 지배층과 겨루는 과정에서 내부 결속력과 독자적인 시민정신을 길렀다. 복고적·특권지향적 귀족계급에 맞서 진취적·평등지향적 윤리를 내세웠다. 상공업 발전에는 계약과 신뢰가 필수적이었고, 문화적 품격과 세속적 경건성을 결합시켰다. 내부 갈등이 발생하면 ‘자치’로 풀었다. ‘자기 생존’을 위해서는 ‘타인에의 배려’를 우선해야 한다는 공존윤리가 시민의 발명품인 ‘자치행정’에서 움텄다. 유럽에서 노동자와 농민이 권력에 도전해 왔을 때 계급타협으로 풀었던 것도 공존의 정신이었다. 국민(國民)이 되기 전 그들은 시민(市民)이었다. 워싱턴 시민, 베를린 시민이 아니라 가족·사회·국가의 균형을 지향하는 보편인이었다. 시민권이란 ‘나’를 위해 ‘남’을 존중할 의무를 뜻한다.

 

 

 우리에겐 그런 시민적 경험이 미천하니 시민권도 온전할 리 없다. 학식·교양·재산을 겸비한 중산층이 폭넓게 형성됐는데 왜 시민 호칭은 이렇게 낯설고 어색한가? 시민층이 사회를 주도할 정신적 양식을 못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공익과 공존보다는 사익과 출세에 여념이 없었다. 그것은 한국의 역사적 특수성에서 기인한다. 식민 시기와 전쟁으로 전통적 지배층이 와해된 그 빈 공간을 차지하려는 선점경쟁이 발생했다. 산업화 시대에 더욱 가열된 이 출세경쟁이 ‘건강한 시민성’보다는 ‘남다른 능력’을 키우라고 명령했다. 이 ‘남다른 능력’ 명세서엔 공존과 공익, 타인에의 배려 같은 것은 없다. 언어와 요리, 문화와 예술 같은 교양시민의 필수덕목도 없다. 고급아파트와 자동차 과시욕, 그리고 권리 사수를 위한 소송 의욕이 빛난다.

 

 그래서 이런 부끄러운 일들이 발생한다. 아파트 경비원 자살, 재계약 시비와 일괄해고 통지. 속사정을 들어보면 양측 모두 할 말이 많을 것이다. 경비원이 근무태만이거나 주민이 하대했을 가능성이 있다. 민주노총의 재빠른 개입이 주민의 경계심을 촉발했을 거다. 고용연장과 최저임금 보장이라는 민주노총의 강수(强手)에 주민은 계약파기로 맞섰다. 경비원은 최저임금 이하의 월급에 혼신의 힘을 쏟지 않고, 주민은 월 2만원 추가부담을 아끼려 해고를 불사한다. 이 경우 시민성은 증발한다. 한편 전기요금 아껴서 경비원 월급을 올려주는 아파트가 강북에 생겼다. 부자 동네에서 일어난 저 치졸한 장면은 ‘국민’으로만 살아온 탓이다. 국가 명분에 수직적으로 동원된 원자화된 개체인 국민은 수평적 관계에는 한없이 미숙한 존재다. 동시대를 사는 사람끼리 주고받는 자제와 양보, 이것이 시민성이다.

 

 이 해가 가기 전에 다시 묻고 싶은 게 있다. 세월호 참사 말이다. 일부 시민들은 넌더리를 낼 것이다. 세월호 관련법이 통과되었고 진상규명도 진행된 마당에 ‘그냥 지켜보라’는 호통이 들리는 듯도 하다. 그런데 묻고 싶다. 시민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청해진해운에 철퇴를 내리고, 관련 공무원들을 일벌백계하는 국가의 감시와 처벌을 그냥 구경하면 되는가? 신설된 국가재난처가 획기적 조직 원리를 도입해도 구조 기능의 민영화에 잠재된 공공성의 소멸을 방지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가슴을 짓누르는 묵직한 고통, 우리도 공범일 수 있다는 죄의식은 저무는 이 해와 함께 묻어야 하나? 각성하던 시민들을 다시 ‘국민’으로 귀속시켰던 것은 ‘국가개조!’라는 저 강력한 발언이었다. 자성의 물결에서 사회개혁의 단초를 발견하려던 시민들은 결국 민생과 색깔 프레임 속으로 빨려 들어 자유롭지만 무기력한 국민이 되었다. ‘국가개조’로 수직적 그물망을 다시 꿰맬 수 있겠지만 실밥이 아예 터져 있던 수평적 그물망, 그 허약한 시민성은 어찌할 것인가? 사태해결의 책임과 권리가 국가에 양도된 지금 시민은 그냥 관객이다. 국가가 법의 칼날로 참사의 원인과 과정을 토막 낼 때 법치의 원천인 시민성 배양의 기반도 동시에 토막 날 것이다. 우리는 아직 국민의 시대를 살고 있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 사회학

 

대화는 역시 필요하지않는 것임에 입증한다

자신들에게 갇혀서 상대방 의견은 안중에 없다

어떤 반론과 자신은 당신과 판이함의 존재론을 부각시킴으로 상 하의 존재에 열중할 뿐이다

"돈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줄 아는가" 라는 함축된 의미는 뭘까. 하하하 가소로운 현실앞에 절망이라는 의미가 위로를대신한다.

 

아직 기대라는것을 버리지못한 이유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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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겨울이다

눈때문이리라

바람때문인가

한강에서는 강이아니었다

바다이다

바람을 읽고 있다

바람을 그리고 싶었다

그러나 바람은 찾을수 없었다

훅 하늘속으로 공간속으로 자취을 남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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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과 남의 단점만 보고...

 

자신과 다른 사람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자신의 모습에 가깝게 다가서는 길이 된다. 하지만 행복하기 위해 피해야 할 것도 있다. 바로 스스로 불행해지는 것이다. 생활건강 매체인 '팝슈가닷컴(popsugar.com)'이 불행한 사람들의 특징 10가지를 소개했다.

 

◆변화시킬 수 없는 것에 대해 걱정한다=불행한 사람들은 "할 수 있었을 텐데", "했었을 텐데", "했어야 하는데" 등의 말을 하며 걱정이나 화나는 일을 되씹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변화시킬 수 없는 일을 걱정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대신 실수로부터 배우고 다음에는 더 잘하도록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

 

◆쉽게 포기한다=불행한 사람들은 도전에 직면했을 때 쉽게 물러나는 경향이 있다. 도전에 맞서 강력하고 꾸준한 자세를 보여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포기하면 패배감만 남을 뿐이다. 결과에 상관없이 자신감을 가지고 도전에 맞서야 한다.

 

◆운동을 하지 않는다=운동은 신체와 정신 건강에 수많은 혜택을 준다. 운동을 하면 할수록 더 건강한 삶을 살며 자신 스스로에 대해 더 좋은 감정이 생기게 된다. 운동을 배제한 채 앉아서 생활하는 시간이 길면 기분과 건강, 행복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성취 불가능한 목표를 세운다=목표를 세우는 것은 중요하다. 목표를 정해야 성취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목표가 비현실적이거나 도달할 수 없는 것이라면 문제가 발생한다. 자신의 능력에 맞춰 작지만 성취 가능한 목표를 세우는 게 중요하다. 목표를 제대로 혹은 초과 달성했을 때의 기분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을 것이다.

 

◆건강에 좋지 않은 음식을 자주 먹는다=대부분의 사람들은 먹는 즐거움을 원한다. 하지만 먹고 싶은 대로 다 먹어서는 안 된다. 불행한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먹고 싶은 것을 마구 먹는 경향이 있다. 건강에 좋은 음식을 먹어야 기분도 좋아지고 에너지를 끌어올리며, 신체 건강도 향상시킬 수 있다.

 

◆잠을 충분히 자지 않는다=잠은 필수다. 얼마나 잘 잤느냐에 따라 다음날 행복감과 생산성에 영향을 미친다.

 

◆자신의 장점이 아니라 단점에만 집중한다=사람들에게는 다 약점이 있다. 중요한 것은 장점을 수용하고 나쁜 것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자기개선은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불행한 사람들은 자신의 긍정적인 이미지보다는 약점이나 단점에만 머무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약점이 스스로를 묶는 족쇄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소셜 미디어에 사로 잡혀 있다=불행한 사람들은 소셜 미디어에 너무 사로 잡혀 있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쳐질 것인가에 대해 너무 걱정을 많이 하기도 하고 이 때문에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받는다.

 

◆남에 대해 험담을 하거나 부정적인 말을 한다=불행한 사람들은 자신이 잘 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폄훼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잘 이뤄지지 않는다. 오히려 남을 더 올려줄 때 더 큰 기쁨이 온다.

 

◆용서하기를 거부한다=불행한 사람들은 원한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마음 속에 있는 것을 다 내려놓고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용서를 제공할 때 자유와 평화가 찾아온다.

 

 

 

 

어떻게 사는 게 행복의 길일까. 누구는 돈만 많으면 된다고 하고, 누구는 건강이 최고라고 한다.
박재갑(66) 국제암대학원대학교 석좌교수가 말하는 행복의 방법은 뭘까. 박 교수는 서울대 의대 교수로서 국내 대장암 분야의 최고 권위자다. 그는 국립암센터와 국립중앙의료원을 개원시키며 초대 원장을 지냈다. 의사로서 정부 최고위직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원래 한국 담배 제조 및 매매 금지를 주장한 금연 전도사다. 서울시 금연공원 내 흡연구역 설치계획 철회, 지상파 방송에서 흡연 장면 없애기 등이 그의 작품이다. 그는 또 운출생운(운동화로 출근하는 생활 속 운동)의 주창자로도 유명하다.

그처럼 의사로서 평생 ‘몸건강’에 집중하며 살았던 그가 5년 전부터 ‘마음건강’까지 눈을 돌렸다. 그는 2009년 한국종교발전포럼을 결성해 영성과 인문학까지 폭넓게 공부하고 있다. 이 포럼은 그의 연구실이 있는 서울 대학로 서울대학병원 암연구소 삼성암연구동에서 열린다. 매달 한번씩 새벽 6시 반에 만나 가볍게 도시락을 먹은 뒤 한 시간 동안 대강당에서 강의를 듣고, 회의실로 자리를 옮겨 토론을 하고 헤어진다. 지금까지 불교, 개신교, 가톨릭, 원불교, 천도교, 유교, 민족종교, 이슬람 등 수많은 종교인들과 인문학자 등이 초청돼 강연했다.

박 교수는 “한 분야만 공부하다 보니 너무 인문학적 교양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성균관대 유학대학원을 다니면서 이 포럼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그는 연간 60~70차례 강연을 하는 유명 강사다. 이렇게 종교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그의 강연 주제도 금연과 운출생운 일변도에서 전인적인 행복 쪽으로 폭넓어졌다. 그가 공개하는 7가지 행복 비법이다.


①지구가 천국이니 다른 천국 찾지 말라

인류가 우주의 혜성을 찾아 나섰지만 아마 때가 되면 곡식이 무르익고,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하는 이런 파라다이스를 찾기 어려울 것이라는 게 그의 믿음이다. 우리가 이미 이 아름다운 천국에 있는데 여기서 아름다움을 지킬 생각을 하지 못하고 다른 천국만을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 유전자를 통해 과거 우리의 모든 조상들이 내 몸속에 들어와 있으니 돌아가신 부친 모친을 그리워하는 것보다 이 몸으로 행복하게 잘 살아가는 것이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라고 본다. 또한 우리는 죽음을 통해 모습은 없어지지만 유전자를 통해 후손으로 계속 살아간다고 본다. 다른 모습으로 영생한다는 것이다.


②인정하면 천국이고, 미워하면 지옥이다

박 교수의 부친은 제사 문화를 철저히 지키며 유교적 삶을 살았다고 한다. 모친은 개신교계 학교에 다니며, 부친이 연세가 드신 뒤엔 교회도 나갔다고 한다. 중매로 결혼한 부인은 가톨릭 신자로서 지금도 성당에 나간다고 한다. 다양한 종교 속에서 살아가면서 ‘한 종교만 아는 것은 아무 종교도 모르는 것’이라는 종교학자의 말대로 여러 종교를 알고 싶었다. 그는 “‘왜 저 사람은 저런 종교를 믿나’ 하지만, 그 종교도 공부를 해보니 진리와 장점들을 지니고 있었다”며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에서 천시하는 똥도 식물에 거름이 된다. 바이러스와 균도 생명활동에 도움이 된다. 그것 없이는 생명이 지속될 수 없다. 이 우주에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건 없다. 세상은 함께 사는 것이다.”

③욕심이 적을수록 행복해진다

박 교수는 젊은 날로 되돌려준대도 싫다고 한다. 현재의 자신이 될 확률은 로또복권에 당첨될 확률보다 적을 만큼 자신의 능력보다 현재 과도하게 잘 돼 있다는 것이다. ‘아침마다 눈을 떠 밝은 세상 바라보며, 종일 즐겁게 일하네. 무얼 먹든 맛있고, 깊은 잠 잘 수 있으니 더없이 행복하구나’ 그가 지은 시다. 자족감이 담겨 있다. 건강하지 않으면 밥맛이 없기에 무얼 먹든 맛있다는 건 건강하다는 증거다. 깊은 잠을 잘 수 있다는 건 고민이 없다는 이야기다. 그는 “행복을 더 높은 기준에만 두면 영원히 도달할 수 없다”며 “만족해야 한다”고 했다. 그의 부친은 ‘배곯지 않으려면 열심히 하라’고 했단다. 출세하라는 말은 안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지금 배는 안 곯으니 아버지 희망을 이뤘고 그래서 더 바랄 게 없이 행복하다”며 웃는다.

 ④담배 귀신을 멀리하라
그는 몸 건강을 위해 금연은 필수라고 한다. 시판되는 음식물에서 발암물질이 한두 가지만 검출되면 난리를 치면서 15종의 A급 발암물질을 포함한 62종의 발암물질이 검출되고, 4000종의 화학물질이 들어 있는 독극물을 흡입한다는 것은 죽으려고 작정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암 발병 원인의 20%, 사망 원인의 30%가 담배에 있으므로 국민 건강을 생각한다면 담배는 팔아서도 안 되고 사서도 안 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히틀러가 유대인 600만명을 죽였는데, 담배는 매년 세계에서 600만명 이상을 죽이고 있는 치명적 독이라는 것이다.

⑤차 타지 말고 걸어라

박 교수가 금연과 함께 몸 건강을 위해 필수로 요구하는 것이 ‘운출생운’이다. ‘앞으로 수명이 연장돼 지금 중년 세대는 100세, 젊은 세대는 120세까지 살아야 한다. 그러면 60년가량을 노인으로 살아간다는 이야기다. 건강하지 않은 채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아간다면 수명 연장은 행복이 아니라 불행이다. 따라서 나이 들어서도 건강하려면 특별히 힘 안 들이고 30분 이상 걷는 게 최고’라는 게 그의 논리다. 좋은 음식을 먹어도 뇌혈관과 심혈관 사망률 1%를 낮추는것조차 쉽지 않은데, 하루 30분 이상 빨리 걷는 것만으로 뇌혈관과 심혈관 사망율 20~30%, 암 사망율 10%를 줄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주례를 볼 때도, 청와대에 갈 때도 운동화를 신고 간다고 한다.

⑥새로운 것 배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

남들이 보면 굉장히 아는 게 많은 것 같지만, 전문가라는 게 그렇지 않다고 한다. 같은 빛을 비춰도 볼록렌즈로 한 곳만 비추기 마련이다. 그러다 보니 오목렌즈로 여러 군데 비추는 사람들에 비해 삶도 단조롭고 아는 것도 없다는 것이다. 종교발전포럼을 만든 것도 평소 인문학 서적을 거의 보지 않은 탓에 사고의 폭이 좁아 대화할 때 부끄러워서였단다. 그는 지난해엔 상생이란 주제로 그가 근무하는 서울대 암연구소 삼성암연구동에 사진을 전시했다.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들이다. 집 쓰레통 주면에 핀 꽃, 야생화 등이다. 그는 지금도 늘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심으로 눈을 반짝인다.

⑦남을 행복하게 해줘야 내가 행복하다

그는 그렇게 바쁘지만 핸드폰을 늘 켜놓는다. 그의 환자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 바로 응답하기 위해서다. 퇴원환자 모임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이만큼이나 된 것은 남의 도움 때문이라고 본다. 인간은 도움을 받고 도움을 줄 때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유학대학원에 갔을 때 유학을 두 글자로 말하면 상생이라고 했는데 공감했다. 우리들은 그렇게 서로의 덕에 살아가는 존재라서 그렇게 할 때 더욱 행복하다는 것이다.

 

 

함께 우린 걷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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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문호, 안톤 체호프의 <슬픔>이라는 단편 소설이 있다. 주인공은 마부 이오나이다. 이오나는 얼마 전 아들을 잃었다.

그러나 그에게 그 사건 자체가 어떤 긴장을 만들어내는 건 아니다. 그는 사흘 동안 병원에 누워 있다 간 아들의 죽음을 ‘주님의 뜻’으로 돌린다.

 물론 이것은 신앙고백적 차원이라기보다, 아들의 허무한 죽음에 대한 아픔의 표현일 것이다. 그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허무하게 먼저 세상을 떠난 아들의 죽음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부 이오나는 아들의 죽음에 대하여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한다. 혼자서 죽은 아들을 생각하는 일은 끔찍한 일이지만, 누군가와 아들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는 것은 그나마 위로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마차를 탄 손님들과 자신의 아들의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는다.

한 인터넷 신문에 이런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내가 믿었던 신앙이 나를 배신했다.” 세월호 사건으로 외동딸을 잃은 한 어머니의 슬픔에 관한 기사이다.

 

 기사를 보면, 그의 슬픔은 세월호 사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슬픈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으려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오나의 상황과 같다. 세월호 사건으로 외동딸을 잃은 그 어머니에게서 새롭게 생겨난 긴장은 이렇게 표출되고 있었다.

“말로는 아픔을 같이한다고 했다. 공감한다고 했다. 이해한다고 했다. 그런데 말뿐이었다.

행동이 없었다.

기도로만 아픔을 풀어 가고, 기도로 아픔을 치유해야 한다고 했다.

교회는 나와 유가족을 상처가 있는 사람, 위로가 필요한 사람으로 대했다. 자신들의 틀 안에 우리를 가두어 놓고,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 같았다.

필요할 때만 형제자매이고, 정작 내가 어렵고 힘든 때가 되니 등을 돌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관심이었다.”

 

체호프가 소설 <슬픔>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은 ‘이미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을 견디는 인간의 모습’이다.

일어난 사건의 피해자는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어찌하지 못한다.

그것이 가장 큰 슬픔으로 다가온다. 다만 피해자는 그 사건에 대한 자신의 슬픔을 말하고 싶어한다.

혼자 생각하면 끔찍하니까 누군가와 함께 그 슬픔에 대해서 말하려고 한다.

 

그것은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회복’의 메커니즘이다.

 

지금,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 정부도 국회도 교회도 잘 모르는 것 같다.

이미 일어난 사건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기에, 유가족들에게도 ‘체념’이라는 상태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정부나 국회를 보면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닌 사건 자체에만 몰두하는 것 같다.

그래서 새로운 긴장이 생겨나고 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의 슬픔을 나누는 일이다.

 

체호프가 주목했듯, 정부와 국회 그리고 교회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미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그 사건을 견디는 유가족들의 모습이어야 한다.

 

슬픔을 나누고 싶어하는 유가족들에게 ‘그만 말하라’고 하는 사람이 가장 나쁜 사람이다.

<슬픔>에 이런 구절이 있다.

“아들이 죽은 지 벌써 일주일이 되어가는데, 그는 아직 그 누구와도 제대로 말을 해보지 못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바로 이런 마음일 것이다.

그들은 아직 그 누구와도 제대로 말을 해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만 말하라니? 이오나는 혼잣말로 이렇게 속삭인다. “혼자 있을 때는 아들에 대해서 생각할 수가 없다…

누군가와 이야기할 때에는 아들 생각을 할 수 있지만, 혼자서 생각하거나 아들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견딜 수 없이 두렵다…”

 

왜 대통령은 국회 연설 하러 가면서, 자신들의 슬픔을 들어달라는 유가족들의 절규를 그냥 지나치는가?

왜 교회는 그들과 제대로 말 한번 나눠보지도 않고, 서둘러 귀를 닫는가? 그들의 아픔은 아직 충분히 말해지지 않았다.

 

장준식 재미 거주·목사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 1, 2>

김형경 지음, 민예당, 1994

 

“다시 태어나면 뭐 하고 싶어?” “미쳤냐, 또 태어나게!” 버스 안 두 사람의 대화. 다들 살기 힘든가 보다. 그래도 이런 가정이 끊이지 않는 걸 보면 말로는 “한번뿐인 인생”이라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사는 게 고달파도 계절 가는 것이 서운한 사람들에게 죽음을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는 자살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다른 질병과 마찬가지로 자살은 우울증과 대뇌 장애(brain disorder)라는 신체적 고통 때문이지만 모든 자살이 그렇지는 않다.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에 그런 죽음이 나온다. 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함께 했던 다섯 명의 젊은이들이 7년 만에 다시 만난다. 가장 치열하게 노동현장에서 활동했던 최민화가 죽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여느 자살자와 달리 단정한 필체의 긴 유서를 남긴다. “…나에 관한 이야기, 나의 현재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니 무척 어색하구나… 내 선택을 패배나 절망이라고 생각하지는 마. 단순한 충동도 아니야. 그저 내 삶이 여기까지라는 거야. 여기까지.”(1권, 88~89쪽)

알려졌다시피 이 작품은 김형경의 첫번째 장편소설로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1억원의 고료로 유명했던 제1회(1993년) 국민일보 문학상 수상작이다. “1980년대의 고뇌와 좌절을 절제력과 탄력 있는 신선한 문체, 집요한 자의식적 글쓰기로 성취했다”는 절찬을 받았다.

 

이 소설을 읽은 지 20년이 되었다. 그간 나는 한번도

 

“내 삶이 여기까지라는 거야. 여기까지” 이 구절을 잊은 적이 없다.

10년은 인상적인 여운으로 남았고, 나름 인생의 쓴맛을 들이켠 이후로는 작가(당시 33살)가 죽음과 자살에 대해서 잘 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작품에서 자살의 이유는 “패배, 절망”, ‘제정신이 아님’이 아니다. 어느 정도 자기 충족적 만족감과 이성적 판단에서의 “여기까지”라는 인식이다.

 

나이와 상관없이 삶이 완결되었다는 것이다.

 

게임 이즈 오버.

 

끝났다는 의미의 오버는 의미심장하다. 오버는 넘치는 상태. 할 일도, 해야 할 일도 없는데 계속 살아야 하는 것. 단지 죽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는 시간. 넘치는 술잔에서 계속 버려지는 맥주와 비슷하다. 이건 모두 엑스트라의 시간, 왜 하는지 모르는 연장전이다.

죽음뿐 아니라 일이나 재능, 관계에서 “여기까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런 결정을 내려야만 하는 때가 있다. 슬프지 않다. 최선을 다했고 행복했고 이룰 만큼 이루었고, 잃을 만큼 잃었고 아무것도 추구할 것이 없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끝난 시점. 살기 싫은 것이 아니다. 삶이 좋은 의미에서 소진(消+盡)된 것이다. 아프거나 미치지 않은 상태에서 “여기까지”라고 판단할 수 있다.

만일 80대 후반의 말기 암 환자가 반복적인 수술 끝에 자살했다면 비난하는 사람, 드물 것이다.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상당할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다. 자살에 대한 낙인은 젊음에 대한 욕망,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객관적으로 하나의 극(劇)이 끝났다. 사는 기간을 국가, 신, 절대자만이 판단해야 하는가? 이 소설의 죽음은 자연스러웠다. 설득력 있다.

의학적으로 자살의 원인은 미래가 불행할 것이라는 확신이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교정되어야 할 인지 장애다. 삶과 죽음의 유일한 차이는 행이든 불행이든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가능성이다. 그래서 나는 이 구절도 매우 좋아한다. “골목이 꺾이는 곳마다 그대 만나리.”(237쪽) 죽음의 반대는 호기심,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알 수 없다는 불안과 설렘이지 당위로서의 생명이 아니다.

 

“여기까지”라는 개인의 판단을 존중하자? 개인의 자유 이슈가 아니다. 이것은 공동체의 문제다. 생각해본다. 나는 타인의 삶에 호기심을 주는 사람인가. 인간에 대한 혐오로 죽고 싶은 마음을 부채질하는 사람인가. 우리 사회는 구성원들이 어쨌든 살아보자는 의욕을 일으키는 매력적인 곳인가. 고통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가능성뿐이다. 생사의 갈등으로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이들에게 제시되어야 할 것은 미지라는 기대가 있는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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